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천 용동 권번 골목 - 일제시대 선물 투기열풍과 맞물렸던 해어화(解語花)의 영화(榮華)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15. 08:35

     

    지금의 코인 열풍, 증시 열풍 같은 투기 붐이 조선 땅을 휩쓴 적이 있다. 1920~30년대 피크를 이루었던 인천 미두취인소, 속칭 인천 미두장(米豆場)의 선물거래가 그것이었다. 쌀 수출항 인천에 거래소인 미두취인소가 등장한 것은 1896년으로, 당시 일본 상인들의 발의로 주식회사 인천 미두취인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부산, 목포, 군산 등 주요 미곡항에 미두취인소가 설립되었는데, 이후 1920년대까지는 쌀 등의 곡물을 시세에 따라 거래하는 현물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차츰 오늘날의 선물거래식으로 거래방법이 바뀌기 시작했다. 곡물은 생산 시기가 한정되어 있고, 자연재해나 전쟁에 따른 변동이 생길 수 있지만 소비 시기는 상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언제든지 가격 변동이 생길 수 있었다. 이러한 가격 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곡물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물거래 형태로서 변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물거래가 고정화된 1920년대 이후 산미 증산계획이 실시되자 조선의 미곡 시장은 활황 국면을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 광풍이 조선에 몰아쳤다.

     

    쉽게 설명하자면 가을 추수를 앞두고 풍년이 올지 흉년이 올지를 맞힌다면 대박이 나는 것이었다. 이에 선물로써 일확천금을 노리는 고자본의 사업가들이 달려들었는데, 사업가뿐 아니라 회사원, 학생, 상인, 지주, 머슴 할 것 없이 모두 몰려들어 일확천금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 같은 개미들의 대부분은 최소한의 경제지식도 갖추지 못한 깜깜이 투기꾼에 불과했고, 매수와 매도 시기를 운에 맡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바, 거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농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미두 투기 열풍은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 당시 미두장에 몰린 90%는 한국인이었지만 득을 보는 것은 10%의 일본인 자산가들이었다. 패가망신한 한국인이 속출하자 한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던 바, <개벽>지는 인천미두취인소를 "조선인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의 굴이자 사회적 독소"라고 통렬히 비난한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 중일 전쟁 이후 총독부가 미곡의 자유 거래를 금지하는 등 경제를 통제하면서부터 열풍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임박한 1939년, 전국의 미두 시장이 모두 폐쇄되고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조선미곡시장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열풍은 사라졌다. 당시의 투기 열풍은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웠던 한국인들이 현실의 암울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심리가 투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요즘에도 그와 같은 일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시대 탓만을 할 수 없을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의 미두장 사진
    홍예문로와 미두장 사진 (●)
    미두장이 있던 곳 / 국민은행 자리였다가 지금은 아파트 분양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당시 인천항 야적장의 쌀 / 창고가 부족해 밖까지 쌓여 있다.
    조선미곡창고 사무소로도 쓰였던 개항기 시절의 건물
    위 건물의 머릿돌 / 지금은 건축사협회 인천광역시건축사회 건물로 사용된다.
    개항기 무렵의 창고를 술집으로 개조한 부근의 '인천 맥주' / '개힝로라거'라는 생맥주가 일품이다.
    인천 중구청 담벼락의 미두취인소 안내문
    거래소 광경
    미두취인소 계산서 / 1937년 발행된 매도통지서이다. 매두 단가는 30엔 전후이고 수령자가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인천기미취인장부 / 미두취인소 중매인 장부로 미두의 수령과 수령 날짜, 금액 등이 기록돼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미두취인소의 활황에 따라 정미시설도 크게 늘어 1930년대에는 인천의 정미소가 60여 소에 이르렀다. 정미소 하나에 수십~수백 명이 종사했던 바, 그 당시 인구 6만 명 정도였던 인천에서 정미업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가 미루어 짐작된다. 인천의 정미소는 1982년 미국타운센트 양행이 중구 크라운 볼링장 자리에 세운 증기 동력 시스템의 담손이 방앗간(타운센트 정미소를 조선인들이 부르던 이름)이 최초의 서양식 정미소였다고 한다. 그 이래로 선진 기술을 활용하는 일본의 정미소가 속속 들어서며 1930년대 말 인천의 정미산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인천 최대 정미소였던 신흥동 가토 정미소
    지금도 남아 있는 신흥동 리키타노 정미소 굴뚝

     

    정미산업 및 미두장의 활황과 더불어 발전한 것은 권번과 기생집이었다. 본래 쉽게 번 돈은 쉽게 쓰는 법이었으니, 지난 80~90년대 국내증시가 활황일 때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전국의 룸살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리라 본다. 바야흐로 구한말 제1의 상업도시로 떠오른 인천은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고, 선술집은 선술집 대로, 고급요리집은 고급요리집 대로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그중에 기생집도 있었다.

