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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史蹟)에 비해 덜 알려진 순교터 제물진두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29. 23:39

     
    앞서, 「사람이 말이 너무 많으면 믿음이 안 가듯 '성지'도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성지답지 않아 보인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서울 청계천 전태일기념관 앞 도로에 세워진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석을 지목해서 한 말이다. 그곳은 천주교의 성조(聖祖)라 불리는 광암 이벽의 집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니 어쩌면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 마을에 비견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표석에는 '1784(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李檗, 1754~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 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광암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해도 무방한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친척인 이승훈에게 전도했고 그가 조선 사신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북당(北堂, 북천주당)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접촉하고 가르침을 받아올 것을 지시했다. 이후 이승훈은 정말로 북당을 찾아갔고 1784년 2월,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이 땅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이승훈이 세례받은 북천주당 / 이승훈이 제발로 찾아가 입교하기를 원하자 이곳 성직자들이 기절초풍했다는 얘기는 매우 유명하다.

     
    이승훈이 돌아오자 이벽은 자신의 집에서 거꾸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성직자만이 할 수 있으나 제멋대로 세례를 줌) 이때 남인 계열의 양명학자 권일신과 이승훈의 처남인 정약용도 세례를 받았는데, 이후 수표교 근방에 있던 이벽의 집은 천주교 포교의 근거지가 되었고 교인들의 모임터가 되었다. 청계천 전태일기념관 앞 도로에 표석을 세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안내문이 수표교 위에도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있어 좀 황당하다. 같은 청계천 구역이기는 하지만 두 장소는 걸어서 10여 분 이상 가야 할 정도로 떨어져 있는 까닭이다. 청계천 일대가 전부 이벽의 집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하긴 예수가 자랐다는 이스라엘의 나사렛 마을도 위치를 알 수 없는 마당이니 이벽 집의 위치 정도야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구약성서와 탈무드, 기타 요세푸스의 역사서 등 고대의 어떤 기록에도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약에서도 그저 마리아가 사는 작은 동네라는 것 뿐 위치를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얘기지만 지금 갈릴리 나사렛 마을은 관광객들을 위해 20세기에 급조된 테마 파크에 불과하다. 예수의 마을이 그렇다고 우리도 제멋대로 안내문을 세워서는 곤란할 터, 그럼에도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 성지인가?' 묻고 싶은 '성지 표지판'이 붙은 장소가 허다하다. 
     
     

    나사렛 빌리지
    언뜻 예수시대의 유적 같아 보이지만 20세기 밀려드는 성지순례자와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된 곳이다. 돈벌이를 위함은 아니고, 아무 것도 없음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속촌 같은 곳이다.
    사진은 19세기의 아랍의 어느 마을이다. 학자들은 예수 당시의 나사렛도 이러한 비슷한 형태의 작은 마을일 것이라 추측했고 이를 근거로 나사렛 빌리지가 조성되었다.

     
    순교성지라는 이름이 남발되어 고증 여부가 의심스러운 장소도 있으나, 반면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된 순교지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인천 8부두 근방의 순교터인 제물진두(濟物津頭)이다. 진두는 나루터의 뜻으로서 제물진두는 지금의 신포동과 항동에 걸쳐 있던 포구였다. 이 포구는 1868년 병인박해 때 형장으로 쓰였다. 제물진두가 형장으로 쓰인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서울 한강 양화진두(楊花津頭)를 처형장으로 택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침입에 격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은 서학인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프랑스 함선이 도착했던 서강(西江) 양화진 변의 봉우리인 잠두봉(蠶頭峯)에 형장을 마련해 천주교인들의 처형장소로 쓰도록 지시했다. 이후 수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목이 잘렸던 바, 잠두봉 대신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제물진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선의 기항지였다는 이유로써 처형장으로 선택된 경우였다.  
     
     

    절두산과 절두산순교박물관
    절두산 형장에서 참수된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

     
    제물진두가 형장으로 쓰였다는 내용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형장으로 쓰인 포구가 정확히 어디인지 고증되지 않다가 《병인박해 중 천주교신자 처형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 소고》(김진용/2005년 4월)라는 논문에서 제물진두의 위치가 인천 중구 항동 1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 방향 약 50m 지점이라고 지적되며 처음으로 위치가 추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지속적 연구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인천항 축항사업 이전, 즉 병인박해 당시 순교지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해안선에서 육지 쪽으로 좀 더 들어온 지점이라고 정정했다).
     
    김진용은 박순집의 증언록과 박순집의 이모부 손 넓적이 베드로(1801~1868)의 공초 내용을 근거로, 손 넓적이 베드로와 그의 아내 이씨, 손 넓적이 베드로의 사위 백치문 요한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포졸에게 잡혀 관할인 인천도호부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1868년 4월20일 제물진두에서 처형되었다고 설명했다.
     
     

    절두산 성당의 박순집 베드로 공적비 / 박순집(1830~1911)은 훈련도감의 군인이던 천주교도로 서양인 신부들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의 체포와 처형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한 후 장소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박해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을 것이라고 한다. 박순집은 희생됨이 없이 천수를 누리며 천주교도를 도왔다.

     
    인천 지역의 박해는 1871년 신미양요를 전후하여 다시 일어났으니 1871년 5월 이승훈 베드로의 증손자인 천주교인 이연구와 이균구가 고향인 남양에서 미군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제물진두에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되었다. 또 같은 달에는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이자 이신규의 아들인 이재겸과 그의 부인 정씨 외 이명현, 백용석, 김아지 등이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같은 장소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들이 효수경중된 제물진두는 현재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서있는 그 일대로 보이다. 이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을 앞서 '알렌보다 먼저 상륙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옛 제물진두의 자리라고 추정한 사람들도 있었던 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1가 1-2에 위치한 한중문화관 옆의 제물진두 순교성지 경당 자리를 제물진두로 비정해 2014년 기념경당을 세웠다. 바로 옆으로는 제물진두 순교자 성당이 위치한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경당
    인천역 쪽에서 본 제물진두 순교자 성당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바다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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