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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왜 티무르의 무덤을 열었나? (I)전설 따라 삼백만리 2019. 10. 4. 23:58
아무르 티무르, 그는 어쩌면 칭기즈칸 다음 자리에 놓일 수도 있는 유명한 정복자로서 자신의 당대에 중앙아시아와 인도, 러시아와 옛 페르시아 땅을 휩쓸고 시리아에서 서인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한 사람이다. 하지만 확실히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아닌데, 내게 티무르는 다음과 같은 기억으로 여지껏 남아 있다. 역사의 가정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만, 학교 다닐 때 배운 세계사의 사건 중 가정을 하고픈 것 두 가지 중 그 이름 티무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의 첫 번째는 몽골 제국의 오고타이가 죽지 않았으면, 즉 동유럽을 점령한 몽골의 바투 원정대가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회군하지 않고 그대로 서유럽까지 진격했으면 세계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티무르가 병사하지 않고 그대로 명나라에 진격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둘 중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더욱 궁금했으니 다름아닌 우리나라 조선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불패의 정복자 아무르 티무르의 생몰연대는 1336~1405년으로 우리나라의 고려말, 조선초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어떤 불패의 장수가 오버랩된다. 그의 이름은 이성계, 생몰연대는 1335~1408년이다. 보다시피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에 죽었다. 하지만 그 삶의 궤적은 확연히 달랐으니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땅 전체를 차지하고 더 큰 세계를 도모하기 위해 명나라 원정을 떠났다가 도중에 병사하고, 이성계는 명나라 원정을 떠났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오히려 자기 나라를 점령한다. 그리고 왕이 되어 호의호식하다 간다.(물론 자식들 때문에 속은 꽤 썩었지만 말이다)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사브스에 세워진 티무르 동상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성계의 동상은 없다)
그런데 그 무렵 아시아에서는 또 한 명의 불패의 장수가 존재했다. 다름아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자 술탄 보야지드(Bojazet)로, 그는 1396년 10만의 유럽 십자군을 박살내고 그에 대한 응징으로써 역으로 유럽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바, 유럽 대륙 전체를 공포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염려했던 보야지드의 침공은 없었다. 그 무렵,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어떤 자가 나타나 중앙아시아와 인도, 킵차크 칸국과 옛 페르시아 땅을 휩쓸고 빛의 속도로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원의 제왕 아미르 티무르였다. 두 불패의 제왕이 맞붙는 것은 이제 필연이었다.
술탄 일디림 보야지드(Yildiim Bojazet)
당장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뉴엘 3세는 급히 사신을 보내 티무르의 환심을 사려 했다. 당신의 원정군에 군사를 파견해 후원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연합전선을 펴자는 것이었지만 황제의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당신들 도움 따위는 없어도 된다". 이것이 티무르의 대답이었다. 티무르는 그렇게 자신의 군대만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의 심장 부르사를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1396년 7월 폭염이 작열하는 앙카라 고원에서 불패의 두 군대가 맞붙었다. 각 25만의 혼성 민족들이 벌인 며칠 간의 전투 기간 동안 유럽인들을 교회에 모여 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필시 티무르의 군대가 승리하게 해달라는 것일 터였다.
그 간절한 기원이 통했음일까, 티무르의 맹공에 중군(中軍)이 뚫리며 오스만 제국의 황제 보야지드가 사로잡혔고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이제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까지 점령한 것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지만 그같은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더 큰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만일 티무르가 유럽을 쳐들어온다면....?' 그리하여 아틸라(☞ '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나 바투 원정대가 연출한 지옥을 재현한다면....? 유럽인들은 다시 교회에 모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제발 티무르가 다른 데로 가게 해주세요."
아, 전지전능한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유럽인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기적은 이번에도 일어났다.(그들의 신은 오직 쥐만을 무서워하니 1347년부터 4년간 유럽 사회를 휩쓴 흑사병 외에는 모두 물리쳐주었다) 티무르의 군대는 유럽 쪽은 아예 바라보지도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던 것이었다. 훗날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이상의 기적을 '타메르라노'(Tamernlano)라는 오페라에 담아 신을 칭송했다.(이 외에도 수많은 예술작품이 존재한다) 타메르라노는 템벨레인(Tamburlaine)과 함께 유럽인들이 티무르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템벨레인 다음에는 대개 '더 그레이트'(The Great)가 붙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티무르 대왕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타메르라노의 여러 CD 자켓(타메르라노는 네 가지 음원이 있다)
맨 아래 것에는 이슬람 화가가 그린 앙카라 전투도를 넣었다.(티무르 군의 이미지가 친숙하다)
현대극 버전의 타메르라노 공연 장면
영국 극작가 니콜라스 로우가 1702년 희곡 '템벌레인'을 썼는데, 헨델이 이를 오페라로 재현시켰고 초연은 12번이나 앙코르 공연됐다.
