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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개항장 거리를 거닐었을 또 다른 외국인들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6. 3. 06:05

     

    인천광역시 부두 인근 옛 개항장 거리는 그야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거리와 골목골목에 잘 알려진 역사와 그렇지 않은 과거들이 얼기설기 엮어 이어져 있다. 우선 인천 역사 여행의 시발점인 인천역 자체가 그러하니, 이곳은 대한민국의 모든 철도역 중에서 가장 오래된 종점역이자 한국 철도의 탄생역이기도 하다. 인천역은 1899년 미국인 모스(J. R. Morse)에 의해 개통된 경인선의 종착역으로서 9월 18일 개통과 함께 업무가 개시된 곳이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60년 9월 17일에 완공된 것으로 건물 자체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 인천역에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 철로를 따라 만석동 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완만한 구릉지대, 지금의 지번으로 북성동 1가 1번지(제물량로 335번길 13)에 개항기 시절 조성된 한국 최초의 외국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외국인 묘지는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되며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청학동 묘지는 2000년대 들어 다시 부평 가족공원묘지로 이전되었지만, 그때 인천에 살다 묻힌 개항 초창기의 사람들은 부평 가족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서 다양한 묘표로써 시대와 더불어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증언한다. 

     

     

    인천역 / 기존의 역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1960년 당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양식의 역사가 건립됐다.
    인천세관 앞의 옛 선로
    상전벽해의 만석동 풍경

     

    그중에서, 수백만 원(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남기고 죽은 중국인 우리탕(吳禮堂)과 빈털터리로 묻힌 그의 스페인 부인 아말리아,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왔다가 갑신정변의 와중에 죽은 오쿠가와 가타로(奧川嘉太郞)와 동생 기이치(義一) 형제, 의료 봉사의 소명을 실천하다 요절한 선교사 랜디스의 안타까운 죽음과 아름다운 무덤, 조선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미국 사업가 타운센트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 '부평 가족공원묘지에 묻힌 다양한 사연의 외국인들 I')

     

     

    부평 가족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의 타운센트 무덤

     

    1883년 6월 16일은 이 땅에 최초로 외국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온 날이었다. 조선정부의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세관 일을 맡을 외국인 전문가들을 중국 상해에서 직접 뽑아 데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관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 세관에 단 한 푼의 관세도 물지 않고 무역을 했다. 그 무렵 조선에는 세관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1882년 5월 미국과 수교를 하며 비로소 관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문에 「사치품에는 30% 일용품에는 1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이 근거가 됐다.  

     

    청나라 이홍장이 깜깜이 나라 조선에 코치와 내정간섭을 겸한 독일인 통상외교 전문가 묄렌도르프를 파견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묄렌도르프는 당시 톈진 주재 독일영사관의 통역관이었는데 이홍장과의 친분으로써 조선의 외교고문이 된 것이었다. 이에 조선정부의 녹봉을 받는 최초의 서양인 관리가 탄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표류나 불법 입국이 아닌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밟은 개국 500년 이래의 첫 서양인이기도 했다. 

     

    묄렌도르프의 정식 직함은 종2품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지금으로 말하면 외교부와 통상산업자원부를 합친 부처의 차관)이었으며, 월급은 해관은화 300량을 받았다. 당시 미국 달러로는 400달러에 이르는 거액으로,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 모든 것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와 같다고 썼다. (육영교사로 왔던 호머 헐버트는 묄렌도르프에 대해  '10 사람의 몫을 한 사람'이라고 썼던 바, 그는 월급 이상의 일을 했다 할 수 있다.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

     

    의욕에 넘친 묄렌도르프는 1883년 초 실권자 민영익과 함께 직접 중국으로 가 조선의 세관 일을 맡을 외국인 전문가들의 면접을 보고 그중의 13명을 데려왔다. 렌도르프가 이들을 데려온 1883년 6월 16일은 인천세관 '개청 기념일'이 되었다.이들의 국적은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미국·중국·일본 등으로 다양했는데, 이중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을 인천세관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렌도르프는 이후로도 20명의 외국인 세관원을 고용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까지 조선 세관에서 근무했던 외국인은 약 100명이었다고 한다) 

     

     

    인천 최초 세관이 있던 곳 / 중구 항동 1가 1-2에 위치한 한중문화관 옆에 표석이 있다. 오른쪽으로 옛 대한통운 창고들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보인다.