     

     

    당시의 가장 번화가였던 미야마찌 / 현 신포동 사진임

     

    당시 기생집은 번화가인 현 신포동에 위치했던 화월관이나 용금루 같은 일류 요정뿐 아니라 뒷골목의 중소 기생집까지 몰려드는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용동에는 그들 기생들의 합숙소가 생기며 권번이라는 소개소(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리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던 업무대행소)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 기방에서 반복창(潘福昌)은 최고의 손님이었다. 그는 인천 강화 출신의 정미소 말단 사환에 불과한 자였으나 미두장에서 거부가 되어 300만원이 넘는 자산가가 된 사람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백억 대의 부자였다.

     

    어디나 그렇듯 인천 미두장에도 행운아가 없을 수 없었으니 거듭된 투기에 성공한 반복창은 '미두왕', 혹은 '미두신(神)'으로  불릴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결코 운에 기댄 것이 아니었으니, 그의 성공담을 짧게 피력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판 워렌 버핏 미두왕 반복창

     

    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부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에 어릴 적은 적어도 밥 걱정은 안하고 살았으나 1910년 한일합방 후 부친은 실직을 하였고 이후 시작한 장사에서도 큰 손해를 보아 가세가 기울자 소년 반복창도 생업전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인천으로 가 아라키(荒木)라는 일본인의 하인이 되었는데, 아라키는 개항 직후 화륜선을 이용해 한강 수로를 따라 인천~한양의 곡물을 운반함으로써 큰 부를 축척한 자였다.

     

    아라키는 당연히 미곡의 흐름을 알았으니 1896년 인천에 '아라키중매점'이라는 미두점을 개설했다. 반복창은 그곳의 사환으로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익혔다. 그리하여 차츰 투자 기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한 달 5~6원에 불과한 박봉을 모았다. 돈이 모이면 언젠가는 자신도 투자대열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이었으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일이 끝나면 그날 자신이 보았던 거래를 복기하며  괘선(罫線, 그래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어를 공부하여 주변의 경제서적을 읽었던 바, 어느덧 경제학사 뺨칠 만큼의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저 <삼국지>의 제갈공명처럼 평소 천기(天氣)를 살폈다. 당시는 '천기상장(天氣相場, 날씨 시세)'라는 미두 용어가 있을 만큼 강우(降雨)가 시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복창은 돈 500원가량이 모아진 날, 드디어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다. (방식은 요즘의 옵션거래와 비슷해 중매인을 통해 최소 100원을 보증금을 예치하고 미두통장을 받았으며, 쌀 백 석 정도의  100원으로써 수천~수만 석의 매매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후 승승장구하였으니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원(현재 시세 약 180억원)을 버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정확히 쌀 시세를 예측하였던 바, 어느덧 재산이 40만원(현재 시세 약 400억원)으로 늘었다. 그는 미두시장의 신(神)으로 군림하였으니, 반복창이 미두시장에 나타났다는 소식만으로 가격이 큰 폭으로 춤을 추었다. 당시 그의 21살이었으며 미두시장에 데뷔한 지 불과 1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그는 무려 800배의 수익률을 내었다고 하는 바,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무릎 꿇고 배웠어야 할 사람이다) 

     

    그 21살 청년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미두계의 패왕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1년 5월 28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날 인천역에는 인천 방면의 하객을 운송하기 위한 2등석 특별열차가 운행했다. 반복창이 인천의 하객들을 모시기 위해  2등석 열차만을 연결한 특별열차를 주문해 대절한 것으로 (당시 경인선 열차의 일반석은 3등석이었다) 인천시장 요시마츠(吉松憲郞)를 비롯한 인천의 내로라는 인물은 모두 탑승했다.

     

    인천에서 출발한 임시급행열차는 논스톱으로 경성역까지 내달았고,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자동차가 손님들을 맞아 하객들은 신발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결혼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시내의 자동차가 통틀어 200여 대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요시마츠 인천시장이 직접 축사까지 낭독한 이날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스러웠는데 결혼식 당일 비용으로만 3만원(30억원)이 지출되었다.  

