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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은 왜 티무르의 무덤을 열었나?(II)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19. 10. 5. 23:57


    1941년 6월 22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소련군은 정신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잘 계획되고 훈련된 독일군의 공격이 워낙에 막강하기도 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만을 믿고 방비를 게을리 한 탓이기도 했다. 아울러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1차세계대전 때의 경험 많은 노장들을 모두 숙청한 탓에서 오는 지휘관의 부재도 큰 몫을 했다. 146개 사단 300만 명의 대군으로 북부 중부 남부의 3로(路)로 쳐들어오는 독일군에 소련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2,000대의 전투기와 3,000대의 전차를 앞세운 저들의 화력에 맞설 수 있는 무기도 부족했다.


    이와 같은 독일의 대대적인 공격은 소련의 멸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와 카스피해 유전을 손에 넣어 전쟁에의 보급을 원활히하고 그것으로 서부전선을 밀어붙여 유럽 전토를 아우르는 천년제국을 세우는 것, 이것이 히틀러의 최종목표였다. 독·소전쟁이 개시된 후 독일은 히틀러의 목표를 향해 쉽게 전진해갔으니 불과 4개월 만에 우크라이나 키예프가 함락되고 그곳에서 70만 소련군이 전멸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저 위안이라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아직 무사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나마 이것도 키예프의 소련군을 잡기 위해 북부 레닌그라드와 중부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독일군이 일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일 뿐, 소련군이 선전한 결과는 아니었다.


    독일군들이 키예프에 집중했던 것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하루빨리 손에 넣겠다는 히틀러의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다행히도 일득일실이었다. 키예프는 함락되었지만 덕분에 그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는 방어선이 구축될 수 있었으니 그해 12월 5일,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은 모스크바에 침공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소련으로서는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맛본 승리의 기쁨이었다.



    전선에서의 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



    전쟁이 나자 군인들은 군인대로, 학자들은 학자대로 바빠졌다. 구르에미르에서 티무르의 유골을 발굴했던 게라시모프는 그것을 모스크바로 이송시킨 후 곧바로 티무르의 얼굴을 복원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티무르의 유골이 제 손에 있지만 전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면 그대로 스탈린에게 가게 될 것이므로 그동안 빨리 얼굴을 복원시키자는 게 게라시모프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래와 같은 티무르의 흉상이 완성되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스탈린은 유골을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혹한이 닥치기 전 전쟁을 끝내려는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던 바, 스탈린이 유골 따위에 매달린 틈이 있을 리 없었다.



    독·소전쟁 지도(1941~2)


      발굴된 유골을 근거로 복원된 티무르의 흉상



    히틀러의 의지와는 달리 전쟁은 다음 해 8월까지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련군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소련군의 전선은 점점 후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2년 8월, 양군의 운명을 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아졌다. 소련으로서는 이곳까지 빼앗기면 정말로 폭망하는 것이었고, 반면 독일로서는 꼭 빼앗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여기를 점령해야만 코카서스 유전지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투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장장 6개월간 이어졌으며 사망자만 200백만 명이 발생했다.(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회자된다)


    전쟁과 함께 종군 사진사로 전장에 나가게 됐던 말릭 카유모프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역시 그 치열한 전투를 영상에 담기 위해서였다.(우즈베키스탄 그루에미르에서 티무르의 발굴 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그 사진사를 말함인데, 그가 찍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사진은 이후 청사에 남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 공군의 도심에 대한 무차별 공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는 무려 1천 톤의 폭탄이 쏟아졌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사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대표하는 사진 중의 한 장이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과는 별개로 군은 스탈린그라드의 외곽을 포위하는 천왕성 작전(Операция Уран 오페라찌야 우란)을 전개하여 겨울에 대비하지 못한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말릭 카유모프가 사령부에서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만난 날은 소련군이 패퇴를 거듭하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대로 가면 스탈린그라드마저 빼앗기게 될 정체절명의 위기임에도 주코프는 카유모프에게 한가로이 티무르 유해 발굴에 대해 물었다. 주코프는 스탈린을 모시는 부관장교였던 바, 그 발굴 명령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당시의 촬영 담당 사진사였던 카유모프를 보니 문득 그 일의 추이가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카유모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전했다. 물론 그중에는 무슬림 노인이 말한 전쟁에 관한 예언도 포함됐다.


    줄곧 흥미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주코프가 무슬림 노인의 대목에서 미간이 접히는가 싶더니 이후로 내내 그 표정이 유지됐다.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주코프가 갑자기 크렘린 궁으로 전화를 걸었다.


    게라시모프 발굴팀에게 유골의 원상복귀 명령이 내려진 것은 12월 20일이었다.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던 바, 티무르의 유골은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공산주의로 바뀐 뒤 금기시되던 이슬람 의식이 동반됐다. 아울러 이때 스탈린은 100만 루블을 하사해 티무르의 무덤 구르에미르 영묘를 완벽하게 복원하도록 했으며, 앞으로는 그 누구도 티무르의 관을 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0만 루블은 탱크 16대 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우즈베키스탄 지방 정부에서는 그 돈으로 명령 그대로를 이행해 무덤을 정비했으며, 유골이 안치된 지하실을 밀폐시켜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안치된 티무르의 석관



    정비된 구르에미르 영묘(입구와 내부/내부에 티무르의 모조 관을 두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티무르의 유골이 본래의 위치로 다시 돌아간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제껏 밀리기만 했던 군대가 갑자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군은 그 길고 잔혹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를 이끌 수 있었고, 이때부터 전세가 역전이 되기 시작하여 결국은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될 수 있었다.(이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2차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 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티무르의 저주가 해제된 것일까?


    굳이 분석을 하자면 가장 큰 요인으로는 독일 본토와 스탈린그라드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이 너무 길어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위 지도 참조) 그리하여 식량, 난방 연료, 의약품 부족 등에 시달린 독일 군사들은 전투 후반으로 갈수록 힘을 쓰지 못했는데, 반면 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훈련을 받지 못한 여자들까지도 전선에 동원시키는 총강수를 두고, 시가전에 유리한 저격수를 배치하는 작전으로 독일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반 시도렌코와 바실리 자이체프는 특히 유명한 저격수로,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의 주인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게오르기 주코프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지금까지 호사가들이 말하는 명장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전쟁 중 너무 많은 희생을 빚어낸 작전을 구사한 탓이었다.(그는 피난 행렬이 작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독일군의 쏟아지는 공습 속에서도 시민들의 피난을 막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그만큼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야 된다는 의지가 강했던 바, 그가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티무르의 유골을 되돌리게 만든 것도 그와 같은 절박함의 표현일 것이었다.



     게오르기 주코프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실제 주인공  바실리 자이체프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포스터


     

     '에너미 엣 더 게이트' gif.(진짜 재미있게 본 영화!)

     


    그런데 스탈린은 대관절 왜 티무르의 유골을 원했을까?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많지만 스탈린 그 자신이 다리를 저는 장애자였음과 관련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는 개명(改名)한 이름 조셉 스탈린(스탈은 영어의 스틸이니 곧 강철이되겠고, 스탈린은 철인·鐵人 쯤이 되겠다)처럼 강해 보이고 싶었으나 하지장애라는 핸디캡이 있었다.(혁명운동 기간 중 당한 고문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같은 하지장애의 정복자 아미르 티무르의 유골을 곁에 두고 그로부터 스스로 힘과 격려를 얻어 그와 같은 세계적인 정복자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공교롭게도 티무르라는 이름의 뜻 역시 철(鐵)을 의미했다. -end-



    타슈겐트에 있는 티무르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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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