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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환국 은화의 '大' 자를 삭제시킨 원세개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8. 02:31

     
    원세개가 총판조선상무위원 진수상(陳樹裳)이 지은 낙동(駱洞, 지금의 명동) 상무공서를 헐고 '존엄'(尊嚴)을 과시하는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 10년간 주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이 청나라 공사관이 되었고,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이 되었으며 중국과의 수교 후에는 중국 대사관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임오군란 후 일시 조선에 주둔했던 원세개는 갑신정변 후에는 이곳에서 '감국대신'(鑑國大臣, 조선을 감시·감독하는 대신)으로 군림하며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했다. 
     
     

    명동 주한중국대사관 / 원세개가 주둔했던 그 땅에 2023년 멋대가리 없는 초고층 대사관 건물이 세워졌다. 미국 워싱턴 DC 대사관에 이어 세계에서 2번 째로 큰 외국 공관 건물이다.

     
    고종은 그럼에도 여타의 제지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임오군란 때에 이어 1884년의 갑신정변 때도 조선 조정은 어김없이 청국군을 불러들였으니, 이에 김옥균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을 3일 만에 소탕할 수 있었지만 이후 청국과의 관계는 과거의 형식적 속국에서 실질적 속국 관계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원세계는 그와 같은 처지의 조선 정부를 마음껏 능멸했으니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자는 누구든 욕을 먹고 뺨을 맞았으며, 고종은 그가 가마를 타고 중문을 통과해 정전 앞까지 이르러도 아무런 말을 못 했다. 오히려, 행여 표정 관리를 잘못해 높으신 원대인(袁大人)의 심기를 거슬릴까 조심해야 했는데, 당시 그 '대인'의 나이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재정이 바닥난 조선을 차관(loan)을 통해 주무르며 농락했다. (☞ "조선은 부서진 배" -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원세개)  아울러 차관 공여와 함께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챙겼는데, 이를 테면 관세징수권·산림벌채권·어로채취권·내지통상권·연안 무역 및 연안운송권·국경무역권 등이었다. 이것이 채무 불이행, 즉 디폴트의 경우 제공되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실은 차관 공여 조건으로 제공되었던 바, 국가세수는 더욱더 줄어갔고, 부채는 더욱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실질적으로 중국에서 빌린 차관을 상환한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는 조선 주재 외국회사들로부터 빌려온 차관도 포함되었는데, 이 역시 결국은 중국 돈으로 상환됐다. 이를 테면 1886년 독일회사 세창양행으로부터 조선 내 세미(稅米)운송권을 제공하고 빌려온 차관을 갚지 못했고 이를 원세개가 자국 기업으로 하여금 대납(代納)케 했다. 조선이 원세개에 코가 껴 허덕댐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어이없게도 그 난국에도 고종과 민왕후의 허세와 사치는 지속되었다.
     
    * 일례로 민왕후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조카 민영익을 살려준 미국 의사 알렌에게 10만 냥(환산 50억 원)을 주었으며, 1889년 3월 자신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 부인이  결혼할 때는 축의금으로 100만 냥 (환산 500억 원)을 희사했다. 고종이 제 생일잔치를 위해 수만 냥의 돈을 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천 신포로에 위치했던 세창양행 / 세창양행은 조선 총세무사 묄렌도로프의 지원을 받던 독일계 회사로서 미국 타운젠트 양행과 함께 외국계 회사를 대표했다.

     
    뿐만 아니라 원세개는 조선의 아녀자들도 마음껏 능욕하였으니 눈에 들어온 여자는 궁 안팎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납치해 욕정을 채웠다. 당한 여자들과 그의 집안은 그저 쉬쉬하기 바빴고, 치욕을 감당하지 못한 여인은 한탄하여 목을 매 죽었다. 아울러 주둔한 청국군인들에게 능욕당한 여자들도 부지기수였으며 또 그중에서도 자살자가 나왔고, 이로 인해 동묘(東廟) 일대의 굿당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원청굿이 행해지는 날이 허다했다.
     
