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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첫 사찰은 하남 천왕사?초기 백제를 찾아서 2021. 2. 8. 23:57
초기 백제의 유적을 찾아 헤메는 중이다. 이번에는 백제 최초의 사찰을 찾아 보았다. 흔히들 백제 최초의 절을 영광 불갑사(佛甲寺)라고 생각한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이국 스님 마라난타가 배를 타고 상륙한 곳이 전남 영광이라고 전해지는 만큼 그곳의 고찰(古刹) 불갑사가 백제 최초의 절이 아닐까 생각되어지는 것이다.(그래서 법성포에는 뻑쩍지근한 한국+인도풍의 국적불명의 절도 하나 들어섰다) 실제로 불갑사 사적기인 <불갑사창설유서(佛甲寺創設由緖)>에는 절이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해인 침류왕 원년(384)에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됐고 신라 애장왕 5년인 805년에 중창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 사적기가 20세기 들어 쓰여진 것인 바,(1909년) 위와 같은 고정 관념이 반영되었을 여지도 충분하지만, 무엇보다 백제 초전 법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 배치된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 1년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진(晉, 동진)에서 와, 왕이 그를 궁궐로 맞이해 예우하고 공경했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이듬해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10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전부이고, 기타 불교 전래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보다 수십 년 앞서 쓰여졌을 <해동고승전>(1215년)에는 마라난타를 호승이라는 명칭과 함께 "축건(竺乾)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명시하고 있는 바, 그가 인도 사람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눌지왕 때 신라에 불법을 전한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墨胡子)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얼굴이 먹처럼 검은 외국인'을 말함이니 그 역시 고구려 땅에서 포교하던 인도 스님일 가능성이 100%다. 비처왕(소지왕) 때 온 아도(阿道) 스님 역시 외양이 묵호자와 비슷하다 하였던 바,(儀表似墨胡子) 그 역시 인도 출신 스님이었을 것이다.(☞ '동서양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들 II')
이와 같은 기록들을 보자면 불갑사가 백제 최초의 절일 가능성은 전무하니 침류왕 2년(385)에 세워진 백제 최초의 절은 당연히 한산주, 즉 수도 한성(漢城)이나 그 인근에 세워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일체 존재하지 않고, 기록상으로 전하는 백제 최초의 절은 성왕 7년(529) 웅진(공주)에 건립된 대통사(大通寺)이다.(<삼국유사>)
대통사는 일제시대 가루베지온(輕部慈恩)이라는 도둑놈(송산리 왕릉 유물을 먼지까지 쓸어간)에 의해 그 위치가 확인되었으나 이후 묻혀졌다가 최근 '대통'(大通)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며 실체가 규명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웅진시대의 사찰이고, 아울러 그때의 절로서는 유일무이하다. 공주에도 절이 많아 존재했을 터인데 기록으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즉, 한성시대의 백제 사찰을 찾 일은 절대 만만치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짐작가는 절이 두 곳이 있다. 그 절 터가 있는 곳은 우연찮게도 하남위례성의 후보지 중 하나였던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 그 첫 번째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철불(높이 2.88m)이 놓여졌던 하사창동(下司倉洞)의 절 터이다. 그 철불은 지금 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을 압도하고 있는데, 물론 백제시대의 불상은 아니고 신라 하대나 고려 초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불상이 놓였던 좌대는 최근까지 그곳에 있다 지금은 하남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대찰(大刹)의 주춧돌과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까닭에 이곳을 백제의 왕궁 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정도의 규모면 왕궁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겠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남위례성은 이미 풍납·몽촌토성과 그 일대의 고분군(석촌·가락·방이동) 지역을 포함하는 한성으로 결말 지어진 바,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겠고 다만 그곳을 백제 최초의 절 터로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그 규모도 규모거니와(2만 ~2만5천 평) 구전되는 절의 이름 또한 천왕사(天王寺)로 국왕의 지원을 받는 왕실 사찰로의 이미지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와 일본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세운 통일신라 최초의 절인 사천왕사나, 백제계 사찰이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유명한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는 모두 왕가에서 세운 국찰(國刹)이다.
