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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해관 라포르트와 오례당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17. 01:50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일본과 역사적인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지만 12개 조항의 조약문에는 수출입 화물의 관세를 규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6개월 뒤에 체결된 ‘조일무역규칙’에서도 관세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조선이 아무것도 모르는 깜깜이의 나라였으므로 일본이 관세에 대한 관계 규정을 일부러 누락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줄곧 조선에 대한 수출입 화물에 1원의 관세도 지불하지 않는 공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뒤늦게 무언가 억울함을 눈치챈 조선은 2차 수신사(1880년 7월 6일 도쿄 도착)의 대표로 간 김홍집이 ‘조일무역규칙’에 관한 개정을 요구했지만 일본측의 다음 한 마디에 소득 없이 물러서야 했다.
"좋소. 그런데 당신, 초안은 작성해 왔소? 그리고 전권대사증은 있소?"
국제법상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의 제정과 개정은 국왕이나 대통령 같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칙임을 가진 자에 한해 처리될 수 있었다. 즉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전권대사였던 신헌은 가능한 일이었으나, 따로 칙임서류도, 초안도 챙기지 않은 1880년의 김홍집은 여러 가지로 미달이었다. 이후로도 일본은 이 핑계 저 핑계로, 혹은 강압으로 관세법 개정을 미뤘지만 국제법에 깜깜했던 조선으로서는 판판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이 1882년5월에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11월에는 청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며 관세에 대한 규정이 적용되자 일본도 꼼짝없이 관세를 물어야 했다. 무엇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규정돼 있는 「사치품 30% 일용품 1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이 근거가 됐다. 조선측은 이 조약문의 내용을 근거로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1883년 벽두부터 일본과 조일관세 협상을 서둘러 7월에 ‘조일통상장정’을 조인하였다. 개항 후 무려 7년 만의 관세권 회복이었다. 그리고 즈음하여 인천항이 개항장이 되었고, 또 그해 청나라 이홍장이 천거한 독일인 통상외교 전문가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세관 일을 맡으면서 세계 각국의 어느 나라도 관세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 I -갑신정변')
묄렌도르프는 이미 중국에서 관세의 유용함과 그 수익이 국제경제에 막대한 보탬이 됨을 익히 경험했다. (당시 청나라 관세청장이었던 영국인 로버트 하트는 엄격하고 정확한 관세 관리로써 청나라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그는 1883년 민영익과 함께 중국으로 출장을 가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을 포함한 13명의 해관원(세관원)을 직접 선발해 데려오고 10명을 예비 엔트리에 넣었다.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노르웨이, 미국·중국·일본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1883년 6월 16일 제물포 해안에 도착한 청나라 배 직례(直隸)호에서 이들 외국인 13명이 내렸다. (일본은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지 이 외국인들이 해안에 상륙하던 상황과 모습이 제물포 주재 일본 영사가 본국에 보낸 동향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들은 서울 박동 총해관(지금의 종로구 수송공원 자리)과 인천, 원산, 부산해관에 분산 배치되어 업무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들의 손에 의해 1883년 6월 16일 인천해관, 6월 17일 원산해관, 7월 3일 부산해관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인천의 해관장은 영국인 스트리플링이 임명되었다.
오늘 말하려는 라포르트(E. Laporte)는 1883년 6월 16일부터 22년을 장기 근무하다 1905년 5월 퇴임한 사람으로 인천해관의 7대 해관장을 지냈다. 라포르트는 1899년에 부산 해관장 서리직을 일시 맡은 것 외에 인천해관에서 근속했는데, 그가 인천에 살던 집이 '해관장 집'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까지 존재했었다. 그는 1883년 인천해관 스트리플링의 봉변(보좌관)으로 시작해 적어도 1905년까지 22년 넘게 인천에서 살았다.
라포르트는 초장기에 인천에 자리한 때문인지 가장 좋은 장소를 골라 집을 지었다. 하지만 사업가가 아닌 봉급쟁이인 까닭에 (물론 봉급은 적지 않았지만) 대저택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담한 벽돌집을 지어 살았는데, 다만 전망만큼은 최고였으니 현재 그의 집 터에 자리한 인천제일교회 마당에서 보는 뷰는 그 앞에 많은 건물이 들어선 지금에도 장쾌하다. (인천제일교회 마당이 라포르트의 집 마당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번외의 얘기지만, 그는 1899년 6월 부산 해관의 해관장 서리로 재직할 때, 대한제국 해관 총세무사 브라운(J. M. Brown)의 명령으로 울릉도에 관한 일체의 것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 독도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보고서에 의거 1899년 9월 23일자 《황성신문》 별보(別報)에 보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브라운이 따로 본국 영국에 보낸 라포르트 보고서의 전문이 2014년 발견됐다)
"울진(蔚珍)의 동쪽바다(東海)에 일도(一島)가 있으니(有니) 이른바(曰) 울릉이라. 그에 부속(其附屬)한 작은 6개의 섬 중(小六島中)에 가장 두드러진 것(最著者)은 우산도(于山島=독도) 죽도(竹島)니…"
라포르트 주택보다 더 주목을 받는 곳은 오례당(吾禮堂, 1843~1912)의 집이다. 라포르트 주택이 있던 인천제일교회 바로 밑에는 현재 동국빌리지가 들어서 있는데, 그 빌라단지 전체 대지에 해당하는 큰 땅에 오례당의 집이 있었다. 오례당은 청나라 사람으로 그 역시 인천해관에 근무했다. 하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이력을 가진 보기 드문 사람으로, 파란만장이나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인생역정을 걸었다.
