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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 내동 영국병원과 인천 앞바다의 러일전쟁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4. 12. 01:55

     

    인천광역시 개항로 45번 길에 있는 대한성공회 내동교회가 1890년 영국 성공회 존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당이라는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건물은 원래 중구 송학동 3가에 있었고, 현재의 내동 자리에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병원이 자리했다. 병원의 본래 이름은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이나 이 병원 의사였던 선교사 랜디스(Eli Bar Landis, 한국명  남득시, 1865~1898)가 한국인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낙선시의원(선행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 하는 병원)으로 명명했다는 말도 앞서 했다. 그리고 또 이 병원은 영국인이 세웠다 하여 영국병원이라고도 불렸다.  

     

     

     

    의료봉사에 매진하다 요절한 성공회 선교사 랜디스

    인천광역시 개항로 45번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교회 건물은 1890년 영국 성공회 존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당이다. 본래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

    kibaek.tistory.com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내동교회 내에 남은 당시 진료소 건물
    내동교회 담장 아래의 '영국병원' 표석

     

    송학동의 교회 건물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다. 그래서 당시 참전했던 영국군이 본국에 돌아가 모금운동을 했고, 그렇게 모아진 돈으로 대한성공회에서 예전의 내동 성누가병원 자리에 1956년 6월 23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해 옛 성미가엘성당의 이름을 붙였다.  옛 성미가엘성당은 현 인성여고 다목적관 위의 공터 공영주자창 자리에 위치했는데, 지금도 당시의 축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옛 성미가엘성당
    옛 성미가엘성당이 있던 곳
    옛 성미가엘성당 자리에서 본 홍예문
    홍예문 위에서 바라본 인천항
    홍예문은 구한말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가 불법 확장되며 남북간의 교통 편의를 위해 일본군 공병대가 1905~ 1908년 3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시켰다. 처음에는 혈문(穴門)이라 불렸고, 일본인들은 아나몽(孔門)이라 불렀다.

     

    성공회 조선교구 초대 주교였던 존 코프는 의료선교에 역점을 두고 인천 내동에 성누가병원, 서울에 성마태병원과 성베드로병원, 충북 진천에 애인병원, 여주에 성안나 병원을 설립하였다. 인천의 낙선시의원, 즉 성누가병원은 앞서 언급한 랜디스 박사 사망 이후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04년 영국인 웨이어 박사가 의료활동을 이었으나 1916년 그가 인천을 떠나며 결국 폐쇄되었다.

     

    지금 내동 옛 성누가병원 자리에는 그래서 예배당 건물과 진료소 건물이 남게 되었는데, 만일 이 교회건물이 익숙하게 느껴지신다면 필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보신 분일 게다. 바로 악당 목사 전요한(황정민)이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드라마에서는 수리남 파라마리보의 한인교회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쓰레기 목사가 현실에서도 넘쳐나니 이 쓰레기들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 '나는 신이다'가 드라마보다 훨씬 인기를 모으고 있다. 거기 나오는 목사들은 진짜 인간 말종들로서 공분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런 자들에게 당하는 신도들에게도 크게 동정이 모아지지는 않는다. 그렇듯 허무맹랑한 존재들에게 당한 본인들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천 내동교회

     

    아무튼 덕분에 이곳도 '핫플'이 되어 주말이면 구경 오른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 사람들을 빼고 사진을 찍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아래 사진처럼 사람들을 배제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곳도 있지만, 그 자리에 조금만 서성이면 관광객들이 빠진 틈을 빌려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가 있다. 내동교회에서도 그러했는데, 그러면서 전에는 없었음직한 명판 하나를 발견했다.  옛 진료소 입구에 걸려 있는 아래와 같은 명판이었다.

     

     

    차이나타운 계단과 그 위의 선린문
    내동교회 옛 건물 앞의 명판

     

    명판에는 "1904년 이 자리에서 진료를 받았던 순양함 '바랴그 호'와 포함 '코레이츠 호' 러시아 선원들을 추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2004년 2월 11일"이라는 내용의 글이 러시아어, 한글,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즉 1904년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의 개막전에서 일본군의 선전포고 없는 선제 기습공격에 부상을 입은 러시아 해군들이 바로 이곳으로 후송되었고, 그중의 일부는 사망했던 바, 명판에 새겨진 글은 바로 그때를 회고함이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186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굳히기 위함이었다.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열강들은 이 전쟁에서 일본이 패할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 청일전쟁 때와 달리 일본 내에서도 자국의 열세를 점치는 분위기가 짙었다. 상대가 워낙 대국인 까닭이었다. 이에 일본은 서해상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무력화시켜 승기를 잡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겠다는 작전을 구사하였던 바, 가장 먼저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호와 포함(砲艦) 코레이츠호에 기습 포격을 가했다.

     

    때는 1904년 2월 8일 오후 4시로, 뤼순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이었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이미 러시아 극동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뤼순항에 접근해 있었고, 연합함대 중의 아사마호를 비롯한 5척의 함선이 인천으로 가 팔미도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선을 먼저 공격한 것이었다. 뤼순항 공격에 앞서 배후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물론 러시아 해군 쪽에서도 반격이 있었으니 바랴크호, 코레이츠호에서도 포격이 시작되어 제물포 앞바다에서는 양군간의 일대 교전이 벌어졌다.

     

    1901년에 찍은 바랴크호

     

    말한 대로 바랴크호와 코레이츠호에서도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초반에 워낙에 집중포화를 당한 상태여서 반격에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큰 손상을 입은 두 함선은 소월미도 부근으로 배를 몰았으나 곧 뒤쫓아온 일본 해군에 포위되어 나포될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바랴크호가 배 안의 폭탄을 한 데 모아 터뜨렸고, 곧 코레이츠호도 같은 방법으로 자폭했다. 나포되느니 명예로운 자침을 선택한 것인데, 당시의 러시아 해군 중의 부상자가 제물포 성누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일이 바로 진료소 명판에 쓰여 있는 내용이었다. 

     

     

    파손당한 바랴크호
    자폭해 불타는 코레이츠호 / 코레이츠는 코리아를 의미한다.
    바랴크호의 최후
    인천부두의 바랴크호 추모비
    2013년 방한한 푸틴 대통령은 1박2일의 짧은 일정에도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바랴크호의 군함기(軍艦旗) / 침몰한 바랴그호에서 노획된 깃발이 인천시립빅물관에 보관돼 있다 2010년 러시아에 임대되었다.(257X200cm)
    성누가병원 전경 /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있어 러시아 해군에 대한 진료를 거부할 수도 있었으나 의료진들은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의 첫 해전을 서구에서는 제물포해전(The Battle of Chemulpo), 일본에서는 인천충해전(仁川沖海戰)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 5월 27일 일본 연합함대가 막강 발트함대를 격침시키며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일본은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동양의 작은 섬나라에서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견주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조슈 5걸과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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