앙카라 전투 전황도
티무르 군대의 공격에 오스만의 중군이 뚫리는 상황이 설명돼 있다.
앙카라 전투 그림
작자 미상의 이 그림에는 붙잡힌 보야지드 1세와 참수당하는 오스만 군이 그려졌다.
티무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부근의 케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서는 티무르를 몽골의 칭기즈칸처럼 영웅시하지만 사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인이라기보다는 몽골인으로 보아야 옳을 듯 싶다. 당시 이 지역이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카타이가 다스리는 '차카타이 칸국'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타라가이는 쿠릴타이(몽골 귀족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무장이었던 바, 그를 정통 몽골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타라가이는 이 지역 최고 통치자 카자간(Qazaghan) 다음의 실력자였다고 하는데, 티무르는 그 아버지 밑에서 세력을 키워 이후 차카타이 칸국을 무너뜨리고 중앙아시아를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연히 칭기즈칸을 닮고 싶었을 터, 부하르 왕국을 점령했을 때 얻은 왕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가 바로 건축가와의 단 한 번의 키스로 유명한 비비하눔으로, 티무르가 유부녀를 자기 아내로 삼은 이유인즉 비비하눔이 바로 칭기즈칸의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지간에 그는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했는데, 그렇다면 그의 지향점은 당연히 칭기즈칸과 그 아들 오고타이가 정벌한 중국이 될 터였다. 그것은 또 몽골의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다.
왕비 비비하눔과 건축가의 전설이 깃든 비비하눔 모스크
비비하눔은 이 건물을 빨리 짓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흠모하는 건축가에게 단 한 번의 키스를 허락하고, 그로써 건물은 완공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티무르에 의해 비비하눔은 목숨을 잃는다. 건축가는 탑 꼭대기에서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나 어쨌다나....
1400년 대의 티무르 제국 영역(연녹색 지역은 그의 침공을 받았던 곳)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여 뒤를 든든히 한 티무르는 1405년 드디어 명나라 원정을 나서 20만 대군을 몰아 실크로드를 향해 나아갔다. 다만 그 나이가 69세라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르타르 지방에서 심한 감기로 자리에 든 후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고 그의 시대에 일시 개통됐던 실크로드는 오스만 제국이 제국이 부활하며 다시 막혀버렸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바닷길을 개척해야 되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며, 부활한 오스만 제국은 다시 유럽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티무르 사후의 세계는 그렇듯 모든 것이 원상태로 되돌려졌으며, 칭기즈칸의 경우와 달리 그 후손들에 의한 중국과의 빅매치도 성사되지 않았다. 티무르의 대제국은 티무르의 손자 울르그벡이 암살당하며 혼란에 빠져들었고 이후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중에서는 이렇다 할 나라가 없었고, 그저 특기할 만한 것은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린 티무르의 5대 손 바부르가 인도를 침입해 무굴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 뿐이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평안했다.
티무르가 묻힌 구르에미르 영묘 유적
티무르는 고향 샤흐리사브스에 자신을 위한 영묘를 조성해놨으나 심한 눈이 내려 운구되지 못하고 이곳 구르에미르 영묘에 묻혔다. 이곳에는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 술탄 마흐메드도 묻혀 있다.(원래가 페르시아 원정에서 사망한 손자 술탄 마흐메드를 위해 만든 곳이므로)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는 티무르가 제국의 수도로 삼은 곳으로, 고구려 사신 모습 벽화가 발견되기도 했다.(티무르와는 전혀 상관 없지만)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고구려 사신 벽화 앞의 문재인 대통령 내외
벽화 복원도(맨 오른쪽 두 명이 고구려 사신)
사마르칸트 울루그벡 천문대
티무르의 손자 미르조 울루그벡이 세운 천문대로 티무르 제국의 과학문명을 증명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근대 천문대 중의 하나이다.