    청국군인들에게 당하기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1884년 1월 청병(淸兵)들은 광통교에 있는 한약방에서 홍삼을 다량구입한 후 대금을 오랫동안 갚지 않았다. 이에 외상값을 독촉당하자 청병들은 주인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한성순보>에 의해 '화병(華兵) 범죄'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고, 소식을 접한 북양대신 이홍장은 총판조선상무위원 진수상에게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진수상은 다시 통리아문 총판 김병시 대감에게 경위를 물었다. 김병시는 확인해 본 결과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확증 없이 기사화한 것이라고 통지했다. 이홍장은 "일국의 관보가 떠도는 소문 따위나 수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대로(大怒)했고, 신문 발간 업무를 맡고 있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어쩌면 최초의 필화사건이라고 할 만한 이 사건은 조선정부가 자국의 백성을 전혀 지켜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했던 바, 조선 상인이 청병에게 물건을 팔고 값을 받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길에서 무단히 구타당한 백성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보았다시피 그들이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이게 나라냐?)
     
     

    1883년 <한성순보> 창간호

     
    원세개는 조선에 주둔하기 전 이미 결혼을 해 중국에 본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 주둔 10년 동안 조선인 여성 3명을 첩으로 두어 이들에게서 모두 15명(7남 8녀)의 자식을 얻었다. 원세개는 조선 정부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헌상한 명문가 안동김문의 여식을 첩으로 맞을 때는 그의 몸종까지 데려가 함께 첩으로 삼는 모욕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중국으로 가서는 원세개 본부인에 의해 나이순 대로 서열이 정해져 몸종이던 여자가 졸지에 언니로서 윗사람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중 안동김씨에게서 태어난 위안커원(袁克文)은 골동품수집가, 장기와 마작의 달인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 위안자류(袁家骝)는 미국에서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의 아내 핵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이 더 유명한 편이다. 김씨의 몸종 이씨에게서 난 위안커취안(袁克權)는 한때 황제 원세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을 정도로 출중함을 보였으나 원세개 몰락 후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다 죽었다.
     
    1887년 9월 11일, 변함없이 조선의 총독으로 군림하던 28세의 원세개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대외에 표방하는 것을 견제하자’고 본국 정부에 전보를 띄운 후,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된 주미 조선공사관원들에게는 '영약삼단'의 조건을 달았고,(☞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영약삼단') 더불어 '전권 공사'라는 명칭에서 '전권'(全權)을 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권은 오로지 청나라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원세개였으니, 조선에서 발행한 화폐에 '대'(大) 자가 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래의 1892년 대조선 개국 501년을 기념해 발행한 닷량 은화인데, 당시 함께 발행된 최초의 일련의 주화들은 이후 원세개의 명령에 따라 '대'(大) 자가 빠지게 된다. "청나라는 대국이요 조선은 소국인데, 소국이 대조선이라 칭하는 것은 국격상 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1892년 조선 개국 501년을 기념해 주조한 닷량 은화
    1892년 조선 개국 501년을 기념해 인천전환국에서 주조한 닷량 은화의 뒷면 / '대조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무거운 상평통보 대신 새로운 동전을 제조한 인천 전환국 터 표석
    당시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등에서도 大자가 제거되었다가 이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 다시 들어갔다.
    인천 전동의 인천전환국 안내문 / 현재 동인천 행복주민센터 일대의 부지로, 고종 22년인 1885년 조선 정부가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성전환국을 설립해 주조하다 일본에서 수입되는 주화용 동(銅)의 운반에 불편이 있어 1892년 이 일대에 3동의 인천 전환국을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의 인천전환국 / 건물 3동이 요철형으로 배치돼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정면과 좌우에 한 채씩 배치됐다. 정면 중앙의 건물에는 사무실, 화폐조사실, 검인실, 동쪽 건물에는 기계실과 기관실, 서쪽 건물에는 창고, 조각소, 감찰소 등의 공간을 배치했다. 인천전환국에는 총 9대의 압인기가 설치됐는데 2대는 경성전환국의 것을 가져다 썼고, 6대는 오사카조폐국에서 도입했다.
    경성전환국 압인기
    인천시립박물관의 인천전환국 발행 주화
    오욕의 5량 은화 / 이후 대조선국의 '대'자가 빠지게 된다. 이 은화는 결국 유통되지 못했다.
    전환국은 경인철도가 완공된 후인 1900년 8월 다시 서울 용산으로 이전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대가 낮은 언덕이어서 야마네마찌(山根町)로 불려졌는데 광복 후 전환국(典換局)이 있던 동네라고 해서 전동(典洞) 이 되었다가 다시 전동(錢洞)으로 바뀌었다.
    인천전환국이 있었던 동인천동 행복복지센터 부근 풍경
    인천전환국 터에서 보이는 중국풍의 가옥이 문득 원세개 간섭 시절을 떠올리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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