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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감리서를 탈출한 백범 김구, 그가 투옥된 진짜 이유는...?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6. 23:02

     

    청년 시절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 ~1949) 선생의 이름은 김창수(金昌洙)였다. 본명은 창암이었으나 동학교도가 되며 창수로 개명했다. 그는 스물한 살이던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구(鵄河浦口) 주막에서 일본인 상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중위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였다. 김구가 쓴 <백범 일지>를 보면 주막에서 만났던 자가 수상히 여겨 알아보니 을미사변 때 민왕후를 시해한 일본군 가운데 한 명이었고, 그래서 칼로 찔러 죽였다고 되어 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아왔듯 백범은 180cm가 넘는 신장으로 당대에는 보기 드문 거구였다. 어릴 적에는 양반집 아이들도 그를 무서워했다고 하는 바, (김창암은 천민으로 태어난 듯) 힘도 장사였던 것 같다. 그러한즉 왜놈 한 명쯤 찔러 죽이는 일은 결심만 하면 가능했을 터이다. 그는 석 달 후 해주부(海州府)에 체포되어 해주 감영(監營)에 갇혔다가 1896년 7월 초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인천감리서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신포로 로터리 뒷길 스카이 타워(SKY TOWER) 아파트에 있었는데, 최초의 명칭은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였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가운데)가 이승만, 미군정 하지 사령관과 함께 찍은 사진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회의 창덕궁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김구와 이승만

     

    인천감리서는 1883년 8월 개항된 인천의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로서, 김창수 사건이 인천감리서로 이송된 건 그곳에서 외국인 관련 사건이 다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된 사건이므로 죄인에 대한 심문과 재판이 인천감리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일본영사관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백범은 7월 16일 인천감리서로 압송된 후 일본인이 배석한 상태에서 세 차례 합동심문을 받았다.


    세 차례의 진술에서 스치다를 살해한 동기와 살해 방법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의 죄목은 <백범일지>에서 기록된 내용과 달리 '강도 살인'으로, "국모인 민왕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써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했다"는 백범의 주장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즉 그는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일본군 중위를 죽인 것이 아니요, 또한 조선인으로 가장한 일본군 밀정(후일 밀정으로 말이 바뀜)을 죽인 것도 아닌, 대마도 출신의 약장사 스치다 조스케를 죽인 것으로, 목적은 그가 가진 돈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살해 방법도 세 차례의 진술이 조금씩 다르다. 1차 진술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  2차에서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 강변까지 쫓아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해 죽였다.  3차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 주막의 모든 투숙객이 분격해 함께 찔러 죽였다고 했다. 나는 그 살해 방법보다도 청년 김창수가 스치다 조스케를 어떻게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일본군 중위라는 사실을 알았나 하는 것이 더 궁금하다. 당시 김창수는 동학군 포로에서 풀려난 그저 떠돌이 신세였으므로 그와 같은 정보를 취득할 길은 없다. 아울러 재판 기록은 내내 '강도 살인'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이해하자면, 만일 김창수가 명성황후 시해범 일본군 중위를 죽였다고 한다면 사건은 훗날의 안중근 재판처럼 세인의 주목을 받았으라 생각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강도 살인죄로 1896년 9월 10일  교형(絞刑,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일본영사대리는 당시까지 존속하던 조선의 가장 무거운 형벌인 참형(斬刑,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으로 처벌해 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재판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의 인천감리서
    월미도가 보이는 인천감리서 사진 / 1894년 촬영
    신포동 스카이 타워(SKY TOWER) 아파트 앞의 인천감리서 터 안내문


