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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명의열전 - 화타와 뇌수술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0. 3. 14. 23:57
뇌수술은 현대 의학에 있어서도 고난도의 수술에 속한다. 따라서 누구든 뇌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절망한다. 마취 후 살아 깨어날 지 불귀(不歸)의 객이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도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화타(華陀)는 여전히 자신 있어 하는데 결국 그것이 화(禍)가 되고 말았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요코야마 삼국지를 몇 장 넘겨보자.
화타는 탕약으로 전신마취를 시킨 후 두개골을 갈라 종양을 제거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조조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터, 관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자기를 죽일 요량이라고 대노(大怒)하며 화타를 하옥시킨다. 그때 의원 지망생이었던 오압옥(吳押獄, 오씨 성을 가진 옥졸)이라는 자가 옥중의 화타를 정성껏 보살핀다.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감지한 화타는 그를 위해 자신의 역작인 청낭서(靑囊書)를 넘겨준다. 그로 인해 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구제되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며칠 후, 화타의 예상대로 옥에 조조의 부하들이 들이닥쳐 화타를 처지한다.
오압옥은 화타를 정성스레 장사지낸다. 그리고 화타의 청낭서를 손에 쥔 후 명의의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단 하루밤의 것으로 끝나게 된다. 청낭서를 오압옥의 아내가 불태워버린 것인데, 명의가 되어 화타처럼 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 아내의 변(辯)이었다. 결국 천하의 명의 화타가 지은 책은 한줌의 재로 변하며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화타의 죽음과 후일담은 이러한데, 이제부터는 화타의 죽음을 불러온 그 뇌수술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했던 일인가를 살펴보자. 일단 마취제로 쓰였다는 마폐탕(麻肺湯)은 그럴 듯하다. 화타는 마(麻, 삼나무) 잎에 포함된 메사돈 같은 마취성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니, 잘 알려진대로 장과 위가 곪은 환자도 마폐탕을 마시게 해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 배를 째고 환부를 약으로 씻어서 원래대로 해놓고 실로 상처를 봉합했다. 수혈과 소독의 과정이 생략됐을 뿐 오늘 날의 수술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가 조조에게 권한 뇌수술은 이른바 개두술(開頭術, Craniotomy)로서 대표적인 뇌수술에 해당된다. 문자 그대로 전신마취 후 머리뼈를 크게 열고 뇌막을 절개한 후 병인(病因)을 제거하는 것인데, 과연 당시 그것이 가능했겠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의학과 장비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위험성이 상존하며, 수술 후 사망이나 합병증이 염려되는 큰 수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도 볼 수 없으니 인류의 뇌수술의 역사는 무려 청동기 시대까지 올라간다.
아래의 두개골은 이스라엘 예리코(Jerico)에서 발견된 것으로(☞ '캐슬린 케년이 밝혀낸 여리고성의 실체') 기원전 2200~2000년의 두개골로 판명되었다. 위의 구멍은 타격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공기(穿孔器) 같은 도구를 이용한 흔적으로 판명되었으며, 뼈에 치유의 흔적이 있는 점으로 보아 두개골의 주인은 무사히 수술을 받았던 듯하다.(<고대세계의 위대한 발명> 브라이언 M. 페이건 외)
이와 같은 뇌수술을 현대 의학에서는 천공배액술(Burrhole Drainage)라 부르는데, 뇌수술 중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에 속하며 머리뼈와 뇌표면 사이의 공간에 물이 고이거나(경막하 수종), 피가 고인 후 시간이 지나 고인 피가 물처럼 되었을 때(만성경막하 혈종)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수술이다. 수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수술시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에 환자와 협조가 잘 이루어지면 국소마취로도 수술이 가능하다.(<뇌수술의 종류> 백석)
그렇듯 손쉬운(?) 수술이기 때문인지 천공술이 시행된 두개골은 신석기시대 초기(약 7,000년 전)까지 올라간다. 만성 두통을 비롯해 질병, 부상, 편두통으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릴 경우, 상당한 고통과 위험이 뒤따르는 외과 수술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럽에서 시행된 최초의 천공술은 머리가죽을 절개한 뒤 부싯돌 칼이나 흑요석 칼로 두개골을 자르거나 깎아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도구들은 매우 예리할 뿐더러 세균에 감염될 염려도 없어 수술 용구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오늘날에도 흑요석 박편을 수술용 메스로 선호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시술은 원시적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저명한 외과의사 J. 샹피온니에르(J. Lucas-Ghampionniѐre, 1843~1913)는 부싯돌로 만든 드릴로 35분만에 개공술 치료를 마쳤다. 19세기에 남태평양을 여행하던 한 학자는 30분 만에 그 시술을 해치우는 주술사도 본 적이 있었다. 수술을 받은 환자는 무의식 상태에서 며칠을 보낸 후 깨어나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 개공술 수술을 받은 두개골은 유럽 전역(덴마크, 스위덴, 폴란드, 프랑스, 스페인, 영국)에서 수백 개가 발견되었는데, 스웨덴 의사 폴케 헨센(Folke Henschen) 교수는 1960년 대에 구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해골 왼편 부위에 지름 16~18mm의 타원형 구멍이 뚫린 중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수술법의 기원은 1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난이도의 수술인 두개골 개공술이 너무 남발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심에 대해 18세기 스웨덴의 가장 위대한 외과의사로 불리는 세라핌 병원의 주임의사였던 아크렐은 개공술의 목적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761년) "두개골 개공술은 혈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해소하거나 뇌막염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혹은 이 두 목적을 함께 이루려 매우 대중적으로 시행됐다."
이쯤되면 천하의 명의라 불리던 화타의 뇌수술도 그저 연의(演義, 소설 삼국지)의 창작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뇌수술을 위해 절개한 두개골은 붕대로 잘 감아두었을 것인데, 이럴 경우 새로운 뼈의 조직이 자라며 상처가 아물며 접합된다고 한다. 화타의 생몰연대는 145~208년이며 지금의 안휘성 박주(亳州)에서 태어났다. 빈사의 오나라 장수 주태를 수술로써 살려낸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에도 나오는 유명한 일화인데, 까닭에 외과전문의로서 유명하나 침술을 비롯한 모든 의술이 뛰어난 신의(神醫)의 경지에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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