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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물포 화도진과 장도포대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9. 00:28

     

    구한말의 혼란기에서부터 망국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노라면 1879년(고종 16)에 설치된 제물포 화도진(花島鎭)은 진실로 놀랍다. 고종이  제 보신(補身)과 위신을 위해 다른 군영을 축소시키고 오직 친위부대인 무위소(武衛所)만을 증강시키던 때 설치된 진영(鎭營)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그 무렵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더욱 놀람을 금할 길 없다. 난세에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앞뒤 일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화도진의 꽃담 벽화
    화도진의 화포

     

    고종 임금은 1873년 드디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무릎 아래를 벗어나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74년, 고종은 자신의 주변과 궁궐수비를 위해 무위소(武衛所)라는 새로운 군영(軍營)을 창설했다.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차출해 823명으로 출발한 무위소는 처음부터 작지 않은 규모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증강으로, 1879년에 이르러서는 전투부대, 수송부대, 취악대(군악대)까지 포함해 무려 2,371명의 군사를 거느린 대규모 부대가 되었다. 

     

    고종의 친위부대 증강에 영의정 이유원, 우의정 박규수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일관되게 반대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재정적 문제였다. 그 많은 군인들을 먹여 살리고 무기를 공급할 돈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고종은 우선적으로 강화 진무영을 축소시켰다. 진무영은 원래 1700년(숙종 26) 해상 방위를 위해 강화부에 설치한 군영으로 흥선대원군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강화 진무영을 보강하여 확충된 삼수병(三手兵) 전투부대를 전진 배치시켰는데, 그들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대전(大戰)에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히 한 바 있었다.

     

    그래서 바다 쪽 방위가 튼튼하다 여겼던 것일까? 고종은 거리낌없이 진무영을 축소시키고 그곳에 들어가는 국방비를 무위소에 전용했다. 더 나아가 강화 진무영의 군인들을 무위소로 돌렸다. 

     

    그 결과 1876년 일본군의 강화도·영종도 공격에 조선군은 처참히 패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의 일본군이 프로이센의 군제와 훈련을 답습해 강해졌기로서니 프랑스 해군 육전대나 미 해병대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막강 프랑스군과 미군을 막아낸 진무영의 군인들은 일본군의 공격에는 어이없이 패퇴했다. 사기가 떨어지고 배고픈 군대가 패배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고종은 정신을 못 차리고 1879년 다시 총융청의 군사를 빼내 친위부대인 무위소를 보강했다. 인천 화도진은 바로 그 해에 설치된 것이라 놀랍다고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문에는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부산과 원산이 개항장이되었지만 인천은 1883년까지 개항되지 않고 있었다. 조선측이 개항하지 않는 이유는 인천항이 서울과 매우 가깝다는 이유였는데, 이것은 일본측이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하는 이유와 같았다. 조선에서는 같은 이유로써 인천 대신 남양(南陽)의 마산포(麻山浦)를 개항장으로 제시했고, 일본도 조선측의 완강함에 남양만을 선택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을 바꿔 인천을 요구했다.

     

     

    개항문답 / 1878년 조선의 예조가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사타다와 인천의 개항문제를 협의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다. (인천시립박물관)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부임 이래로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제물포의 개항을 집요하게 요구했는데, 화도진이 설치된 1879년은 하나부사가 개항 압박을 더욱 조여오던 때였다. 그리하여 만일 개항이 무산될 경우 일본군이 험난한 강화 수로(水路)를 피해 인천을 통해 육로로 서울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었던 바, 이를 방비코자 인천 쪽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부평에 연희진(連喜鎭)을 설치하여 부설 포대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후 화도진은 인천도호부 소속으로 화도진지와 소래 포구의 장도포대(獐島砲臺), 남동구 논현동의 호구포대(虎口砲臺) 등의 여덟 곳 포대를 관할하였고, 연희진은 부평도호부 소속으로 연희포대와 가정포대(佳亭砲臺) 등의 일곱 포대를 관할하였는데, 화도진에서는 응봉산 정상(현 자유공원)에 요망대(瞭望臺), 옛 올림포스 호텔이 자리했던 언덕에는 해망대(海望臺)를 설치해 바다도 감시하였다. 

     

     

    소래 포구의 장도포대 / 굿모닝인천 사진
    장도포대와 화포
    옛 해망대 자리로 추정되는 곳 / 이후 이곳은 해망산으로 불려졌다.
    해망대에서 바라본 월미도
    옛 해망대에는 이후 영국영사관, 미군휴양시설, 파라다이스호텔, 올림포스호텔 등이 거쳐갔다. 1965년 세워진 올림포스호텔은 오랫동안 인천의 핫플로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지난 2020년 경영난으로 결국 폐업했다.

     

    제물포 연안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논의는 1877년 10월경부터 구체화되어 1878년 8월 27일 무위소 소속 신정희(申正熙)를 진사(鎭舍)와 포대(砲臺)의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上)에 임명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진사는 강화로 통하는 수로를 내려다보면서도, 바다에서는 응봉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화수동 언덕에 두었다. 포대 공사는 10월 15일 제물포 주변부터 축조하여 이듬해인 1879년 7월 1일 일단락되었다. 포대는 강화에서 실어온 석재를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쌓았다. 진사가 위치한 다소면 화도리 (花島里)의 지명을 따서 화도진이라 이름하고, 무위소에서 추천한 별장의 관할 아래 두었다.

