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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그밖의 인천 근대건축물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2. 10. 3. 01:53
▼ 인천 중구청사
인천의 개화기 모습을 재현시킨 신포 문화의 거리 중심에 인천 중구청사가 있다.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함께 일본조계지 내 일본영사관 건물로 지어졌던 침탈의 오랜 뿌리와 같은 곳으로, 당시 2층 목조로 지어졌던 초기 일본영사관 건물은 1905년 인천이사청, 1910년 이후로는 인천부청으로 사용되다 1932년 조적조 건물로 바뀌었다. 인천부청사로 사용될 때 경찰서와 감옥이 설치되었다.
1930년대 유행한 모더니즘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장식미를 배제한 실용적인 건물로 지어졌으며, 다만 입구에 둥근 창문으로 최소한의 포인트를 주었다. 광복 후 경기도 인천시 청사로 쓰이다 3층으로 증축되며 인천직할시 청사로 변신했으나 과거 건물 형태에 변형을 주지 않는 같은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오른쪽의 시의회건물(현재 중구의회)은 1963년 동일한 모더니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뒷편에 있는 신관(아래 두번 째 사진)도 이후 같은 형태로서 건축되었다.
▼ 구(舊)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함께 그해 4월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郵便汽船 三菱會社)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가 세워졌다. 장소는 항구로부터 일본조계지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이후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되어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가 되었고, 1886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는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일본우선주식회사는 인천 해운업을 거의 독점했다.
건물은 광복 후에도 계속 해운회사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이 되었는데, 리모델링 과정에서 1888년 건립이 기록된 상량목이 발견됨으로써 현재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 중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건물에는 지금도 옛 모습이 그대로 있어, 화강석으로 처리된 상하 인방, 천장의 석고몰딩, 현관 포치 상부의 페디먼트 장식 등에서 당시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 인천아트플랫폼
인천아트플랫폼(Incheon Art Flatform)은 인천 개항장 거리에 있는 전시공간 복합체이다. 전시공간은 크게 A동 옛 군회조점(郡廻漕店)과 B동 옛 대한통운 창고로 나뉜다. 조점이란 조운업(漕運業)을 하는 가게라는 뜻으로, 군회조점은 쓰시마 출신 코오리킨 자부로(郡金三郞)가 세운 해운회사이다. A동에는 그 회사건물의 일부와 창고가 남아 있다. (대한통운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는데,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의 창작과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여기에 근대 개항기 건물 및 1930~40년대에 건설된 건축물들이 활용되고 있다. 인천 구 도심의 리모델링과 함께 새로운 예술 창작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구(舊) 일선해운(日鮮海運) 빌딩
신포동 옛 인천우체국 길 건너편에 위치한 구 일선해운 빌딩은 1925년 인천에 진출한 닛센해운(日鮮海運)회사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3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4층 근대건축물로는 현존 유일하며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철근 콘크리트조의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지향하면서도 1층 외관은 화강석 판석과 대리석으로 곡선 처리하는 고전주의 양식을 취해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지금은 선광문화재단이 소유주로 2013년 갤러리로 재단장하여 선광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광미술관은 기존의 유명작가들보다 작품 발표기회를 잡기 어려운 학생과 스타트업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선광문화재단은 인천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여러 지역행사를 지원한다고 한다.
▼ 다이부츠 호텔
대불호텔 (大仏ホテル, 다이부츠 호테루)은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 무역상이자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1887년경에 영업을 시작한 곳으로 국내 최고(最古) 호텔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의 기록에도 대불호텔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영업은 1887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천부사(仁川府史, 1933)>에는 메이지 16년(1883년) 4월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 부자(父子)가 일본조계 제12호지,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을 건축했고, 메이지 20년(188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을 새로 지어 호텔영업을 시작했다고 나와 있으며, 상호는 부처상을 하고 있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의 빌어 붙였다는 설명을 달았다.
내외국인이 묶을 만한 마땅한 시설이 없던 당시의 인천이었던 바, 호리 부자는 대불호텔로써 큰돈을 벌었고, 청일전쟁 기간 중에는 일본해군을 지원해 그 반대급부로서 조선연안 해운업을 장악하며 더욱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1900년 7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며 호텔은 사양길에 들었고, 1907년 결국 폐업하여 중국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중국음식점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는데, 2011년 상가 건설 중 기초가 발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좌우의 가옥
조계지(租界地)는 조선 내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할 수 있는 조차지를 말한다. 여기서 '조계'나 '조차'는 빌렸다는 뜻이지만 영구히 빌린 것이니 그 나라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조선정부는 1883년 일본과 맺은 인천구조계조약(仁川口租界條約)을 필두로 청나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조계지에 관한 조약이 맺었고, 이에 조계지는 크게 '청국 조계', '일본 조계', '각국 조계'로 삼분되었는데, '각국 조계'가 약 14만 평으로 가장 넓었다.
하지만 일본과 청나라 조계지 상인들이 인천의 상권 장악을 위해 다투었는데, (바다 쪽에서 볼 때) 제물포 항 오른쪽이 청국조계, 왼쪽이 일본조계로 지금도 그 경계를 나누는 돌계단이 남아 있다.(인천기념물 제5호)였다. 그 계단의 좌우에 청나라식 가옥과 일본식 가옥이 한 채씩 남아 있는 바, 볼 때마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화교협회 안의 회의청
인천화교협회 건물 안에 있는 근대건축물인 회의청(會議廳)이 한성전보총국의 인천분국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이는 2021년 주희풍(인천화교학교 부이사장)이 오랫동안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연구는 문헌에만 존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보국 위치를 찾았다는 점과 함께 베일에 싸였던 근대건축물 연혁을 보다 명확하게 보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선린동 8번지에 위치한 인천화교협회 회의청은 1910년경에 건립된 청나라 조계지 기관의 부속건물로 알려져 있었다. 주희풍은 이 건물이 1885년 완공된 한성전보총국 인천분국이라 단정하며 시기까지 끌어올렸는데, "회의청이란 명칭은 1950년대 화교자치구(인천화교협회 전신) 때 회의하던 용도로 건물을 쓰면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그간의 모호했던 궁금증까지 일소시켜 주었다.
청일전쟁 이후 오랫동안 방치됐던 인천전보국 건물은 1905년 중국 상인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사무를 논의할 화상회관(華商會館·중화회관)으로 전용됐다. 이때까지도 건물 소유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시기 소유권이 중국으로 넘어갔는지는 불명확하다. 현재 회의청 건물은 인천화교협회 소유로 되어 있다.
▼ 기타 수상해 보이는 건축물
▼ 인천세관 역사공원 건물과 안내문
▼ 또 다른 인천 근대건축물을 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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