-
백제 허망한 멸망의 이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3. 17:18
부여 정림사지 내에 있는 오층석탑은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렸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그 치적을 탑신에 새겼기 때문이니 1층 비신 4면과 지붕돌 받침에 걸쳐 새겨진 총 117행 2,126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부 풍화·박락된 글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판독이 가능한 이 장문의 기록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제목과 함께 시작한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내용을 적은 비명이라는 뜻이다.
소정방은 기공비를 따로 만들지 않고 사비(泗沘) 도성 한 가운데 있는 절의 큰 화강암 탑에 새겼다. 따로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듯하지만 망신주기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 내용은 훈계조이며 모욕적이나, 몇 문장은 기록이 많지 않은 백제의 역사 규명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이를 테면 도성 함락 당시 왕자 부여효(孝), 대수령 대좌평 사탁천복(沙吒千福), 국변성(國辨成) 이하 700여 인이 궁궐에서 함께 사로잡힌 사실과, 당시 백제가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었고 전체 호구가 74만호 620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 등이다.( 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縣戶卄四萬口六百卄萬)
다만 이 기록은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戶數)가 76만호였다는 <신당서> 및 <자치통감>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76만호를 기준으로 해도 백제 멸망 때의 인구수는 380만 명(호수 76만호X5)으로 620만 명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어찌됐든 백제는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했다. 7월 8일,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나라 군대가 백강(금강) 입구 기벌포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지 불과 열흘만이었다.길게 잡아도 백제는 당나라 침공 10일만에 멸망한 셈이다. 이후 소정방은 8월 2일 승전 축하연을 갖고, 그 한달 후인 9월 3일 의자왕과 왕족 및 대소신료를 포함한 총 12,093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붙잡혀간 의자왕은 장안 대명궁의 당 고종과 측천무후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가졌고, 도착 7일만에 병사했다. 이상의 백제 멸망에 관한 기사는 600년 역사, 38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결과이다.
백제는 왜 이렇듯 허망하게 멸망했을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원인은 내분으로, 그 과정을 앞서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3 - 백제 장수 의직의 재발견'에서 피력한 바 있다.
660년 7월 8일, 당나라의 대규모 함선이 백강 입구 기벌포에 모습을 드러내자 비로소 사비성이 분주해졌다. 즈음하여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머잖아 나·당연합군이 도성으로 몰려들 터, 백제는 하루빨리 방어 태세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백제는 그때까지도 확실한 작전 지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에 나타난 당시의 혼란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조정은 요즘은 여·야처럼 국난에 임해서도 한치의 양보 없이 극단으로 치달았으니, 무조건 상대 의견을 배격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었다. 조정은, 당나라와 먼저 결전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좌평 의직(義直)과, 당나라보다는 신라와의 결전이 선행돼야 한다는 달솔 상영(常永)의 의견이 대립했다.
"당병(唐兵)은 배를 타고 멀리 왔으니 지금 상당히 곤비해 있을 것이오. 그들이 하륙(下陸, 육지를 밟음) 즈음 돌격하면 필시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오. 당병을 깨뜨리면 신라는 겁을 먹고 물러갈 것이니 굳이 싸움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당병은 멀리 원정을 왔으므로 싸움을 빨리 끝내야 유리하다는 것을 알 것이오. 따라서 하륙 순간에는 전군이 분전할 것이니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 없소. 그보다는 험로를 막아 군량을 바닥내 지치게 만든 후 공격이 가함이 옳을 것이오. 그동안 우리는 신라를 공격하면 되오. 신라병은 우리에게 번번히 패해 겁을 먹고 있으니 그들 먼저 깨뜨려 뒤를 편히 하고, 당병은 기회를 봐 공격하도록 합시다."
결정은 당연히 의자왕이 내려야 할 터, 하지만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왕은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동안 좌고우면하더니 갑자기 귀양간 좌평 흥수(興首)의 대답을 듣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16년(656년)조에 의하면 과거 좌평 성충(成忠)은 의자왕의 독단적인 정치 노선에 뜻을 달리하다 옥에 갇혀 사망했는데, 그때 성충은 죽으면서 의자왕의 독선이 당나라와의 전쟁을 불러 올 것이라 예견하고 이에 관한 방비책을 남겼다.
흥수도 성충과 같은 도당이라 하여 고마미지(古馬彌知, 전남 장흥)로 유배를 보냈던 바, 그의 생각을 듣고자 하는 것도 딴은 이해가 갈 일이었다. 흥수의 대답 역시 성충의 유언과 거의 같았다.
"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니 장수 한 명이 칼을 들고 막으면 적병(敵兵) 만 명이 덤비지 못할 것이다. 당병은 기벌포를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 후, 양군(兩軍)의 식량이 바닥나고 지친 후 공격하면 백전백승할 것이다."
사자가 돌아가 흥수의 대답을 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충의 도당이 다시 세력을 얻을까 두려워한 임자(任子) 등의 신료가 그 뜻에 반대하고 나섰다.