    그런데 형이 곧바로 집행되지 않아 그는 2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자 탈출을 도모하려는 꾀가 생겨났던 바, (지인인 강화사람 김주경의 탈출을 암시하는 한시가 실린 편지를 받았다고도 한다) 1898년 3월 19일 밤 인천감리서 감옥의 탈출을 감행해 성공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탈옥 후 주변의 지리를 몰랐던 김구는 밤새 감옥 주변의 해변을 헤매다 이튿날 새벽 해가 뜰 무렵 겨우 감리서 뒤편의 용동 마루터기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동인천역 방향으로 도주한 듯 보이니, 천주교당 뾰쪽집(현재 답동성당)을 발견하고 화개동(현재 신흥동) 쪽으로 접어든다. 김구는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라 짐작하고 걸어갔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그렇게 가다가 우연히 만난 모군꾼(공사판 품팔이꾼)에게 길을 물었고, 그가 가르켜준 길 대로 시흥 방향으로 나아가 벼리고개와 부평을 거쳐 양화진 나루에 도착한다.

     

    김구의 탈출 경로를 더듬자면, 인천감리서 감옥~응봉산(자유공원)~북성포구 부근(송월동)~중국인 묘지(인현동 언덕)~용동 마루터기(홍예문 주변)~화개동 마루터기(해광사 인근)~벼리고개~부평~양화진 나루이다. 감옥을 나온 이후 방향감각을 상실했던 김구는 답동성당 첩탑을 발견하고 방향을 정하기 전까지는 감옥 근방을 배회하는 링크원더링(길을 잃은 자가 주변을 멤돌다가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일) 증상을 보인 듯하다. 

     

     

    1950년 라이프지에 실린 답동성당 / 1937년 건립된 성당으로, 인천상륙잔전 당시 맥아더가 이 십자가 건물을 피해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16년 답동성당의 모습 / 김구가 보았다는 '천주교당 뾰쪽집'은 이 건물로서, 1889년 빌렘 신부가 지은 답동성당(당시 제물포성당)이다.
    지금의 답동성당
    용동 쪽에서 바라본 답동성당 / 왼쪽 스카이 타워 일대에 인천감리서가 자리했다.
    김구의 탈출을 도운 사람들의 프로필이 옛 인천 감리서 가는 길 담벼락에 새겨져 있다. / 김주경은 탈출을 암시하는 한시를 보낸 사람으로 그의 시가 함께 쓰여 있다.

     

    <인천 투데이>의 기사에 따르면, 김구의 탈출 계획은 은 3단계로 진행되었던 바, 1단계로 삼릉창을 준비했다. 김구는 탈옥을 앞둔 어느 날, 면회 온 부친에게 "대장장이에게 한 자 길이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달라 해서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 삼릉창은 김구가 감옥 바닥에 깔린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내는 도구가 되었다. 창끝의 모서리가 셋인 삼릉창은 조선 후기 국방 무기 중 하나로, 벽돌을 들출 때 날이 부러지는 사고를 막기에 제격이었다. 삼릉창 얘기는 120년이 넘도록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삼릉창을 튼튼하게 만들어낸 인천의 대장장이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구 탈옥의 결정적 조력자가 된 셈이다.

     

    2단계로, 같이 옥살이하던 사람 중 함께 탈옥할 이들을 골라 팀을 구성하고, (조덕근, 양봉구, 김백석) 그중 재력이 있는 이에게 근대 화폐인 백동전 200냥을 가져오게 했다. 이 돈으로 탈옥 당일 저녁, 80여 명의 죄수들에게 술판을 벌여 주었다. 당직 간수가 아편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간수에게는 미리 아편을 먹였다. 간수는 아편에 정신줄을 놓고 죄수들은 술에 취해 노래하니 감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3단계인 탈출 경로도 흥미롭다. 삼릉창으로 바닥을 뚫어 감옥 밖으로 나가 담을 넘기 위한 줄사다리를 매어 놓았다. 혼자서 먼저 밖에 나와 잠시 갈등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혼자 갈 것인지, 약속한 이들과 같이 갈 것인지. 결론은 죽을 때까지 부끄럽게 살지 말자는 것. 나온 구멍으로 다시 돌아가 네 사람을 내보낸 뒤 자신은 맨 나중에 나왔다. 담을 넘을 때도 맨 뒤에 섰다. 그런데 앞사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감리서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감시병들이 옥문을 열고 들어오는 와중에, 줄사다리를 오를 겨를도 없어 4미터가 넘는 담벼락을 한 길쯤 되는 몽둥이로 장대높이뛰기 하듯 넘었다.

