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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송도 신도시와 일본 순양함 마츠시마호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11. 00:10

     

    일제가 1923년부터 시작한 인천 월미도 관광단지 조성 사업은 서울의 놀이공원 창경원 조성사업과 더불어 빅 히트를 쳤다. 일제는 먼저 히트한 창경원을 흉내내 월미도에도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만들었고 특성에 만든 유락시설을 꾸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해수탕 '아사유(潮湯)'였는데 이 해수탕은 일반적인 바닷물이 아니라 바닷가 지하 암반층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한 것으로써, 물속의 각종 미네랄이 몸에 유익하다는 소문이 나며 전국 각지의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더불어 길이 50m의 해변 풀장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

     

     

    유명했던 월미도 조탕(아사유)
    아사유의 다른 사진
    역시 유명했던 월미도 해변 풀장
    1920년대 월미도 유원지 항공사진 / 조탕 굴똑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

     

    관광객들이 몰리자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0년 4월 경인선에 인천행 특별 임시열차를 운행하기도 했으며, 서구식 무대장치를 갖춘 연무장과 호텔, 요정들이 속속 들어선 월미도는 원산 명사십리, 부산 해운대 등의 유명 관광지를 밀어내고 전국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했다. 전에 보지 못한 해안의 불빛 야경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였으니,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월미도의 영화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며 급속히 가라앉았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월미도에 군함 저탄장(석탄창고)과 기름 저장탱크 등을 만들었고, 유락시설이 군사 목적으로 쓰이면서 월미도는 더 이상  휴양지가 될 수 없었다. 대신 그 기능을 송도가 대신하게 되었으니 인천 관광산업의 축은 1937년 개통된 수인선을 따라 송도유원지로 옮겨졌다. 송도유원지에는 수위조절이 가능한 수문개폐식 인공 해수욕장이 조성됐고 기타 유락시설이 줄지어 들어섰다.

     

    그렇지만 송도유원지 역시 제2차세계대전이 격화되며 경기가 급랭 됐고 이에 일제가 계획했던 송도종합휴양지 개발사업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계획을 대한민국 정부가 이었으니 송도유원지는 1961년 11월 국가지정 관광지가 되며 다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인천시도 명성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72년 유원지 일대 4만3천554㎡를 매립해 조성한 인공해변에 모래를 붓고, 오락시설과 방갈로, 보트장, 기타 해수욕 편의시설을 갖춘 현대식 놀이공원을 조성했다.

     

     

    1960년대 송도해수욕장 항공사진
    송도유원지의 상징이었던 아암도
    1990년대 송도해수욕장 전경

     

    그러나 80~90년대 들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전국에 관광지 개발 붐이 일며 송도유원지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줄어든 관광객으로 인해 놀이동산 시설 등에서 적자가 이어지자 2011년 결국 폐장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부터 따지자면 72년 만의 폐장이었다. (세월은 돌고 도는 것인지 이후로 다시 월미도가 놀이공원으로 부활해 성업 중이고, 송도에는 신도시가 들어서 마치 홍콩 스카이라인을 보는듯하다)

     

     

    '인천 송도유원지, 72년 만에 폐장'의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2011년 8월 31일 KBS 뉴스 캡처 사진
    2022년 송도 국제신도시의 야경


    송도의 명성은 (유원지) 다리 너머의 송도 국제신도시가 이었다. 그곳에는 21세기에 건립된, 전에 볼 수 없었던 초현대식 공법의 빌딩들이 마천루를 형성하며 밤에도 불야성을 이룬다. 그리고 그 명칭은 여전히 '송도'다. 과거 일본인들이 인천에 송도유원지를 만들 때도 이곳은 지금처럼 섬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대에는 소나무가 많지도 않았으니 드문드문 굽은 해송(海松)이 바다를 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섬도 아니고 소나무도 드문 이곳은 왜 송도라는 명칭이 붙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아래 「송도(松島)」라고 이름 붙여진 군함 사진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다만 이 배의 이름은 「마츠시마」라고 읽어야 한다.

     

     

    '제국군함 마츠시마'

     

    마츠시마함(松島艦)에 대해서는 많은 인터넷 사전에서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중 일어판 <위키피아> 의 서두를 번역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마쯔시마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의 방호순양함이다. 1892년 4월 5일 준공돼 제1종에 편입되었고 1898년 3월 21일  2등순양함으로 분류되었다. 청나라가 보유한 전함 「진원(鎮遠)」과「定遠(정원)」 2척에 대항하기 위한 군함으로 건조되었다. 산케에칸(三景艦) 중의 하나이며, 청일전쟁 때 연합함대의 기함(旗艦)이었다. 동형의 배로는 이츠쿠시마(厳島)와 하시다테(橋立)가 있다.

     

    松島(まつしま)、日清戦争及び日露戦争で活躍した日本海軍の防護巡洋艦である。1892年4月5日、竣工し第一種に編入。1898年3月21日、二等巡洋艦に類別された。 清国が保有していた戦艦「 鎮遠」と「定遠」の2隻に対抗する軍艦として建造された、松島型(三景艦)のネームシップ。日清戦争時の連合艦隊旗艦である。同型艦は厳島、橋立。

     

    <위키피아> 일어판에 실린 마츠시마함
    <위키피아> 한국어판에 실린 마츠시마함

     

    마츠시마는 전함이 아니었음에도 꽤 유명한 함선이었는지 그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주포로 사용된 13인치의 카네 건도 반드시 소개된다. 그리고 그 배가 산케에칸(三景艦, 세 가지 경치의 배 )으로 불리는 이유도 찾을 수 있는데, 일본의 3대 절경으로 유명한 미야기현의 마츠시마(松島), 교토의 하시다테(橋立), 히로시마의 이츠쿠시마(厳島)의 이름을 붙인 3대의 전함이 같은 설계도로써 제작된 이른바 네임쉽(name ship)의 선박이기 때문이다.  

