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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양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들(II)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18. 5. 18. 09:30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아래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 공양당(異次頓供養幢)', 또는 백률사에 세워진 관계로 '백률사 석당(栢栗寺石幢)'으로도 불려진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한지 약 300년 뒤인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고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된 6각의 석당이다. 화강석에 조각되었으며 본래 석당 위에는 지붕돌이 씌워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하지만 조각의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목이 잘려진 이차돈의 몸에서 뿜어지는 피, 떨어진 목, 그리고 그때 내렸다는 꽃 비를 모두 살필 수 있다.(나머지 5면의 글자는 마모되어 식별이 어렵다) 



    이차돈 순교비(104x29cm/보물 지정 예정 유물)



    삼국 중에서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무려 150년 이상 뒤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불교를 공인했는데, 이는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건과 비견된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마저 엇비슷하다. 백제도 비슷한 시기인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반면 신라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했으나 토착 종교에 밀려 널리 퍼지지 못했고,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이르러서야 이차돈의 순교로써 어렵사리 불교가 공인된다.('삼국유사') 


    흔히들 신라에 불교에 전한 묵호자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하나, 문자 그대로 얼굴이 먹처럼 검은  호인(胡人), 즉 남방계 외국인을 말한다. 즉 묵호자는 고구려에 왔던 인도의 승려로서 내친김에 불교 불모지 신라 땅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전래한 승려 순도(順道)와 이후의 아도(阿道)화상도 중국에서 왔다고 하나 중국에서 포교하던 인도 승려로 추정된다.(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마라난타라는 승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교종 승려들이고, 선종은 520년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달마대사가 중국에 옴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달마 역시 인도 사람이다. 신라에서는 하대(下代)의 당나라 유학 승려들이 이 선종의 교리를 들여오며 시작됐다. 이것이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당시 그 이름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오늘날의 조계종도 이때 들어온 것이다.  



    달마가 이렇게 생긴 이유는 인도 사람이기 때문.(중국 양나라 시절 동쪽으로 왔다)

    어떤 사람이 차에서 만난 스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스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뭡니까?" 

    당황한 스님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글쎄요. 혹시 조계종에서 가라고 한 게 아닐까요?"(전유성의 옛날 개그;; 안 웃겼나??)

     

     

    1989년 제작된 배용균 감독의 이 영화는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그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 국제경쟁부분 대상인 황금표범상, 감독상, 촬영상, 청년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안동 봉정사의 암자인 영산암에서 촬영되었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목조건물 극락전(국보 15호)이 있는 고즈넉한 절로,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찰이다. 그런데.....


    1972년에 해체 복원된 극락전은 아무리 봐도 잘못 복원된 엉터리 건물이다. 하루 빨리 재복원됐으면 하는 바램이다.(아휴~ 이게 모니? 이건 누가 봐도 아니잖아. 이상해 죽겠어!)


    차라리 예전 건물이 더 본래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 1972년의 해체 복원시 1363년(고려 공민왕 13) 수리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며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졌다.(그런 만큼 더 잘했어야 했는데, 아무 근거도 없이 중국 걸 베껴놨다)


    덧붙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촬영된 청송의 주산지를 소개한다. 서구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 중 유일한 흥행작이었고 2003년 로카르노 영화제 4개 부분에서 수상했던 이 괜찮았던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과.....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 장소임을 열 올려 홍보하던 청송군은 지금은 그 더러운 이름과 영화 촬영지의 이미지를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라는데, 그런 걸 보면 영화(榮華)참으로 덧없다.  



