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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던 인천 답동 기행/내리교회·답동성당·묘각사 터·인천신사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22. 00:17
잘 안 알려진 얘기고, 잘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구한말에는 서양 기독교뿐 아니라 일본불교도 포교를 위해 대거 바다를 건너왔다. 이 때문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한 지역, 특히 인천은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외국 종교와 종파가 들어와 붐볐는데,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감리교, 프랑스의 천주교, 일본불교가 성세였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동시에 들어왔음에도 유독 감리교만을 지목함은 당시 두 사람의 약속으로 선교지를 분할한 때문이니, 인천은 감리교 선교 지역이었다. (인천의 장로교는 이후 60년이 지나 들어온다)
▼ 내리교회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답동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한다. 옛 답동은 지금의 신포동, 신흥동, 율목동에 일대에 두루 걸쳐 있었는데, 우뚝한 답동성당이 사라져가는 이름을 굳건히 붙들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데라마찌(寺町)라 불렀다. 일본들이 많이 살았던 이 동네에 1899년 일본불교 진종에서 설립한 동본원사(東本願寺)를 비롯해 일련종의 묘각사(妙覺寺), 정토종의 인천사, 조동종의 화엄사 등의 절이 들어섰던 까닭이다. 지금의 송도중학교 자리에 명조사(明照寺), 서본원사(西本願寺)도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구한말의 이방의 종교들이 비교적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조선에 종교다운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사벨 비숍 여사는 당대 조선의 미개했던 그 어떤 환경보다 조선의 토속신앙, 즉 미신에 질겁을 했다. 그녀가 본 조선의 미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조선의 종교로서, 조선 사람들은 늘 귀신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일반적 사고로써 "당시 조선사회는 유교와 불교가 이끌지 않았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으나 당시 육영공원 교사로 와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렀던 길모어(George W. Gilmore)가 본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아래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쓴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s)>라는 책의 한 장이다.
한반도의 문학과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조선의 종교가 유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가장 낮은 농부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유교의 율법을 지킨다. 위패나 무덤 앞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그들 모두가 실천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언뜻 보아 의무라고 볼 수 있다. 한 해의 특정한 날에 왜 그들이 조상의 위패나 무덤에 가고 제물을 바치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의 조상은 자손을 악으로 이끌 수도 있으며 그 때문에 그 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생활에서 조상의 적극적인 은혜를 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본다.
"조상에게 삶의 매개가 되어줄 것을 탄원합니까?"
그러면 관리나 농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답한다.
"아니오. 우리는 악을 염려하지도 않고 선을 열망하지도 않소. 그것이 법이며 관습이기에 때문에 지킬 뿐이라오."
우리는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의지를 통제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생활을 통제하는 원동력이 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가 쇠퇴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오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관습에 대한 의무적인 추종일 뿐이다.
물론 유교가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왕관의 보석과 같은 가치의 효성은 조선에서 가장 큰 덕목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노인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을지라도 그들의 말을 늘 존중한다. 유교는 국가의 틀을 형성해왔다. 그래서 기아와 역병이 만연한 때면 왕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늘에 기원한다.
지난 날 이 나라 전역에서 부처를 숭배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 불교가 금기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도들은 거의 없다. 사실상 몇몇 성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승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봉사의 댓가로 왕으로부터 사전(寺田)을 받았다. 길을 따라 여기저기 자리 잡은 조그만 암자를 돌보는 수도승들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사람들에게 탁발을 함으로써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불완전하거나 불구도 아니면서 머리를 삭발한 것 외에는 성직자나 수도승에게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불교의 어떤 중도 도시에 들어올 수 없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중이 성안에서 발견되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안에는 절이 없다. 다만 서울에서 10마일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요새를 방문한 사람은 그곳에서 많은 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염불을 중얼거리면서 굉장히 낡은 절에 몰려 있다.
그들은 어떠한 군사적·종교적 의무도 수행하지 않으며 머리를 삭발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그들에게 질문을 해보면 그들은 깊은 확신이나 종교적 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주는 쌀로 그러한 모습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의 진정한 불제자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방문객들이 중들에게 연민을 띤 말투로 비웃음과 냉소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중은 결코 남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에 대한 보완적인 모습으로서 주목할 만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다양한 능력과 성격을 갖는 온갖 잡신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런 것들이 평화를 파괴하고 번영을 쇠퇴하게 만드는 악마가 도시에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버린다. 1886년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나는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는 콜레라 귀신이 그 거리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병들게 하지 못하게 하는 주문이 새겨진 부적과, 그것을 이어놓은 끈이 비교적 좁은 길에 가로질러 뻗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조선 사람은 미신을 매우 믿는다. 서구인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져 있거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도 그들은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귀신 들린 재물에 대한 믿음은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믿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가 커짐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무당과 지관은 귀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 병을 몸에서 몰아내면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핑계를 가장 평범한 병에서 찾는다.
이 나라를 돌아다녀보면 꽹과리의 소음이 들리는 곳에서는 그 푸닥거리의 결과를 알기 위해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집 주위에 모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푸닥거리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귀신이 그 집에 들어와 가족 가운데 한 명이 병든 것을 알게 된다. 일주일 밤낮을 계속 굿을 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두드리는 꽹과리 소리에 환자의 신경이 아주 지쳐버려 죽음의 결과가 오든지 아니면 스스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된다.
좋은 영혼, 나쁜 영혼, 나쁜 귀신, 좋은 귀신, 친절한 요정, 나쁜 요정들은 언덕 위나 골짜기, 바위 틈새나 구석 또는 속 빈 고목이나 감쪽같이 감춰진 동굴 속에 많이 있다. 생활 속의 모든 사건이 그 귀신들의 간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국민 경제 활동에 운명이 작용한다.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특효약은 상당히 많은데 어떤 병은 요정이나 악마의 보살핌으로 낫기도 하고 그들의 악의로 발병한다.
이상의 길모어의 글은 냉철하고 냉정하다. 당대의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당대의 조선사람들은 '헬 조선'의 현실에도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현실의 희망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세에의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세의 평안과 행복은 종교가 가진 커다란 덕목 중의 하나이겠으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불확실한 희망마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이러했던 바, 개항장에 이국의 종교가 몰려듦은 차라리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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