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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레스트, 누가 가장 먼저 올랐는가?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19. 10. 30. 06:56


    1856년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8,586m의 칸첸중가였다. 하지만 1856년 측량을 위해 인도에 파견된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가 초모룽마라는 산을 측량하여 8,848m임을 밝혀냈다. 이후 '여신의 집' 초모룽마는 세계 최고봉의 영예를 얻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발견자 에레베스트에게 그 이름을 양보해야 했다. 아니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을지니 지금은 누구도 초모룽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힘의 논리에 좌우된 결과였다.


    그런데 이 산에서 1953년 또 한번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텐징 노르가이, 그는 최초 정복자의 영예를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양보해야 했다. 아니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을지니 그는 하루품삯 1루피(25원)를 받는 일개 셰르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정상 2차 공격조로, 세계 최초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두 사람의 행로를 전설 따라 따라가보자.  



     에베레스트 산



    에베레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임이 확인되자 영국 정부는 정복을 서둘렀다.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보다도 먼저 이 제 3의 극점에 도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모두 6차례의 정예 원정대를 보냈으나 불행히도 아무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 전인미답의 이 '여신의 집'은 세계 최고봉답게 견고했으니 그 누구의 칩입도 허락치 않을 기세였다. 영국 정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칸첸중가가 아닌 에베레스트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인 터, 다른 나라의 원정대들도 속속 히말라야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1911년 남극점을 두고 싸운 경쟁에서 영국의 스코트 대위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도 노르웨이 개인 탐험가 아문센에게 졌으며 또한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아문센은 스코트보다 늦게 출발한 후발주자였다. 에베레스트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아니, 이미 그와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원정대에서는 속속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반면,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스위스 원정대는 등반 사상 가장 높은 8,595m까지 올랐다. 영국은 '보다 안전하고 빠른 산행'을 강구했다. 그리고 1951년 마침내 그에 대한 답을 티벳고원 셰르파 부족들에게서 찾았다.


    환경적으로 추위와 고산증에 강하고 선전척으로 튼튼한 민족, 그들은 영국원정대의 허드렛일에 꼭 알맞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가난함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신 죽어주기에도 적합한 조건이었다. 영국원정대는 그들 셰르파 족속을 무려 359명이나 고용했다. 셰르파들은 원정대원의 무려 15kg에 이르는 산소통과 물과 식량을 짊어져야 했으며 기타 모든 나쁜 것은 먼저 행해야 했다. 그들은 기실 등산 소모품에 더도 덜도 아닌 존재였으나 매우 유용했던 바, 어쩌면 이번 등반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예감을 가지기 충분했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셰르파들



    그렇지만 셰르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꿈을 꿨다. 비록 작은 품삯이지만 그것은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도 잘하면 이 제 3의 극점에 오를 수 있다는 감격적인 포부를 품을 수 있었다. 이것이 요즘의 로또 당첨만큼이나 허황한 꿈일지라도 한 번쯤 품어볼 수는 있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셰르파들의 꿈은 많이 버려지고 또한 많이 좁혀졌다. 정상이 보이는 마지막 베이스캠프에 이르렀을 때 남은 셰르파는 모두 3명, 이들 중에 정상에 오르는 이가 나올 지도 몰랐다.



    산을 오르는 셰르파들



    텐징 노르가이도 그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상에 오를 일은 없어 보였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정상공격조와 2인1조로 묶인 파트너 배정이 안 좋았다. 그의 상대는 에드먼드 힐러리. 말 수가 드물어 팀원들도 조금 어려워 하는 것 같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베이스캠프까지 올 때 보여준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은 베테랑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상 공격조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으니 그는 영국인이 아닌 뉴질랜드 사람이었다. 영국 정부가 원하는 건 식민지의 사람이 아닌 순수 영국 사람, 즉 본토인이었다.


    힐러리는 여기까지 오른 것만도 행복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텐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만큼 돈을 더 번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톰 보딜런과 찰스 에반스, 두 영국인 공격조의 뒤를 바라보며 행운을 빌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시간 후 그들은 공격조의 등정실패라는 비보를 접해야 했다. 굳이 의미를 두자면 이제까지 등반 사상 가장 높은 8,760m를 찍은 것이랄까. 등반대장인 존 헌트 대령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자신이 맡은 임무는 6월 2일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전까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일이었지만 그의 임무 완수는 멀어진 듯 보였다.


    그때 평소 과묵하던 힐러리가 나섰다. 자신이 텐징과 함께 정상을 공격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존 헌트가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텐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이 등반대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던 사람이니 작년 스위스 원정대와 함께 8,595m를 찍은 주인공이었다. 헌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헌트는 영국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최종 정상공격조가 되는 것이 내심 마뜩찮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결국 헌트는 1953년 5월 29일 아침 6시 30분, 그 두 사람에게 2차 공격조의 임무를 부여했다.



    베이스캠프에서의 힐러리와 텐징



    2차 공격조가 된 힐러리와 텐징



    앞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남쪽 루트를 택한 두 사람은 산소통과 43Kg의 짐을 메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오전 9시 보딜런과 에반스가 실패한 8,760m의 남봉(South Summit)을 통과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88m로, 그야말로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눈 앞에 거대한 암벽 하나가 나타났다. 훗날 등반가들 사이에서는 힐러리 계단(Hillary Step)으로,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텐징의 등으로 불리게 된 높이 12m의 가파른 바위였다. 힐러리가 먼저 그 바위 틈에 얼음도끼를 박았고 텐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그렇게 암벽을 넘었다. 



