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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년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4. 10. 02:30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언드우드와 아펜젤러는 원래 1884년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 그해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이 묶였다. 그러다 국내 정세가 조금 안정된 이듬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침, 제물포항에 역사적인 첫발을 디디었다. 호러스 언더우드는 26세, 헨리 아펜젤러는 27세의 청년이었다. 인천광역시 연안부두 8부두 부근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은 그들이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1986년에 세운 모뉴먼트인데, 조형된 인물은 아펜젤러의 부인까지 세 사람이다.

     

    언더우드에 앞서 설명한 바가 있고, 오늘은 이후 인천과 서울에 남은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가보려 한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4월 9일 일요일 오늘은 우연찮게도 2023년 부활절이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는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아펜젤러는 내륙을 향해 손을 흔들고, 언더우드는 가슴에 성서를 품은 모습이다.
    인천 내리(內里)교회 내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비
    인천내리교회 아펜젤러 흉상 / 인천내리교회는 1885년 7월 19일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이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진 곳은 지금은 바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내륙이지만 당시는 바닷가로, 개항(開港)한 지 2년 된 작은 항구의 부두였다. 그 부두가 바다에서 멀어진 것은 이후의 간척사업 때문으로, 인근 ‘기념탑교회’ 내부에는 당시 바닷가에 있던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그대로 노출되어 역사성과 현장감을 살려주고 있다. (사진은 다음 회에 싣기로 하겠다)  그런데 아펜젤러는 부인을 동반했던 까닭에 주한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의 권유로서 며칠 후 부부가 함께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2개월을 보내고 6월 20일에 재입국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사정이 말해주듯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상은 혼란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은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해 준다. 또 그만큼 백성들의 어려움 또한 컸을 터, 아마도 농민을 비롯한 조선 백성들의 고통이 최절정에 이르렀던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이 무렵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 두 사람이 조선 땅을 밟은 것은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었던 당시의 백성들에게 안식처를 주려는 신의 가호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들 두 선교사의 한국 선교는 초기 가톨릭 선교사들이 겪었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어려움은 없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의 칼을 맞고 빈사 상태이던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외과 수술로써 구해낸 선교사 알렌의 덕분인데, 이후 새로운 종교 개신교는 신망을 받았고 차후로 들아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역시 편의를 제공받았다.
     
    또한 당시의 고종은 강대국 미국에 기대려는 마음이 있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왔으니,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만난 8세 연상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마찬가지로 선교 목적으로 와 제중원 부인과병동 책임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과 결혼할 때 고종 부부가 축의금으로 100만 냥을 건넸던 사실을 앞서 언더우드 편에서 말한 바 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수십억 원으로, 당시 민왕후가 대안동의 민가를 헐고 궁궐을 신축할 때 들어간 비용이 100만 냥이었다.(<매천야록>) 

     
     

    초기의 개신교 선교사들 /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트랜튼, 헤론 가족이며 가운데가 알렌으로, 1887년 찍은 사진이다.

     

    물론 그들 선교사들 역시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열(熱)과 성(誠)을 다해 일했던 바, 인천의 첫 교회이자 감리교 최초의 교회이기도 한 인천 내리교회 첨탑에 매달려 있는 그때의 종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시 처음에는 선교사들에게 배타적이었던 마을사람들도 차츰 선교사들의 봉사와 희생정신에 감화 받았으니, 방금 말한 내리교회의 종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며 철 제품을 모두 공출해갈 때 마을 사람들이 숨겨 보관했던 것이라 한다.
     

     

    바로 이 종이다. / 인천 내리교회 제공사진
    종에 대해 설명한 각석이다. / 아래 웨슬리 예배당에 1901년 설치됐던 종으로, 1942년 2월 16일 일제가 싱가폴을 함락시키며 각 교회에 축하예배와 국방헌금과 주물 공출을 강요할 때 빼앗길 뻔했으나, 모든 환란을 이기고 보전됐다고 쓰여 있다.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 1900년 6월에 건축하여 1901년 12월 25일 완공한 역사적 건축물이지만 이후 파괴되어 2012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곳 내리교회의 정문에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인천내리교회'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인상적인 붉은 벽돌의 이 교회건물은 물론 근래에 지어진 것이지만 아펜젤러가 한성으로 들어가기 전 제물포에서 한 달여를 지낼 때 예배를 드렸던 곳이다. 이후 이곳에 화이트 채플 예배당과 웨슬리 예배당을 비롯한 교회 건물이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경원하던 지역 사람들이었지만 이 교회 선교사들이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피란 가던 조선인들이 맡겨둔 살림살이를 차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 마음을 열고 교인이 되었다 한다.