    신라 땅에 온 이 인도 승려가 처음 포교한 사람은 일선군(현 구미시 도개면)에 사는 모례(毛禮)라는 이름의 부자였다. 이후 모례는 자기 집에 굴을 파고 묵호자를 숨겨 주며 포교를 도왔는데, 바로 이 집이 오늘날 '절'이라는 낱말의 기원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모례는 우리나라 말로 털례인 바, 털례네 집의 '털'이 곧 절이 됐다는 것이다.(어느 책에선가 본 얘기인데, 우선 재미있고 그런대로 일리도 있어 가끔 써먹는다. 절이란 낱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설이 없어서..... 절에 가서 절을 하므로 절이 됐다는 말보다는 낫다. 이것도 낱말의 기원설 중 하나이다 ㅎㅎ)




    털례네 집에 있었다는 우물 모례정(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다곡길 394) 


     우물을 근거로써 이곳이 신라 불교 초전지로 인식돼 아도화상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삼국유사의 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면 인근 도리사(아도화상이 건립했다는) 내의 이 탑은 이제껏 알려진 고려시대의 탑이 아닌 최초의 신라 탑으로 상향돼야 옳다. 즉 초기 신라 모전탑의 원형으로서, 아마도 아도화상의 사리탑으로 건립되었을 것이다.(자료출처: 법보신문)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차돈에 순교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겠는데, '삼국유사'에 전하는 그의 순교에 관한 전말은 다음과 같다.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했으나 토착신앙을 믿는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신하 이차돈은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려고 결심한다. 그는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이란 숲속에 절을 지었는데, 공사가 시작되고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이차돈은 처형당했다.(527년) 그의 목을 베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고 귀족들은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을 맹세했다.('다음백과' 참조) 


    여기서 기이한 일이란 목이 잘려진 이차돈의 몸에서 젖과 같은 흰 피가 높이 뿜어져 나온 일, 그리고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꽃 비가 내리고 땅이 진동한 일 등인데, 더욱 놀라운 건 잘려진 목이 하늘을 날아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에 떨어진 일이었다. 이에 법흥왕은 이차돈이 죽은 그곳에 흥륜사(興輪寺)라는 국찰(國刹)을 건립하였던 바, 그 17년 후인 544년(진흥왕 5)에 이르러 완성된다.


    이상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는 앞 장에서 말한 생 드니의 순교와 그 버전만 달리 할 뿐 거의 똑같은 이야기다. 우연찮게도 그들이 죽은 시기 또한 엇비슷하다. 현실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생 드니의 순교지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은 지금도 어엿하나 흥륜사는 그 터만 전해져 온다는 것 뿐이다.(현재 그 터에 천경림 흥륜사가 작게 복원되었지만, 복원이랄 수도 없는 정도이다)



    천경림 흥륜사 

    이차돈 순교비를 모방한 육각 석당이 세워졌다. 절은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는 시기 폐사됐고

    그 터가 1910년 우연히 발견됐다.(경주시 사정동 285-6)


    출토된 기와편의 글씨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칭했는데, 와편에서 왕흥(王興)까지 읽을 수 있다.



    출토된 '천년의 미소'

    신라인의 얼굴이 새겨진 유명한 수막새 기와가 바로 이곳에서 나왔다. 신라의 유일한 인면(面) 기와로 1972년 한 일본인이 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지금은 1점밖에 없는 유일한 기와지만 뒷면에는 기와에 꽂힌 부문이 역력해 당대에는 많은 수가 제작되어 사용되어진 기와임을 알 수 있다.

     


    륜사의 대형 석조(392x177x90cm)

    통상 2m 정도인 다른 석조의 두 배에 이르는 규모로 흥륜사의 사세(勢)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에 외로이 남은 이 석조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절은 숭유억불책이 행해진 조선 초에 폐사된 듯하다. 




    여기서 굳이 그 연관성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비슷한 동서양의 사례는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의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귀는 당나귀처럼 귀가 길고 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왕은 창피해 그 사실을 숨겼다. 그래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왕의 이발사 뿐인데, 그 이발사가 너무 답답해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경주 남쪽의 대나무밭에 가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이후 바람만 불면 숲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던 바, 화가 난 경문왕은 숲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신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치부가 더욱 확실히 밝혀진 것이었다. 이에 경문왕은 몸져 누웠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세계 명작동화에도 나온다. 그 외도 콩쥐팥쥐 설화와 신데렐라 동화는 거의 판박이 수준의 스토리이다.(아마도 찾아보면 더 있을 것이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억압받는 자의 한풀이 정도가 될 것 같은 이 이야기들을 따로 설명하는 용어는 없다. 억지로 갖다붙이자면 동서양의 평행이론 쯤이 될지 모르겠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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