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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남은 일본사찰의 흔적 해광사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16. 01:06
개항 이듬해인 1877년, 일본 정토진종 오타니(大谷)파의 조선 상륙 이래로 구한말 불어닥친 일본불교 러시에 대해서는 서울 묘심사를 말할 때 잠시 썰을 풀었다. 말한 그대로 그들의 러시 배경에는 종교다운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의 현실이 있었다. 500년 이상 탄압을 받은 불교는 당시 겨우 명백만 남았던 상태였고 오직 무속류의 미신만이 조선의 신앙으로서 설쳐댔으니 일본 승려들이 조선에 올바른 종교를 심어주겠다며 호기를 부릴만했다.
그들이 처음 한반도에 집입했을 때의 상황을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침투에 따른 사원의 건립과 건축특성 개관> (부산대학교 박사과정 김윤정 외 2인/ 건축역사연구 제21권)이란 논문을 통해 접한 바 있다. 부산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 연구생과 부산대 교수 두 분의 공동저작이었는데, 불교 일반론에 관한 것은 아니고 불교건축에 관한 논문이었다. 흐린 기억 속에 논문을 겨우 다시 찾아 그 초두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일본불교계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의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활동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청일전쟁 당시 대곡파 동본원사파, 일련종, 정토종, 대곡파 서본원사파 등은 종군승을 파견함으로써 세력 확장을 꾀하였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조동종, 임제종, 진언종 등 각 종파에 의한 별원 및 포교소 개설이 한층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 1911년까지 진종, 정토종, 일련종, 조동종, 진언종, 임제종 등 6개 종파에 의해 전국에 설립된 별원과 포교소는 167개소에 달했다.
특히, 최초로 한국포교를 실시한 정토진종 대곡파의 경우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건립한 데 이어 원산, 인천, 서울 등지에 별원과 포교소, 출장소를 지속적으로 건립해 나갔다. 1877년에서 1920년까지 전국에 건립된 포교와 관련한 시설은 65개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34개소가 한일병합 전후(1908~1910)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당시 일본인의 이주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 교세도 확장일로여서 해방 직후미군정에서 집계한 이른바 적산사찰의 수만 해도 1천여 개에 달했다. 이때 집계되지 않은 사원을 감안하면 실제 사원의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수치는 일제강점기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명찰의 승려들이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방문하여 담화 후 일본승려들로부터 정토진종의 중심적 교의인 『眞宗敎旨』를 증여받았다거나, 승려는 물론 학자, 관리, 상인, 서민 등 다방면에 걸친 방문자와 구도자가 있었다는 기록 등은 당시 일본불교의 침투 양상과 그에 대한 한국불교계 일각의 호의적인 입장을 시사해 준다.
일본불교의 포교가 일본정부의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입장과 강하게 결부되어 한국불교를 예속화하려는 양상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설치된 통감부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일본 종교의 한국 포교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동시에, 일본사원이 한국사찰을 말사로 편입시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관리청원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전국의 많은 사찰이 관리청원을 신청하였는데 1911년 <사찰령> 이공 포되기까지 약 120여 개의 한국사찰이 일본사원에 관리청원을 신청했다.
위 논문의 내용에서 보듯 일제강점기의 일본불교는 상당한 성세(盛世)를 누렸으니, 실제로 내가 살던 서울 동네에도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 존재했었다. (그 절 문 앞에 놓인 뿔 달린 동자승 같은 모양새의 화강암 조각상이 무척 귀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일본불교의 존재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그 많던 사찰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한국불교에서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써 보존해 온 군산 동국사 정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단시간에 내에 거둘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억압의 방법은 탄압이지만, 한국 내에서 일본불교를 탄압했던 흔적은 없다.
이 같은 특이한 현상에 대해 최근 <조선잡기>에서 답을 찾았다. 앞서도 소개한 바 있는 이 책의 저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는 19세기말 일본의 강경파들이 주장했던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반도와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일환으로써 조선에 건너와 전국을 돌며 이것저것을 정탐한 후 그 본 것을 기록했는데, <조선잡기>는 1984년 그것들을 한 데 묶어 간행한 책이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소(예수교)의 선교사들은 파도 건너 만리의 이향(離鄕)을 마다하지 않고 조선에 와서 으레 열심히 하는 것을 안다. 그 포교도 열심히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야소 선교사가 조선에서 원망을 받은 것은 있지만 하나의 은덕도 받은 것이 없다. 그리하여 게으르지 않고 싫증 내지 않고 순순하여 어리석은 한국사람을 개발하는 데 열심히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어찌 크게 믿는 바가 없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의 불교도로서, 그 교법이 조선에서부터 건너와 대역사, 대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이 오늘날 무(無)종교, 무(無)도덕의 파도에 출몰하는 것을 보고도 막연히 손을 놓고 있다. 저들의 생사를 도외시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인가. 우리나라의 승려들이 자비심이 없다면 그만이다. 만일 보답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법고(法鼓)를 울리고 일어나, 홀로 예수교도처럼, 또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조선에 가게 하라. 저 십자군이 일어나 성전(聖戰)을 일으켜 이교도의 손에서 벗어나게 한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불교의 본국은 드디어 예수교가 점유하는 곳이 되려고 한다. 승려된 자 어찌 법당(法幢)을 치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그것을 조선에 주재하는 우리 승려들을 보면, 어느 한 사람 예수교 선교사와 같이 열심히 하는 자가 없다. 조선에 와 있는 우리나라의 승려는 실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승려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한국어에 정통한 자가 있는가. 한국말을 연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내지(內地)에서 포교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나는 다만 그들의 거류지인들이 죽었을 때, 관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아아, 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부처가 만일 이것을 듣고 있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우리나라의 승려는 분발하여 그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맹전진하여 수련하고, 한편으로는 (예수교 선교사처럼) 의술을 배워 내지 각처에 파견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약을 베풀고, 모르는 사이에 부처의 공덕에 젖게 해야 한다. 아울러 (예수교 선교사처럼) 빈민학교를 세우고 오로지 빈민의 교육에 종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유능한 승려를 조선에 유학시켜 그 지덕(智德)을 연마시킨다면 일본불교는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조선의 불교가 흥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승려가 분발하여 그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승려의 책임이다. 무릇 불도(佛徒)는 운연과안(雲煙過眼, 그름이나 연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기억에 남지 않음)하지 말고 분발하라.
이상은 혼마 규스케가 <조선잡기>에 '조선에 있는 일본인 승려'라는 소제목으로 쓴 글이다. 그는 조선 내의 일본불교가 외적 성장에만 치우쳐 진정한 불도는 멀리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교 선교사에 밀리는 것이라며, 그들의 조선 포교 방법론까지 흉내 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종교인으로서 진정성으로, 오히려 과거에 그랬듯이 일본승려들이 조선에서 불교의 지혜와 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불교사찰의 흔적을 지금도 간간히 볼 수 있는 것은 그 외적 성장의 흔적일 뿐, 일본불교가 조선에 내린 뿌리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위 혼마 규스케의 글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천시 신흥동에서 만난 해광사는 색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제강점기 일본불교 조동종에서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건립했던 사찰인 까닭이다. 해방 후 인천의 많은 일본식 사찰이 폐사되었지만 이 절은 꿋꿋이 살아남아 어두웠던 과거를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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