"듣자니 흥수가 오랜 귀양살이에도 전혀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구은(舊恩)만을 생각하며 복수의 날을 꿈꾸고 있다 합니다. 지금 그는 성충의 유언 찌꺼기를 주워 정세를 오독(誤讀)하고 있는 바, 그의 계책을 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당병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을 넘게 한 후 반격하면 옹중(甕中, 독 안)에 든 자라를 잡음과 같이 양적(兩敵)을 분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험로에 의지해 적병을 방치하며 군사들의 용기를 거두려 하십니까."
이렇듯 신료들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방어의 골든타임은 다 지나갔으니 7월 9일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 백강까지 들어왔고,(본래는 ①썰물 때까지 진입을 막아 배를 긴 뻘에 좌초시키고, ②화공으로 배를 공격한 후, ③뻘에 내려 운신이 힘든 적병들을 궁시로 처리한 다음, ④그 나머지들을 칼로 공격하려는 계획이었겠으나) 돌성(突城, 충북 음성)에 대기하던 김유신의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까지 들어왔다. 당나라 군사가 순식간에 사비성 30리 전방까지 밀려들자 이제는 이러고 저러고 할 짬이 없었다.
이에 의직은 제 뜻대로 전군(全軍)을 몰아 전선으로 나갔으나 지리(地理)의 이(利)를 얻지 못한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1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패를 당했고, 분전하던 의직은 전사했다.(<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20년조) 신라군과의 싸움을 주장하던 달솔 상영과 좌평 충상(忠常)은 계백을 따라 5천 결사대와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생포되고 말았다. 계백은 전사했다. 이로서 백제의 마지막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고 사비성은 함락되니 때는 7월 13일, 전투가 시작된지 불과 나흘만이었다.
이렇게 수도는 함락됐다. 하지만 이것으로 600년 역사의 백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수도만 함락되었을 뿐 22담로를 비롯한 지방군은 거의가 온전했다. 그리하여 임존성과 주류성을 기반으로 한 백제부흥군이 창궐하였으니, 임존성의 왕족 부여복신(扶餘福信)은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豊)을 모셔와 왕으로 삼고 신라·당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자 백제의 여러 성과 고을이 호응하여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복신에게 귀부하였던 바, 부여복신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승병 등을 모아 궐기한 승려 도침(道琛)도 발군의 활약을 보였던 바, 두 사람은 주류성에서 합류하여 본격적인 백제부흥군을 꾸렸다. 그리고 이때 백제의 유장(遺將) 흑치상지(黑齒常之)도 합세하여 웅진도독 유인원(劉仁願)의 당나라 군사와 김흠순(金欽鈍)의 신라 구원군을 크게 깨부수고 200여 개 성을 탈취하니 백제의 부활은 곧 이루어질 듯 보였다. 이때의 부흥군은 3만 명 정도로서, 유인원이 제 공적을 기려 부소산성에 세운 기공비에는 "도침과 복신의 군대가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적혀 있다.
* 부여복신은 백제 무왕의 조카임이 확실하나 도침에 대해서는 별 다른 기록이 없는데, 1979년 개암사 불상의 복장유물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흘리고간 별기(別記)에서 도침이 개암사를 창건한 묘련대사의 제자라는 기록이 발견됐다.
하지만 여기서도 내분이 일어났으니 2인자의 자리를 놓고 세력을 다투던 복신과 도침은 결국 복신이 도침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그것으로 내분이 정리된 것이 아니었으니 얼마 후에는 복신과 부여풍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에 복신은 이번에는 풍을 제거하려 들었으나 역습을 당하여 자신이 먼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 속에 누워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풍은 이를 먼저 눈치채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 / <일본서기>에는 풍왕이 건강한 장정을 시켜 복신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소금에 절였다는 더욱 끔찍한 기사가 붙는다)
즈음하여 백제부흥군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처럼 이편과 저편으로 나눠 다투기에 바빴을 터, 자연히 국력은 소모되었고, 결국은 당고종이 "안 되면 돌아오라"고까지한 당군의 공격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결국 백제는 663년 왜국의 국운을 건 원병에도 불구하고 그해 8월 백강구 대전(白江口 大戰)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였고 주류성은 항복하였다. 그리고 이때 풍왕은 측근들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하니 백제부흥 운동은 사실상 종막을 고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임존성으로 몰려들었고, 이때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안 백제장군 흑치상지와 사탁상여가 당나라 붙어 임존성 공격에 앞장 섰던 바, 수차례나 당군을 물리쳤던 난공불락의 성은 결국은 함락되어 (663년 11월) 3년 반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상, 내분으로써 나라가 망한 우리의 역사의 한 장(章)을 짧게 피력해 보았는데, 혹시라도 데자뷰를 보게 될까, 불안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즈음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산대군·중종·인종·명종·숙종·경종태실 (0) 2022.12.06 제르단 샤키리와 코소보 사태 (4) 2022.12.05 서울 위례동에 백제 무왕이 쌓은 성이? (1) 2022.11.30 세종대왕의 특명-백두산 북쪽의 공험진 비를 찾아라 (0) 2022.11.20 태조·세종·문종·단종·예종·폐비윤씨 태실 (1) 202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