     

    그렇다면 신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이름은 김후동으로, 한마디로 조선 최고의 미인이었다. (그는 동생 김화동과 함께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여인으로서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될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반복창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결혼 후에는 언제 그랬냐 싶게 투자에 족족 실패하였고, (국제경기의 하락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도 손절하지 못하고 계속 투자하다 결국 2년 만에 전 재산을 들어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즘의 허수 매매와 같은 사기를 치다 감옥에 가게 됐고 아내와도 이혼했다. 그는 결국 30살의 나이에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거기에 정신이상까지 와 발작을 일으키는 등 비참하게 살다가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후동과 그의 자녀
    언니 김후동과 마찬가지로 불행했던 동생 김화동

     

    그 시절 흥청거렸던 기생집의 흔적이 인천 중구 용동 골목에 남아 있다. 골목 계단에 새겨져 있는 '용동권번(龍洞券番)'을 비롯한 몇 자의 글자들로, 그들 기생들이 돌계단에 글을 새길 정도로 돈과 마음에 모두 여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권번은 1912년 6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인천용동기생조합소'라는 단어로서 등장하는 바, 아직 그 시절까지는 '권번'이라는 단어가 탄생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1920년대 신태범 박사가 쓴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는 권번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의 번창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

    용동권번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따 소성(邵城, 통일신라 때의 명칭) 권번으로도 불렸으며, 소성권번의 기생들이 요릿집에 불려 갈 때는 인력거를 이용했다. 도심 내의 웬만한 거리는 택시보다 요금이 저렴했다. 대부분 인력거를 타면 전면의 휘장을 내리지만, 기생들은 자신을 선전하고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휘장으로 가리지 않았다. 특히 인력거꾼들이 기생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딸을 기적에 올리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용동 권번 골목
    '용동권번(龍洞券番)'의 글자가 남아 있는 중간 계단
    중간 계단 맨 위에 써 있다.

     

    또 골목 돌계단엔 '龍洞券番 昭和四年六月 修築'(용동권번 소화 4년 6월 수축)이라고 새긴 문구가 전해지는데, 아무리 자세히 봐도 글자가 모두 식별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 골목의 돌계단은 1929년 이곳에 살던 기생들이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다른 골목들은 모두 흙비탈일 때 자신들은 돌계단으로서 특별함을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크게 퇴락하고, 길가의 '위해객잔'(威海客棧)이라고 쓴 중국식 이름의 여관만이 이채로운데 그나마 문을 닫았다. 

     

     

    글자가 있는 중간 계단 옆의 '위해객잔'
    중간 철제로 만든 받침 밑에 '龍洞券番 昭和四年六月 修築'의 글자가 있다고 하는데,
    시멘트에 파뭍혔는지 전부 식별이 안 되나 권번(券番)의 글자는 뚜렷하다.
    계단 위 길은 큰 공사로 레벨을 두 번이나 낮췄음에도 여전히 높다.
    그 기생들의 마지막 이야기 '해어화'

     

    이곳의 기생 중에서는 복혜숙·이화자·이화중선·유신방 등과 같은 유명 예술인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 장일타홍(張一朶紅)으로, 1935년 8월호 <삼천리> 잡지에는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컬럼비아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이다. 음반 10장 분량에 해당하는 많은 수로서, 고향이 인천이라 그런지 경기민요가 많다. 그녀는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는데,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공연인 ‘전조선 순례 음악회’ 에도 참가하는 등 상당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40년 3월의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고, 이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일타홍과 신고산타령이 수록된 앨범

     

    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인천 권번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다. 그녀는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데뷔하였으며 신민요 스타일의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8년 '꼴망태목동'과 1940년 '화류춘몽(花柳春夢)', '살랑 춘풍(春風)', '어머님 전 상서'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유명가수로의 명성을 누렸으나, 아편에 손을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30대의 나이로 쓸쓸히 졸(卒)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많은 이화자 노래모음

     

    소성권번이 있던 인현동 용동 큰 우물 부근에는 기생들이 운영하는 작은 술집들도 성업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지역 학교시설 마련과 이재민돕기운동(나아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돈을 모아 쾌척하기도 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구 술집들은 인천 미두장의 경기가 쇠퇴하며 따라 사라졌지만, 동인천 역세권에 힘입어 일대의 상권은 오랫동안 번창 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옛 같지 않다. 이 길에 대학생들이 미어터지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기로 유명했던 용동 큰 우물 / 그 터가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현판 글씨는 동정(東庭) 박세림이 썼다. / 동정은 강화 출신의서예가로 시암(是菴) 배길이에 사사했다.,
    용동 큰 우물 옆에 미학자 고유섭의 생가가 있었다.
    근방 우현로의 스카이라인 / 길이름은 고유섭의 호 '우현'을 따 명명됐다.
    우물 앞 주차장 옆 건물의 굴뚝은 여전히 용도를 알 수 없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