    화이트 채플은 1891년 6월 인천선교 책임자로 다시 인천에 온 아펜젤러가 그해 11월에 지은 일본식 기와를 얹은 10평 정도의 예배당이었다. 이후 교인이 늘자 우각리 에즈베리 예배당을 빌려 썼고 1901년 아래의 웨슬리 예배당을 완공했다. 예배당의 이름에는 감리교의 창시자 죤 웨슬리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웨슬리 예배당은 내동의 명물이 되었고 1907년 서울 정동에 지은 정동감리교회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으나 1955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멸실되었다. 이후 복원된 건물도 1964년 화재로 멸실되어 1985년 지금의 교회가 다시 지어졌다.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의 과거와 현재 / 왼쪽에 아펜젤러 비젼센터 건물이 보인다.
    위의 종은 본관 첨탑에 걸려 있다. / 화이트 채플과 본래의 웨슬리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 건립됐다.
    1891년 11월에 세워진 내리교회 첫 공식 예배당인 화이트 채플(화살표) / 앞의 큰 기와집은 영국 성공회교회에서 세운 성누가병원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성공회 내동교회가 위치한다. (인천투데이 사진)
    1958년 내리교회 사진

     

    내리교회에서 바다 쪽으로 걸어가면 2011년 복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나온다.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 부자(父子)가 운영하던 호텔인데, 펜젤러는 자신의 비망록에 "1885년 4월 5일 도착해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건물은 아니고, 객실 내부도 당시의 모양새는 아닐 듯하니, 언더우드는 "고급이라는 다이부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으나 호텔의 침대는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에 불과했으며, 천정의 누수를 받기 위한 물동이가 매달려 있었다"고 적었다. 
     
    아펜젤러는 또 자신의 비망록에, "멀리서 바라본 것만으로 이 나라 조선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어떤 선입견도 가져선 안 된다. 밖에서 보면 마치 동굴처럼 보이지만, 그 안은 ‘알리바바 보물의 방’과도 같다"고 적었고, 언더우드는 "이 나라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긍휼을 베푸는 기관들이 세워져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고, 여기저기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날이 오기를" 이라고 썼다. 

     
     

    서양인이 그린 '제물포 일본조계지 거리' / 오른쪽 2층가옥에 '다이부츠 호텔'이라는 영문 글씨가 보인다.
    최초의 대불호텔 (왼쪽 건물)
    1887년 재건축된 대불호텔 / 2011년 복원되었다.
    내부에 재현된 객실
    그 당시의 거리는 이러했으리라 여겨진다. / 오른쪽으로 대불호텔과 일본 제1은행 건물이 보이다. (인천개항박물관 자료)
    지금의 모습은 이러하다.(한국관광공사 자료)

     
    이후 아펜젤러는 서울로 들어와 그 유명한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건립한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가 1885년 정동 자신의 자택에서 예배를 보았던 장소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지붕이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처럼 십자가 형태였으나 한국전쟁 후 장방형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정동 교회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로서 대한민국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8년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은 먼저 조선에 입국한 미국 의사 겸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집을 빌려 두 칸짜리 방 벽을 헐고 교실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믿음 그대로 단 두 명의 조선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학교는 곧 한국 근대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하였으니 이듬해 고종은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이 현판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정학교(丁學喬)가 썼다.  

