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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렌보다 먼저 상륙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1. 18:42

     

    우리나라 기독교의 효시는 가톨릭의 경우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부터, 개신교는 1885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한국 기독교의 전래 상한선을 끌어올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됐다는 숭실대기독교박물관 소장 ‘경교 돌십자가’가 아직도 통일신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증거로 활용되는데, 이것이 완전 사기라는 것을 앞서 누차에 걸쳐 말한 바 있다. (☞ '기독교 전래 시기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잡담 I' / '조로아스터교와 통일신라')

     

    나는 그 물건들의 진위 문제에 대해 숭실대박물관 측의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대신 그 물건이 진열된 부스가 폐쇄되었는데 최근 다시 오픈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거짓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그 가짜 유물들은 아직까지 신라시대 기독교 전래의 증거로 여러 사람의 글에서 거론된다.

     

    * 다시 말하지만 그것들은 의도를 지니고 만들어진 가짜이며, 설사 진짜라 해도 이단의 산물이다. 잘 알려진 대로 경교는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이단으로 판명된, 그리하여 동방으로 쫓겨간 네스토리우스계 기독교를 말한다. 말하자면 기독교 이단의 효시 같은 종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라면 아주 펄쩍 뛰며 경기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그 이단의 종교를 우리나라 기독교의 시발로 삼으려 노력하고 있은 바,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다.

     

    신라시대 기독교 전래 증거로 활용되어지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의 위조된 돌십자가(25.4x24x9cm)
    위 돌십자가 발견되었다는 곳 / 십자가 발견 장소는 처음에는 불국사 내 바위 위였다가(김양선 목사) 다음은 대웅전 석등 밑으로 바뀌었고,(최병현 관장) 그렇다면 도굴로써 문화재법 위반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시 우물터 옆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 가짜 유물들을 재론하는 것은 최근에  다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논문을 읽어서이다. 요지를 말하자면 "신라의 문화는 로만 가톨릭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성 어거스틴 복음서>에 있는 예수 제자 누가 초상화와 토함산 석굴암은 거의 똑같은 양식으로 그려졌다. (그러므로 석굴암은 결국 야훼가 만든 것이다) 고려시대 원나라를 통해 다수의 기독교계 상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했다"는 내용인데, 논문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은 피하기로 하겠다. 

     

    또다시 강조하거니와 기독교가 일찍 전래되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거나 은혜를 더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괜한 노력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려는 측면에서 이해하려들면 수긍이 가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실증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거니와 개연성도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쪽에서는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래를 1592년 임진왜란까지 끌어올리려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동행했던 종군신부 세스피데스에 의거) 큰 반발을 불러온 적이 있으며, (그래도 창원시의 기념 모뉴먼트는 아직 건재하다) 개신교 쪽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 입국한 선교사 알렌이 제물포항에 상륙한 1884년 9월 20일을 한국 개신교의 기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팽배하다.

     

     

    창원 '세스페데스' 공원 기념물 / 2015년 건립 당시부터 문제가 많았던 창원 '세스페데스 공원'이 여전히 건재하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신부 그레오시오 세스페데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의해 1594년 12월, 종군신부 자격으로 곰내(웅천)에 상륙한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이자 첫 천주교인이었다. 오른쪽이 세스페데스, 왼쪽은 동행했던 일본인 후칸이다. (창원시청 사진)
    '세스페데스 공원' 내의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비 / 왜군 선봉장 고시니에 의해 왜군을 위해 종군한 천주교 신부임에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세스페데스와 조선인의 접촉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한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앞서 청나라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주변의 외국인과도 알력이 심했다. 이에 그는 그 대안으로 미지의 나라 조선을 선택해 한 살짜리 아들과 아내와 함께 1884년에 조선으로 왔다. 그는 그해 겨울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왕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주면서부터 왕실의 신임을 받고 선교의 자유 또한 보장받는데, 그가 민영익을 수술하는 동안 14명의 한의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민영익을 치료하는 알렌 / 1904년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 신문에서 호레이스 알렌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때의 삽화이다. 제목이 'Horace N. Allen. The First Amerlcan in Korea' 이다.

     

    하지만 명확성을 따지자면 알렌의 선교 이전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회 맥클레이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것이 먼저이며, 그보다도 20년 앞선 1866년 7월 25일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를 타고 조선에 왔다 유명한 '제너럴셔면호 사건' 때 순교했다.

     

    또 그보다도 30년 앞선 1832년 7월 25일 독일 루터교회의 칼 귀츨라프(1803∼1851)가 선교 목적으로 충청도 보령 고대도에 상륙해 전도를 한 전례가 있다. 역사상의 공식적인 첫 외래 선교의 기록이다. 섬의 감기환자를 위한 약도 처방했는데(1832년 8월 2일) 이것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행한 첫 의료행위이기도 하다. 