천문대의 지하 시설
심오한 과학적 장치가 내재되어 있을 성싶다. 울루그벡 천문대에서는 1년을 365일 6시간 10분 9초로 계산했는데, 현대 과학의 365일 5시간 48분 46초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로부터 520년이 지난 1931년,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스탈린이란 독재자가 고이 잠들었던 티무르의 영면을 깨웠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거나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소련 공화국의 스탈린 서기장이 그쪽 지방에 관한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을 찾아 그 유골을 모스크바로 가져와라."
스탈린의 공포 정치 속에 이 명령은 아무런 이의 없이 신속히 진행되었다. 명령을 받은 고고학자는 소비에트 고고학계의 거두인 게라시모프를 비롯한 3인의 학자였다. 그들은 당연히 그 이유가 궁금했겠지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바,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만일 티무르의 무덤을 찾을 수 있다면 그의 유골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싶었으니, 티무르의 유럽식 이름 템벨레인이 그 단서였다. 그것은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으로, 그가 젊은 시절 아프카니스탄 남부의 세이스탄에서 싸울 때 오른쪽 팔꿈치와 다리에 화살을 맞았고, 이후 평생 다리를 절었다는 구체적인 전설도 전해지고 있는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당시에는 티무르가 어디 묻혀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바, 자신의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티무르의 유언을 바탕으로 그의 고향 샤흐리사브스로부터, 눈이 내려 고향으로 운구될 수 없었다는 전설에 그가 죽은 오르타르와 가까운 지역까지를 모두 훑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16일 2차세계대전 기간 중 마침내 구르에미르 영묘 지하에서 티무르의 것으로 짐작되는 검은색 옥(玉)관을 찾아냈다.
티무르의 흑옥(黑玉) 관
오른쪽 청옥(靑玉) 관은 아들 샤흐 루흐, 왼쪽은 손자 미르조 울루그벡의 것이다. 지하에 있는 것은 그대로 안치됐고 지상에 관광객들을 위한 모조품이 전시됐다.(사진 속의 관은 물론 모조품임)
그런데 그것을 열기까지 작은 사건이 겹쳐 발생했다. 탐사팀이 기중기로 관뚜껑을 걸어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기중기가 멈춰섰다. 고장이었다. 그들은 별 수 없이 손으로 뚜껑을 밀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발전기가 멈춰서며 전기가 나가버렸다. 모두가 엄습한 공포에 몸을 움츠리던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관을 열면 아니 되오! 티무르의 관을 열면 큰 전쟁이 벌어진다 하오! 여기 이 책에 그렇게 적혀 있소!"
어두움이 조금 눈에 익은 탐사팀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말로 손에 책을 든 무슬림 노인이 서 있었다. 탐사팀이 그 책을 보고자 다가갔지만 문 쪽에 서 있던 노인은 빠르게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잠시 그 뒤를 쫓던 일행은 시야에서 사라진 노인을 포기하고 돌아왔지만 그날 작업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명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기계를 고치는 일부터 선행돼야 했다.
작업은 6월 20일 오후에 재개되었고 이윽고 고대하던 티무르의 관이 열렸다. 과연 그 안에는 한쪽 다리 뼈가 정상적이지 못한 유골이 누워 있을까? 옥관 안에는 나무로 된 부관(副棺)이 들어 있었고 다시 그 관 뚜껑이 들려지는 순간, 탐사팀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일단 완전한 형태의 유골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학자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골수염의 흔적이 완연한 대퇴골을 확인한 것이었다.
발굴된 티무르의 유골
촬영을 맡은 말릭 카유모프가 찍은 사진들임.
그들은 즉시 그 사실을 당국에 알리고 유골을 하드 케이스에 담아 모스크바로 보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마지막 수습을 끝내고 밀려드는 피로감에 맥이 풀려 있을 즈음, 누군가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스탈린 동지는 이 뼈가 왜 필요하지?"
사실 모두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제 생각을 말할 수도 없었다. 불연듯 무슬림 노인의 불길한 예언도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두를 못들은 척하며 그저 저녁 시간을 푸짐한 만찬 속에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6월 22일 아침 일찍 숙소를 떠나려던 순간 누군가 안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독일이, 독일이 쳐들어왔어요!"
급히 라디오를 켜보니 과연 그랬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히틀러와 스탈린 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독일군의 전차가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을 넘어 물밀듯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발굴팀은 그 자리에서 모두 얼어붙었다. 앞서 노인이 말했던 불길한 예언이 정말로 현실이 된 것이었다.
* '스탈린은 왜 티무르의 무덤을 열었나?(II)'로 이어짐.
독·소전 개시 직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투입된 독일 탱크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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