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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던 인천 답동 기행/내리교회·답동성당·묘각사 터·인천신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22. 00:17

     

    잘 안 알려진 얘기고, 잘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구한말에는 서양 기독교뿐 아니라 일본불교도 포교를 위해 대거 바다를 건너왔다. 이 때문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한 지역, 특히 인천은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외국 종교와 종파가 들어와 붐볐는데,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감리교, 프랑스의 천주교, 일본불교가 성세였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동시에 들어왔음에도 유독 감리교만을 지목함은 당시 두 사람의 약속으로 선교지를 분할한 때문이니, 인천은 감리교 선교 지역이었다. (인천의 장로교는 이후 60년이 지나 들어온다)

     

     

    답동 인천내리교회
    2012년 복원된 웨슬리 예배당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안내문 / 지금 곤란한 처지의 송영길이 인천시장으로 있을 때 한 일이다.
    내리교회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말해주는 머릿돌 / 화초에 가려 안 보이나 'AD 1901'이라고 새겨진 머릿돌도 있다.
    근방의 오래된 골목길 / 낙서도 특별하다.
    내리교회 김기범 목사상 / 김기범(1869~1920)은 내리교회가 배출한 첫 한국인 개신교 목사이다.

     

    ▼ 내리교회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1885년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언드우드와 아펜젤러는 원래 18

    kibaek.tistory.com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송학동 인천제일교회 / 이 건물은 1968~69년 정림건축이 맡아 지었다. 구한말 해관장(세관장)이던 라포르트의 집 자리에 지어졌다.
    홍예문로 옛 성공회 성미카엘성당 자리에서 본 인천제일교회
    인천제일교회에서 본 인천항과 월미도

     

    답동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한다. 옛 답동은 지금의 신포동, 신흥동, 율목동에 일대에 두루 걸쳐 있었는데, 우뚝한 답동성당이 사라져가는 이름을 굳건히 붙들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데라마찌(寺町)라 불렀다. 일본들이 많이 살았던 이 동네에 1899년 일본불교 진종에서 설립한 동본원사(東本願寺)를 비롯해 일련종의 묘각사(妙覺寺), 정토종의 인천사, 조동종의 화엄사 등의 절이 들어섰던 까닭이다. 지금의 송도중학교 자리에 명조사(明照寺), 서본원사(西本願寺)도 있었다. 

     

     

    답동성당 / 입구에 선 3개의 표석이 역사를 대변한다.
    또 이런 표석도 있다. / 헌데 이게 맞남? 가장 오래된 성당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아녀?(1893년 완공)
    답동에는 이런 표지판도 ^^
    답동 우리은행 인천지점 건물

     

    앞서도 말했지만 구한말의 이방의 종교들이 비교적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조선에 종교다운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사벨 비숍 여사는 당대 조선의 미개했던 그 어떤 환경보다 조선의 토속신앙, 즉 미신에 질겁을 했다. 그녀가 본 조선의 미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조선의 종교로서, 조선 사람들은 늘 귀신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일반적 사고로써 "당시 조선사회는 유교와 불교가 이끌지 않았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으나 당시 육영공원 교사로 와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렀던 길모어(George W. Gilmore)가 본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아래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쓴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s)>라는 책의 한 장이다.  

     

    한반도의 문학과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조선의 종교가 유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 그렇다. 가장 낮은 농부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유교의 율법을 지킨다. 위패나 무덤 앞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그들 모두가 실천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언뜻 보아 의무라고 볼 수 있다. 한 해의 특정한 날에 왜 그들이 조상의 위패나 무덤에 가고 제물을 바치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의 조상은 자손을 악으로 이끌 수도 있으며 그 때문에 그 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생활에서 조상의 적극적인 은혜를 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본다.

    "조상에게 삶의 매개가 되어줄 것을 탄원합니까?"

     

    그러면 관리나 농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답한다. 

    "아니오. 우리는 악을 염려하지도 않고 선을 열망하지도 않소. 그것이 법이며 관습이기에 때문에 지킬 뿐이라오."

     

    우리는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의지를 통제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생활을 통제하는 원동력이 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가 쇠퇴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오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관습에 대한 의무적인 추종일 뿐이다.

     

    물론 유교가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왕관의 보석과 같은 가치의 효성은 조선에서 가장 큰 덕목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노인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을지라도 그들의 말을 늘 존중한다. 유교는 국가의 틀을 형성해왔다. 그래서 기아와 역병이 만연한 때면 왕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늘에 기원한다.

     

    지난 날 이 나라 전역에서 부처를 숭배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 불교가 금기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도들은 거의 없다. 사실상 몇몇 성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승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봉사의 댓가로 왕으로부터 사전(寺田)을 받았다. 길을 따라 여기저기 자리 잡은 조그만 암자를 돌보는 수도승들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사람들에게 탁발을 함으로써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불완전하거나 불구도 아니면서 머리를 삭발한 것 외에는 성직자나 수도승에게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불교의 어떤 중도 도시에 들어올 수 없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중이 성안에서 발견되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안에는 절이 없다. 다만 서울에서 10마일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요새를 방문한 사람은 그곳에서 많은 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염불을 중얼거리면서 굉장히 낡은 절에 몰려 있다.