하남 천왕사는 고려시대는 물론이요 적어도 조선 초까지도 대찰의 명성이 유지됐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세종실록>의 기록이니, 세종 28년(1446) 4월 23일의 기사에 "광주(廣州) 천왕사의 사리 열 개를 궐내(闕內)에 바쳤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루 미루어보자면 지금의 하사창동이나 상사창동(上司倉洞)의 지명도 절(寺)의 아랫쪽 창고 동네, 위쪽 창고 동네라는 의미로써 만들어진 것 같은즉, 이것은 서울 북창동과 남창동이 선혜청의 북쪽 창고와 남쪽 창고가 있던 동네에서, 구리시 동창(東倉) 마을이 동구릉의 관리 창고가 있던 동네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데에서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 정확한 시대까지는 모르겠으나 하사창동의 마을과 밭에서 주춧돌이나 심초석 같은 옛 절의 자취를 찾는 일은 정말로 어렵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심초석이 방치해 있음은 안타깝다. 그 심초석은 다름 아닌 백제 목탑이 세워졌던 자리로 짐작이 되는 바, 이는 백제 최초의 탑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탑에 적어도 150년을 앞서는 유구이며 어쩌면 일본 시텐노지 오층목탑의 원형이 있었던 탑지(搭址)일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후보지는 춘궁동 동사(桐寺·同寺)이다. 동사는 절에 관한 기록이 전혀 전하지 않는 미스터리한 사찰로서 지금은 그 자리에 다보사라는 이름의 절 본당이 어정쩡하게 세워졌다. 그런데 그 본당이 깔고 앉은 자리가 옛 법당지(제 1사지)의 일부여서 그 시절의 자취가 교란당했으나, 대신 주변에 흩어진 초석들로부터 옛 대가람을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탑 2기가 서 있는 자리 뒤로 보이는 건물지(제 2사지)와, 사지 오른쪽으로 돌면 만날 수 있는 마애불상이 있는 구역(제 3사지), 석탑 동쪽 순환도로변 구역(제 4사지) 등의 절터 또한 지대하다.
절의 입구에는 서울 강남권과 하남시 강태공들로부터 사랑받는 고골 낚시터라 불리는 큰 저수지가 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저수지는 옛 절의 연못이었던 곳으로 1983년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났을 때 수많은 기와편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대는 송파~하남간 도로의 입구에서부터 현재 다보사 본당이 있는 곳까지가 모두 절이었으니 신라 황룡사에 필적할 만한 백제의 대찰이 있었다는 구전을 무시하기 힘들 듯하다.
실제로 불교방송에서 1988년 절터에서 발견된 치미 조각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황룡사 치미보다 더 큰 측정값을 얻었다고도 하고, 나아가 1988년 동국대에서 실시한 '구리-판교간 고속도로 공사에 따른 구제발굴 조사'에서는 정면 34.3m, 측면 26.2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와 정면 22.5m, 측면 6.4m의 중형 건물지 및 회랑지 등이 확인되기도 했다.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동사에서 주목받는 건물지는 사방 28m로 이루어진 장방형의 초석터로,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목탑 건물지로 보고 있다. 초석의 배열 형태로 볼 때 고구려 금강사지나 정릉사지 등에서 보이는 팔각구층탑 형태의 초기 목조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인데, 그 규모는 경주 황룡사의 초석터(사방 22.2m)보다 크다 한다. 쉽게 말해 황룡사 구층목탑의 규모를 상회하는 고구려계의 거대한 팔각구층목탑이 이곳 동사에 있었다는 것이다.(교란이 심하기는 하나 그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하남 동사에 지어진 현대식 당우 앞에서 초석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근방에서는 불상대좌의 기저부로 여겨지는 8각 석렬·石列도 확인된다)
기타 동사지에서는 건물지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기와편과 토기편·자기편·저울추·청동불상·소조불 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기와는 암막새와 수막새·암키와와 수키와·명문기와·귀면와(鬼面瓦) 등으로, 암막새의 경우는 꽃과 열매무늬·당초무늬·꽃타래무늬·해무늬·연꽃무늬 등으로 다양하였다. 특히 가장 오래된 절터로 보이는 제1사지에서 이상의 것에 앞서는 기와편들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옛 절터일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2018년 하남시 감일동에서 발견된 50여 기의 백제 시대 무덤들은 이와 같은 가능성을 더욱 짙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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