오례당의 중국 발음은 우리탕이고 분명 인명(人名)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에 집 당(堂)자가 들어가서인지 그의 집 오례당 저택은 오랫동안 '오례당'으로 불렸다. 그의 집은 라포르트 주택과 달리 인천에서 손꼽히는 대저택이었으니 현 자유공원에 위치했던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한미수교백주년 기념탑 자리)과 더불어 최고 저택으로서의 첫째, 둘째를 다투었다.
오례당은 7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포병양성 학교의 프랑스어 교관, 프랑스영사관 통역관, 스페인 주재 청국공사관 서기관 등으로 근무하다 어린 스페인 처녀 아말리아 아마도르(Amalia Amador, 1863~1939)를 만나 결혼을 한다. 이후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오례당은 조선의 해관원 모집에 응해 내한하게 되었다.
그가 언제 한국에 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 역시 묄렌도르프에 뽑혀 초창기에 온 것은 분명하니 1883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견미조선보빙사(遣美朝鮮報聘使)의 수행원 겸 통역관으서 미국에 동행했던 사실로써 알 수 있다. 중국어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두루 능한 오례당을 외무차관 묄렌도르프가 통역관으로 추천했던 것이다.
이후 돌아와 다시 해관원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그는 뜻하지 않은 대박을 맞았다. 그가 프랑스에서 인연을 맺었던 치롤 후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오례당은 더 이상 해관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1890년 해관을 은퇴했으나 한국이 좋았는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천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부동산 투자와 돈놀이를 하며 떵떵거리고 살았으니, 누구든 그를 개항장 최고의 부자로 꼽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아래는 당시 그가 지었던 집이다.
이 집은 오례당이 아내 아말리아의 요구로 송학동 2가 16번지에 지은 독일풍의 주택이다. 건물의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224평이었으며(지하1층 333.0㎡, 지상1층 581.8㎡, 2층 423.1㎡) 높은 축대 위의 2층 베란다에서는 인천항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집은 중국인 건축가가 중세 유럽의 성을 모방해 지었는데, 자주빛 벽돌의 외벽에 지붕은 검은 오석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바다를 향해 티그나무로 짠 널찍한 창을 냈다. (오례당 저택은 1909년 준공 후 얼마 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해 재건축했으며 1911년 12월에 본래의 모습대로 준공됐다)
그는 비교적 호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인이나 일본인과도 허물없이 지냈으며 젊은 스페인 부인 아밀리아는 세상이 알아주는 미인이었고, 혼혈의 딸은 그야말로 말하는 인형이었다. 한마디로 아쉬울 게 없는 부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부족했는지 부인 아밀리아는 인천의 상인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일삼았다. 아밀리아는 이 대저택에 인천에 거주하는 외교관과 외국 사업가들을 초청해 연회와 무도회를 자주 열었지만, 몹시 영악하고 몰인정한 사람으로서 인천 주재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평이 나빴다고 한다.
오례당은 1912년 6월, 6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온 지 30년이 되던 해였다. 그는 수백만 원(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와 아내가 치열한 유산 상속 소송을 벌였다. 집도 처분해 돈을 반분(半分)했지만 재산은 소송 비용으로 다 들어가고 결국 거의 빈손으로 각자의 고향으로 갔다. 그의 집은 1930년대에 일본인 상공회의소 대표였던 요시다히데지로(吉田秀次郞)에게 팔렸다.
오례당 저택은 해방 후 미군 독신자 장교 숙소로 사용되었고 이후 육군방첩대 송학사의 관사가 되었으나 1968년 4월 16일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 오례당 저택이 있던 높은 축대 위에는 현재 동국빌리지가 들어섰다. 오례당의 유택은 인천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마련됐고, 그의 부인 아말리아는 오례당 사후 27년 뒤 스페인에서 죽었으나 시신은 한국으로 와 청학동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묘역에 남편과 함께 안장됐다. (북성동 외국인묘지의 무덤은 1965년 청학동 인천가족공원묘지로 옮겨졌다. 북성동 외국인묘지 자리에는 과거의 어떤 흔적도 남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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