     

    그들은 어떠한 군사적·종교적 의무도 수행하지 않으며 머리를 삭발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그들에게 질문을 해보면 그들은 깊은 확신이나 종교적 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주는 쌀로 그러한 모습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의 진정한 불제자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방문객들이 중들에게 연민을 띤 말투로 비웃음과 냉소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중은 결코 남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에 대한 보완적인 모습으로서 주목할 만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다양한 능력과 성격을 갖는 온갖 잡신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런 것들이 평화를 파괴하고 번영을 쇠퇴하게 만드는 악마가 도시에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버린다. 1886년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나는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는 콜레라 귀신이 그 거리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병들게 하지 못하게 하는 주문이 새겨진 부적과, 그것을 이어놓은 끈이 비교적 좁은 길에 가로질러 뻗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조선 사람은 미신을 매우 믿는다. 서구인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져 있거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도 그들은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귀신 들린 재물에 대한 믿음은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믿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가 커짐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무당과 지관은 귀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 병을 몸에서 몰아내면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핑계를 가장 평범한 병에서 찾는다.

     

    이 나라를 돌아다녀보면 꽹과리의 소음이 들리는 곳에서는 그 푸닥거리의 결과를 알기 위해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집 주위에 모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푸닥거리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귀신이 그 집에 들어와 가족 가운데 한 명이 병든 것을 알게 된다. 일주일 밤낮을 계속 굿을 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두드리는 꽹과리 소리에 환자의 신경이 아주 지쳐버려 죽음의 결과가 오든지 아니면 스스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된다.

     

    좋은 영혼, 나쁜 영혼, 나쁜 귀신, 좋은 귀신, 친절한 요정, 나쁜 요정들은 언덕 위나 골짜기, 바위 틈새나 구석 또는 속 빈 고목이나 감쪽같이 감춰진 동굴 속에 많이 있다. 생활 속의 모든 사건이 그 귀신들의 간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국민 경제 활동에 운명이 작용한다.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특효약은 상당히 많은데 어떤 병은 요정이나 악마의 보살핌으로 낫기도 하고 그들의 악의로 발병한다.

     

    이상의 길모어의 글은 냉철하고 냉정하다. 당대의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당대의 조선사람들은 '헬 조선'의 현실에도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현실의 희망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세에의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세의 평안과 행복은 종교가 가진 커다란 덕목 중의 하나이겠으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불확실한 희망마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이러했던 바, 개항장에 이국의 종교가 몰려듦은 차라리 당연한 결과였다.

     

     

    정면에서 본 답동 주교좌성당 / 1889년(고종 26) 지금의 자리에 부지 3,212평이 마련되어 1896년 396평 고딕양식의 붉은 연와조 성당건물이 완공되었으며 이후 증축이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완공됐다.
    후미 모습 /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양식이며 평면은 라틴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고 적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흰 화강 석재를 의장적(意匠的)으로 써 포인트를 주었다.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중앙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각 꼭대기에 구성된 8각고상부첨탑(八角鼓狀部尖塔)은 처마 밑의 돌림띠 형식 석재 장식과 함께 정면 외관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든다.
    정면 중앙과 양측에 반원형 아치 형식의 출입구를 냈으며 창 둘레와 출입구는 화강석재로 처리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세로 갈 듯 보이는 답동성당의 아치 문
    답동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트위터 사진
    묘각사 계단돌 / 묘각사는 일본 교토에 본산을 둔 일련종(日蓮宗)의 사찰로 1893년 인천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1945년 광복 때까지 활동을 지속했다.
    묘각사 터의 네거티브 문화재 표석 / 예전에 비해 여러가지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감탄!
    이 계단을 올라 묘각사의 본당이 있었으나 이후 송도중학교가 들어서며 앞쪽으로 정문을 내고 뒤쪽으로는 담장을 쌓으며 지금의 모양새가 되었다. 좌측 기둥에 '一蓮宗妙覺寺', 우측 기둥에 '西漸第二道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쪽 기둥에 새겨진 '일련종 묘각사' 글씨
    동쪽 기둥의 '서참제2도량' 글씨 / 일본 교토에 본산을 둔 일련종 묘각사가 조선에서 두 번째로 포교한 도량이라는 의미로 '서잠(西漸) 제2도량'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입구의 난간 돌기둥
    묘각사의 1907년 사진
    묘각사 본당 기단으로 여겨지는 근방 주택가의 축대
    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주변 골목
    대로변 쪽에 송도중학교의 정문이 위치한다.
    근방의 해광사 / 앞서 따로 소개한 바 있는 일본 조동종의 사찰로 1908년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근방에 있는 관계로 재차 사진을 올렸다. 해광사는 인천에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절 문 좌측 기둥에 '대정(大正) 9년 5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대정 9년은 1920년이다.
    우측 기둥에는 시주자 아라이의 이름이 보인다. 좌측 기둥의 '대정(大正) 9년 5월'은 아라이의 시주 날짜로 짐작된다. 대체 시주를 얼마나 많이 했기에....
    창건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해광사 명부전 / 창건시에는 고리(창고)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내의 일본식 불탑 / 뒤로 또다른 고리 건물이 보인다.
    근방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는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있었다. / '신사'는 신도(神道)라는 일본 토속종교에서 비롯된 사원으로 우리에게 신사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대표적 상징물로 여겨지지만, 인천신사는 1890년 답동 거주 일본인에 의한 순수 모금으로 건립됐다.
    정문 계단 / 근자에 새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축대 옆 계단은 아마 그때도 신사의 정문 계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관 앞에 남아 있는 신사 계단과 도리이 기둥의 흔적
    계단 경계석 등 당시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도리이 기둥 옆으로 일본식 석등도 보인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인근 쌈지놀이터 내 일본석등 지붕돌 / 상륜부가 온전한 특이한 케이스다.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었을까? /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인근 주택가 길에서 인천신사의 표지석을 세웠음직한 받침돌도 발견했다. 기타 득템한 게 쏠쏠해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이다. 득템한 것들을 후속편에 올리려 한다.
    답동이 데라마치(寺町)라고 불릴 때의 사진 / 오른쪽 위로 인천신사와 초기 모습의 답동성당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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