     

     

    고대도의 절경과 칼 귀츨라프 선교기념비

     

    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 한국 최초의 우리말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를 가지고 만주로부터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인(人) 서상륜의 입국일인 1882년 10월을 기년(紀年)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 역시 아직은 소수의견이다. 하지만 서상륜이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통과해 1883년 5월16일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 세운 초가집 소래교회가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것만은 틀림없다. (용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뒤에 소래교회를 재현해 놓았다) 

     

     

    서성륜(왼쪽) 서경조 형제 / 서상륜은 31세경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스코트랜드 연합장로회 목사 맥킨타이어의 도움으로 구명된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다. 1882년 존 로스가 한국 최초의 우리말 성서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옛 소래교회 / 아래의 초가 교회가 먼저 세워진 것이나 지금은 둘 다 남아 있지 않다.
    용인 총신대학교에 재현된 소래교회

     

    언드우드와 아펜젤러는 원래 1884년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 그해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이 묶였다. 그러다 국내 정세가 조금 안정된 이듬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침, 제물포항에 역사적인 첫발을 디디었다. 호러스 언더우드는 26세, 헨리 아펜젤러는 25세의 청년이었다. 인천광역시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은 그들이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기금을 모아 1986년에 세운 모뉴먼트인데, 조형된 인물은 아펜젤러의 부인까지 세 사람이다.

     

    그런데 인천역에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을 향해 가다 보면 기념탑일 보일 무렵 그 왼쪽으로 보이는 징크판넬 외장의 교회 건물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건물의 외벽에는 위의 세 사람과 함께, 그들보다 먼저 제물포항에 상륙한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선교사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즉 이 교회는 구한말 알렌에 앞서 이 땅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맥클레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로서, 2013년 6월 24일 건립되었다. 교회 건립일을 맥클레이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상륙한 6월 24일에 맞췄다는 후문이다.

    그 교회가 특수한 것은
    인천 교회사를 연구하던 박철호 목사가 2008년 발견한 바위 때문으로,(아래 사진)발견 당시 이 바위는 민가 안에 있었다. 박철호 목사는 일대의 지형이 항구 옛 사진의 모습과 일치함을 인지하고 민가를 매입해 2012년 아래의 '기념탑 교회'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과거 제물포항에 존재하던 그 바위를 교회 건물 밖으로 노출하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내부 공간이 턱없이 협소해져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맥클레이와 알렌, 그리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의 상륙을 모두 지켜본 이 바위를 대한민국 선교기념물로서 보존했던 것이다. 

     

    조선 선교의 선구자 맥클레이는 1824년 2월 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했다. 그는 1847년에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24년간을 그곳에서 선교한 후 1873년부터는 일본으로 가 미국감리교회 일본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때 도쿄에서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을 만나게 된다. 이후 조선 선교를 결심한 그는 갑신정변의 해인 1884년 6월 24이 제물포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김옥균을 통해 조선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국왕에게 전하였고 그해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이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가는 길의 오래된 그물가게들은
    시대에 밀려 사라져 가 안타깝다.
    위 그물가게들이 끝나는 곳에 '기념탑교회'가 있다.
    교회 정면
    입구 전경
    교회 측면과 벽에 부착된 안내문
    교회 내부의 바위
    이 바위가 포구에 있던 바위로서, 들어가 자세히 좀 보고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문이 잠겨 있었다. (두 번을 왔다 다 실패했다) 이 사진들은 창문 밖에서 찍은 것이다.
    창문에는 이런 설명도 쓰여 있고,
    외벽에는 제물포 포구를 거쳐 서울로 간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경로에 대한 안내문을 부착했다.
    또 그들의 첫 상륙지점에 대한 사진 설명문도 부착했는데,
    위로 올라가 내려다 보면 위치를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 중앙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고 차들이 주차해 있는 곳 바로 앞에 '기념탑 교회'가 위치한다. 예전에는 바로 이곳이 포구였으나 이후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월미도 쪽 사진으로 옛 사진과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월미도이고 왼쪽 배들이 모여 있는 곳이 포구이다, 1887년 이후 사진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보다 2년 이상 지나서의 모습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월미도이고 앞쪽으로 보이는 집이 영국계 무역회사 홈링거의 창고이다. / 홈링거는 1885년 말 영업을 개시했으므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는 이 모습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월미도이고 앞쪽이 제물포 포구이다. 1883년 개항 직후의 모습으로 맥클레이나 알렌이 입국했을 때는 이 모습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접안시설이 없어 가운데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서 들어왔다.
    1883~1884년 겨울 눈덮인 월미도와 포구 모습
    접안시설 없이 뻘을 가로지는 이 같은 부교만 있었다.
    2014년 발행된 최초 선교 기념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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