     

    다른 탈옥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혼자 남은 그는, 삼릉창을 들고 정문인 삼문으로 갔다.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삼릉창으로 싸울 각오였으나, 비상상황에 불려 가느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걸어서 감리서를 나왔다. 하지만 관가에서는 곧 그들의 체포에 나섰던 바, 김구는 길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순검들을 피하느라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밤새 해변 모래밭을 헤매다가 이후 집 밖에 낸 아궁이에 숨기도 하고, 인천과 시흥 어름에서는 대로변에 심어진 어린 소나무의 포기 속으로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죽은 듯이 버티기도 하며 양화진까지 이동했다. 

     

     

    김구가 갇혔던 인천 감리서 감옥 / 왼쪽 사진에는 (김구가 뛰어 넘었다는) 감옥 담장과 출입문이, 오른쪽 사진에는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 보인다.(출처 : 인천시 인터넷 신문 i-view)
    김구가 걸어 나왔다는 감리서 내삼문 (맨 위 사진) / 재판을 받은 인천감리서 개항장재판소 (좌측 사진) / 위에서 본 인천감리서 감옥 (우측 사진 / 출처: 인천시 인터넷 신문 i-view)
    양화진 나루터 부근의 양화대교 / 부평에서부터 양화진까지는 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나루터 표석 /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라고 쓰여 있다.

     

    탈옥 뒤 백범은 김창수라는 이름을 바꾸게 된다. 구명을 위해 애쓰던 강화에 사는 유완무가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그 김구이다. 그는 이후 나머지 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칠 것을 결심하는데, 그는 이때 스스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붙였다. 하찮은 백정이나 범부(凡夫)라도 자신과 같은 자주정신으로 무장을 하면 독립을 이루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때 이미 민족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년 김구는 1911년 8월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인천과의 인연을 이었다. 그는 그 사건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일본경찰은 그에게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집에 참여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 총독을 암살에 공모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의 고해성사로써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알게 된 명동성당의 구스타프 뮤텔 주교가 이를 총독부에 밀고하고 반대급부를 챙긴 사실은 앞서 '105인 사건의 진실ㅡ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밀고한 뮤텔 주교'에서 밝힌 바 있다.

     

    김구는 이 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경성감옥소에 투옥됐다가 1913년 인천분감으로 이감됐다. 김구와 인천의 두 번째 고달픈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인천감옥소에 수감된 후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1915년 8월 가석방됐다. 축항 강제노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백범일지>에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불과 반나절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됐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

     

     

    인천 축항공사 현장 사진 / 김구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시절인 1913년 10월 23일 찍은 사진이다. 백범은 1913~1915년 경성감옥 인천분감에 수감돼 있으면서 축항 공사에 투입됐다. 맨 위의 사진이 김구가 말한 사다리로 보인다.
    또 다른 축항공사 현장 사진이다. 이 사진 역시 보기만 해도 힘들어 보인다.

     

    인천시 중구는 청년 김구의 그 아픔의 추억을 '청년 김구 역사거리 조성사업'에 담아냈다. 그리하여 2018년 12월 28일부터 중구 신포동거리에 김구의 흔적을 새기고 동상을 세웠다. 중구가 조성한 청년 김구 역사거리는 신포동 문화의 거리 로터리에서 성신아파트 앞에 이르는 약 200m 구간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는 미야마찌(宮町)로 불린 번화가로서 마사키(正記)라는 일본 야쿠자(조선인이라고도 함)가 밤의 황제로 군림했고, 러시아 마담이 운영하는 '긴빠'(金波)라는 유명한 3층 카페가 있었다. 

     

     

    신포동 문화의 거리 로터리의 김구 동상 / 2018년 '청년 김구 역사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왼쪽 위로 '청년 김구 역사거리' 표지판이 보인다.
    금파(긴빠)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재현된 금파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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