     
     

    배재학당 터에세워진 아펜젤러의 동상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1887년 지어진 본관과 나머지 건물은 없어지고 1916년 지어진 동관만 남아 아펜젤러기념관 및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887년에 세워진 배재학당 본관 건물 (오른쪽 위)
    서울 정동제일교회
    건립 초기의 정동교회 / 1897년 사진으로 왼쪽에 배재학당 교사가 보인다.
    위의 옛길에서 찍은 사진 / 아래로 정동교회가 보이고 배재학당 자리에는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한국에 온 지 17년째 되는 1902년, 조난 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숨졌다. 그해 6월 11일 아펜젤러는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어청도 근해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는 사고를 맞았다. 당시 그 배에는 같은 감리교단의 선교사가 세운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타고 있었는데, 아펜젤러는 탈출을 하지 않고 선실의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가 배가 침수되며 22명의 사람들과 함께 사망했다. 그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을,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을 역임하였고, 그들 역시 아버지가 잠든 한국 땅에서 영면했다.
     
     

    1900년의 아펜젤러 가족 / 가운데 왼쪽이 이화의 교장이 된 큰딸 엘리스, 오른쪽이 배재의 교장이 된 헨리
    또 다른 가족 사진
    제물포에 상륙한 후 첫 기도의 내용이 새겨진 아펜젤러의 묘
    아펜젤러 가족 묘
    선교 파트너 스크랜튼의 묘 / 첫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벤톤 스크랜튼이 아니라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의 묘이다. 윌리엄 스크랜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어제 인천에서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찾아다닐 때 정말로 힘들게 찾은 흔적이 있다. 그의 직접적인 발자취는 아니고 근자에 인근 송월동 송월교회에서 제작한 모뉴먼트이다. 교회 측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한국 개신교 전래를 기념하는 모뉴먼트를 2009년 제작해 세웠는데, 이것이 교회가 민간 주차장 부지와 공원으로 사회에 환원한 땅에 서 있다는 것이 더 뜻 깊다. 그런데 사전에 정확한 정보로 없었고 워낙에 편벽한 곳이다 보니 찾는 데 애를 좀 먹었다. 
     
    그 모뉴먼트의 중앙에는 아마도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보았던 떨기나무의 불을 형상화했음직한 돌조각이 '동방의 횃불'이라는 이름으로 조형돼 있었고, 양 옆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남긴 말들이 얼굴 동판과 함께 조형되었는데, 거기에 써 있는 아펜젤러의 말은 이번에도 그들이 첫 상륙한 날, 즉 부활절일 기도였다. 상륙하기는 두 사람이 동시에 했거늘, 왜 이번에도 그의 모뉴먼트에는 묘비와 마찬가지로 부활절 기도가 쓰여 있을까?  문득 이것이 궁금해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요코하마에서 출발할 때 부활절 날을 택해 온 것이 바로 아펜젤러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인천 송월교회 부근 모뉴먼트
    '동방의 횃불'
    아펜젤러의 1885년 부활주일 기도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상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상

     

    ※ 사족 : 어제 (4월 9일) 한국 개신교회 140년 역사상 첫 부활절 축제인 ‘2023년 부활절 퍼레이드’가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졌다. 뉴스를 보니 근엄한 표정의 목사님들이 무거운 성궤를 메고 행진하고 있던데, 부활절과 구약의 성궤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어 저와 같은 퍼포먼스를 하는 건지....? 그리고 모세가 받은 십계명 석판은 또 왜 들고 가는지? 뒤의 큰 배는 노아의 방주인가? 그건 또 예수의 부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대가리들이 참 비상한 건지 이상한 건지....? 아무튼 요상하기 이를 데 없는 부활절 행사였다. 
     
    ※ 참고 : 검색어가 많이 떠 다음의 것을 밝힌다.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위 두 사람이 아니라 독일 루터교회의 칼 귀츨라프(1803∼1851)로, 1832년 7월 17일 충청도 보령 고대도에 상륙해 전도를 했다. 섬의 감기환자를 위한 약도 처방했는데(1832년 8월 2일) 이것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행한 첫 의료행위이기도 하다. 이어 1866년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를 타고 조선에 왔다 유명한 '제너럴셔면호 사건' 때 순교했으며, 1884년 9월에 들아온 알렌과 1885년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회 맥클레이 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했으며, 이어 윌리엄 스크랜튼이 1885년 2월 인천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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