     

     

    인천 송현고개에 세워진 조금은 특이한 어영대장 신정희 상

     

    화도진의 설치를 제안한 사람은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 1811~1891)로, 그는 1866년 병인양요 무렵 형조판서·강화부유수·어영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까닭에 그는 연안 방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바, 고종이 친위부대 무위소 강화에 진력할 당시에도 극력으로 진(鎭)의 설치를 간(諫)해 화도진과 연희진의 구축을 이끌어냈던 것이었다. 이경하는 이렇듯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였지만, 국왕의 무능으로써 서울 낙동의 집을 청나라에 빼앗기고 청나라 총판조선상무위원 진수상(陳樹裳)에게 뺨을 맞고 원세개의 부하인 청나라 군사에게 집단폭행을 당해야 했으니 당시의 심정이 오죽하였을까? (☞ "조선은 부서진 배" -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원세개

     

    * 그래서였을까? 그의 아들 이범진과 손자 이위종은 만고에 이름을 떨친 애국지사가 되었으니, 이범진은 구한말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를 지냈고, 초대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으며 주미공사로써 조국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아울러 그 아들 이위종은 저 유명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의 일원으로서 3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 실력으로 조선이 처한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렸고, 그 후로는 항일무장 투사로서 '시베리아의 별'로 불리며 연해주 일대의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다.(그는 러시아 내전 중 혁명군인 적군을 지휘하다 실종되었다)  

     

    화도진과 연희진은 인천 개항 후 모두 없어졌다. 다만 화도진은 그에 관한 그림이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했으나 연희진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서 부평 빈정공원 내에 그 표석만이 남았다. 일제강점기 연희진에 서곶면사무소를 지으면서 파괴가 가속화된 까닭이다. 화도진은 1987~1989년 인천시 화수동에 2만 631.6m²(약 6252평) 규모, 병영 11개 동이 있던 옛 모습이 거의 복원되었다. (제 자리가 아니고 옛 부재를 사용한 것도 없기에 복원보다는 재현이란 말이 옳을 터인데, 까닭에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될 때 '화도진'이 아닌 '화도진지'로 등록되었다) 

     

    화도진이 복원된 데는 무엇보다 1882년 5월과 6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영·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라는 역사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그렇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 장소를 복원할 당시 이미 옛 화도진 자리에는 주택이 가득 들어차 있어 결국 제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고 원래의 위치를 벗어난 위쪽으로 자리를 마련한 까닭에 복원의 의미가 조금은 퇴색됐다. 그리고 그에 앞서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는 1982년, 옛 <화도진도>를 근거로 그 부근에 인천시와 기념사업회가 한미수교백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화도진도> / 작자 미상의 그림으로 1879년 제작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화도진도> (부분)
    화도진 공원의 한미수교100주년기념비
    기념비에서 본 화도진
    기념비와 화도진 외삼문
    화도진 외삼문
    내삼문과 동헌
    화도진 우물
    화도진의 포
    화도진 포 설명문 / 화도진 관할 포대는 만석동 괭이부리 선창 주변의 묘도 북변포대 5혈과 묘도 남변포대 5혈, 화수동과 송월동 해안 주변의 북성곳 북변포대 3혈과 북성곳 남변포대 5혈, 북성동 인천역과 해안동 고철부두 주변의 제물 북변포대 8혈과 제물 남변포대 5혈, 논현동 호구포대 5혈, 소래포구 주변의 장도포대 5혈 등이었다.
    화단에 숨은 앙증맞은 장식용 화포
    원래 화도진 외삼문이 자리했던 화수동 242번지 일대
    외삼문은 화수동 242번지 집과 그 옆 할인마트에 걸쳐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이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가 화도진이 아니라 새로운 장소임이 밝혀졌다. 이에 근거가 되는 것은 첫째 아펜젤러 목사가 서술한 '슈펠트의 회고'라는 글이었는데, 거기에는 해관(세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 천막을 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 슈펠트의 술회가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펜젤러 글 속의 장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장소, 즉 '인천해관장 사택 터'의 정확한 위치를 표기한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가 2013년 세관 공무원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약체결지는 청·일조계지 계단 끝 자유공원 입구에 위치한 야외웨딩홀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2019년  6월 그 앞에 기념비 표석이 세워졌다. 

     

    * 그런데 2021년 이 표석의 제목에 영문이 빠져있다는 시민 의견이 제기되었고, 더불어 인천을 찾는 외국인에게 개항기 인천 역사를 알릴 필요성이 제고되어 2021년 11월 한·영·중문이 함께 표기된 새로운 기념비 표석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매우 잘한 일 같다 / 전에 것에 비해 디자인도 훨씬 좋다)

     

     

    1884년 제작된 청국조계 위쪽에 해관장 사택의 표시가 선명한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
    자유공원 입구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표석
    화도진이 관리했던 논현동 호구포대 (정면)
    논현동 호구포대 (배면)
    철종 때 제작된 논현동 호구포대 청동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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