    힐러리와 텐징이 오른 남쪽 루트



    그리고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그 두 사람은 정상에 섰다. 눈의 여신이 허락한 최초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정상에는 누가 먼저 올랐을까? 힐러리가 먼저 암벽을 넘었으니 그가 먼저 정상에 도착했을까, 아니면 경험 많은 텐징 쪽이었을까? 그들이 귀환했을 때 기자들도 그것을 집요하게 물었다. 힐러리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텐징과 나는 한 팀으로 정상에 올랐다. 도전과 위험, 그리고 성공, 이 모두는 우리의 공유물이었다. 이와 같은 협동과 노력이 중요할 뿐 나머지는 무의미하다." 등반대장 존 헌트도 '두 사람이 함께 올랐다'며 힐러리와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텐징은 힐러리에게 양보했다. "힐러리가 먼저 올랐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에베레스트에 두 번째로 올랐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 것이다." 이 말은 뭔가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던 바, 기자들은 계속 텐징이 먼저 정상을 밟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은 존 헌트와 힐러리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기사(Knightwood)의 작위를 받은 후 열린 축하연에 텐징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표면화됐다. 자신이 먼저 등정했음에 대한 무언의 항의라는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텐징 노르가이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텐징의 것만 있는 점도 의심을 부추켰다. 이것은 텐징이 사진기 사용법을 전혀 몰랐다는 것으로써 일단락됐지만 이와 같은 의심은 매우 오래 지속됐다. 그러나 1986년 텐징이 인도에서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했을 때 모두 것이 정리될 수 있었다. 텐징의 말이 아니라 힐러리로부터의 발언이었다.


    "나는 그때 '힐러리 스텝'을 개척하는데 힘이 모두 소진된 상태라 '힐러리 스텝'을 넘은 후부터는 텐징이 먼저 걷고 나는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정상이 코 앞에 이른 순간 텐징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친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몇 걸음을 남긴 그가 내게 정상을 양보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 둘이 함께 올랐다고 할밖에."


    힐러리는 텐징의 양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는 말이었는데, 이것은 살아생전 텐징이 자신이 운영감독관을 지내던 다르질링의 히말라야 등산학교에서 한 연설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동료들보다 앞서가려는 경쟁만 해서는 결코 에베레스트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직 이타적 팀워크로써 천천히 주의 깊게 움직여야 한다. 물론 나도 욕심 있는 사람인지라 나 혼자만의 힘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다. 아울러 그것은 누구나 꿈 꾸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로 되어 있다면 불평하기보다는 남자로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도와야 한다. 그것은 산의 법칙이기도 하다."




    함께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


    자신들이 오른 정상을 바라보는 힐러리와 텐징 



    한마디로 세상 사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고나 할까..... 까닭에 그는 하산 후 네팔과 인도, 티벳에 걸쳐 모두 찬사를 받았으며 부처나 시바의 화신이라 불리며 경배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뉴질랜드와 영국 양국의 국민, 그리고 세상 모든 산악인의 존경의 대상이 된 힐러리 역시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히말라야 트러스트를 조직, 네팔에 셰르파족을 위한 병원과 셰르파 양성학교를 만들어 텐징의 후예들을 후원했다. 이제 셰르파는 티벳 한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또한 포터의 개념이 아니라 산악 안내인이라는 엄연한 전문직 가이드의 명칭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텐징은 영연방의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영국 여왕의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대신 힐러리는 그에게 훈장이 주어지도록 힘썼으니 1953년 영국의 조지 메달(George Medal)을 필두로 네팔과 인도에서도 각각 훈장을 받았다. 멈출 줄 아는 삶, 그리고 무엇엔가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용기, 이런 것들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겸손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로 되어 있다면 불평하기보다는 남자로서 그 사실을 용인해야 한다. 그것은 산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 게임의 법칙이기도 하므로.


    힐러리는 이후 남극점과 북극점에 연이어 도달했으며, 네팔의 셰르파들을 매년 찾아 돌보았다. 그리고 2008년 1월 그가 죽었을 때, 고향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지고 남은 유골의 일부가 에베레스트에 묻혔다. 자신이 죽으면 에베레스트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따른 것인데, 그의 유골을 가지고 산에 오른 사람은 셰르파 양성학교 출신의 셰르파 티벳인 아파였다. 그는 정상에서 힐러리의 천도제를 지내고 내려 온 후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힐러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병원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며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헤맸을 것이다."





    등정하는 힐러리와 텐징



    힐러리의 얼굴이 들어간 우표와 화폐

    그는 후진국의 독재자들을 제외하고는 살아생전 화폐에 도안된 유일한 사람일지 모른다.


    1952년 스위스 원정대가 개척한 로체 사면(斜面)과 사우스 콜 루트.(이때 텐징 노르가이도 있었다)


    1953년 영국 원정대도 이 루트를 선택했고 마침내 힐러리와 텐징이 정상을 정복했다. 이 루트는 에베레스트 등반의 클래식이 됐다.


    정상에 함께 오른 이 두 사람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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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