     

     

    마츠시마함의 주포인 38 구경 단장포(単装砲)
    마츠시마함과 승무원
    마츠시마함과 전투를 그린 그림

     

    결론을 말하자면 인천 송도는 마츠시마함이 청일전쟁 당시 인천에 정박해 있을 때 그 이름을 따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는 군함 이름이 차용된 다른 지명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를 테면 삼립정(三笠町, 삼산동) · 천간정(淺間町, 가좌동) · 부도정(敷島町, 선화동) · 천대전정(千代田町, 가정동) · 운양정(雲揚町, 백석동) · 낭속정(浪速町, 서창동) · 미생정(彌生町, 선린동) 등으로, 군함 이름의 가진 인천의 동명(洞名)은 무려 14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 전함 미가사(三笠)호
    군항(軍港) 요코스카에 보존된 미가사호와 도고 헤이하지로 제독의 동상

     

    그 외도 육군대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나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딴 천상정(川上町, 청천동)과 이등정(伊藤町, 구산동), 초대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의 이름을 딴 화방정(花房町, 북성동) 등 인명에서 비롯된 동네 이름도 수없이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정리된 상태다. 그렇지만 아직도 몇 곳은 남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송도이다. 그 송도는 이제 국제도시가 되었으니 지우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허~ . 마츠시마는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할까....? 

     

    이것은 그저 우스개로 여길 일은 아니니 일본인들의 전함 마츠시마에 관한 기억은 특별하다. 우선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1894년(명치 27) 9월 17일, 우리 일본국의 연합함대는 청나라 북양함대를 서해 북부 압록강 입구까지 추격해 격파하여 서해북부의 제해권을 획득하였으며 이로써 한반도 북쪽에서 일어난 육지 전투에서의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청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여기에는 일본 해군발전의 계기가 된 청일전쟁 서해해전에서 활약한 마츠시마함을 비롯한 주력 함선의 영향이 컸던 바, 과거를 추억하게 해준다.

     

    1894年(明治27)9月17日、が国の連合艦隊は、清国の北洋艦隊を黄海北部の鴨緑江口に追い求め、これを撃破して黄海北部の制海権を獲得し、陸戦場(北鮮)に対する敵の海上補給路を断つことにより、日清戦争を有利に導いた。ここでは、日本海軍発展の契機となった日清戦争黄海海戦(英語名the Battle of the Yalu)で活躍した主力の艦影をかかげ、往時を偲びたいと思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잊지 않는다.

     

    명치유신 후의 혼란의 시기를 지나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물결이 이는 가운데 일본은 국토방위와 해외진출을 위하여 한반도를 생명선으로 하는 국가전략을 세웠다. 이에 대립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해왔던 청나라였으니 차제에 일·청 양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인식되어졌다.

     

    明治維新 後の混乱の時期を過ぎると、世界的な 帝国主義 の波の中で、日本は国土防衛と海外進出のために朝鮮半島を生命線とする国家戦略を立てていた。これに対立するのが歴史的に 朝鮮の 宗主国 をもって任じていた清国であり、次第に日清両国の衝突は避けられないものと認識されるようになった。

     

    그런데 마츠시마호는 전역 후인 1908년 원양 실습 항해에 나섰다가 배가 폭파하여 승무원의 반 수가 목숨을 잃었기에, 일본인들의 이 배에 관한 기억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마츠시마(松島)는 청일전쟁 당시 연합함대의 전함이었다. 전역 후 마츠시마는 하시다테(橋立), 이츠쿠시마(厳島)의 삼경함은 함께 원양 연습항해에 참가했다. 메이지 41년 1월 25일 요코스카항을 출항한 마츠시마는 동남아시아, 인도 방면을 돌아오다 대만 마공요항에 기항하여 정박 중이던 4월 30일 오전 4시 8분경 화약고가 폭발하여 순식간에 침몰하였다. 순국자는 함장 이하 221명(승무원의 약 반수, 사관생도 중 살아남은 자는 포대장 1명뿐 소위 후보생은 57명 중 33명이 순직)이었다.  

     

    松島は日清戦争時の連合艦隊戦艦であった。戦役後は橋立、巌島と三景艦揃って遠洋練習航海に参加していた。明治41年1月25日横須賀を出港し、東南アジア、インド洋方面を廻っての帰途、台湾馬公要港に寄港し停泊中の4月30日の午前4時8分頃火薬庫が爆発し、瞬時にして沈没した。殉難者は艦長・副長以下221名(乗員の約半数、士官で助かったのは砲術長1名のみ、少尉候補生は57名中33名が殉職)である

     

     

    침몰된 마츠시마호
    사세보(佐世保) 해군묘지의 '군함 마츠시마 순국자비'
    대만 기항지에 세워진 위령비
    마츠시마함 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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