     

    그들은 렌도르프와 마찬가지로 아라비안나이트를 꿈꾸었을 것이다. 당시 그들의 월급은 해관장이 380달러, 보좌관이 300달러, 그 외 일반 직원도 최하 100달러를 받았다. 당시의 물가와 비교하자면 중등급 쌀 한 가마니 가격이 3원 10전으로, 해관장은 매월 쌀 120여 가마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은 셈이고, 두 달을 모으면 번듯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일반 직원이 받은 100달러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조선인 직원은 평균 15달러를 받았다) 당시 그들이 꾸었던 꿈의 정도는 개개인마다 달랐겠지만 그들이 원했던 꼬레아 드림은 어느 정도 성사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아래의 아만두스 라다기(Amandus Ladage 1859~1886)는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묘지 안내문에 따르면 아만두스는 1858년 2월 6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프랑스계 독일인으로 추정된다. 아만두스는 묄렌도르프가 세관 창설을 위해 1883년 청나라에서 데려온 외국인 세관원 중 한 사람으로, 인천세관의 방판(Assistant), 밀무역 감시를 하는 승감원(Tidewaiter), 검사관(Acting Examiner)으로 근무하였으나 단 3년 만인 1886년 8월 7일, 2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아만두스 라다기의 묘

     

    영국 브리스톨 출신으로 1894년부터 1899년까지 6년 동안 인천세관에서 승감원(당시 직책명 鈴字手)으로 근무하다 1899년 7월 28일 사망한 토마스 홀링워즈(Thomas Hollingworth, ? ~ 1899)를 비롯해, 방판으로 근무하다 순직한 에드워드 바타버스 주니어(Edward Batavus Jnr, ? ~ 1902), 프레드릭 프랭크, 윌리엄 리치먼드, 로버트 한스, 칼 브링크 마이어 등도 모두 인천세관과 연관돼 일하다 죽은 사람들이다.  

     

     

    토마스 홀링워즈의 묘
    에드워드 바타버스 주니어의 묘

     

    타운센트 양행과 더불어 인천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독일회사 세창양행에서 일하다 유명을 달리한 독일인 헤르만 헨켈(Hermann Henkel, 1877~1935)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세창양행은 독일인 마이어(H.E. Meyer)가 1884년 제물포에 설립한 함부르크 마이어 상사(E. Meyer & Co)의 인천 지부 격으로, 같은 독일인인 렌도르프 지원 하에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세창양행은 초기에는 바늘, 염료, 면작물 등 생활용품을 판매하다가 점차 철강, 의약품, 기계, 무기류 등을 중개무역해 큰 수익을 얻었다. 

     

    특히 '세창바늘'이라는 독일제 바늘은 여인네들에게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며 잘 부러지지 않는 우수한 품질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해열진통제 금계랍(金鷄蠟, 키니네)은 만병통치약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인천개항장박물관에 전시된 아래의 세창양행 광고는 1886년 <한성주보>에 실린 것으로 한국 최초의 광고로 알려져 있다.  

     

     

    세창양행의 조선 최초의 광고 (당시는 광고를 중국식으로 '고백'이라고 했다) / 호랑이 단비가죽 외 여러가지 물건을 사고 판다는 내용이 실렸다.
    중앙동 3가 중앙프라자 자리에 세창양행이 있었다.
    가장 번화가였을 개항로 옛길
    중앙프라자 맞은편의 인천영상위원회
    이 건물은 본래 가와바타 에이자부로(川端榮三郞)라는 일본인이 1942년 아와야(阿波屋)철물점 창고로 지은 벽돌조 건물로서, 인천건축협회설계사무소, '아침바다'라는 카페로 쓰였다가 지금은 인천영상위원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헤르만 헨켈의 무덤

     

    세창양행은 이후 독일기술자들 초빙해 광산업에도 뛰어드는 등 사업의 영역을 넓혀 갔으며, 1886년에는 조선정부에 2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세곡운반권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부를 늘렸다. 뿐만 아니라 세창양행의 대표 칼 볼터(K. Wolter)는 서울과 인천에 막대한 부동산을 사들여 임대 사업을 하기도 하였던 바, 볼터는 '제물포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세창양행 직원 헨켈이 살던 곳은 위에 게재한 개항로 옛 길, 지금의 인천제일교회 교육관 자리에 있었는데 원래는 마이어 상사 직원이었던 독일인 뤼일리스(Luhrs)가 인천에서 결혼하면서 살림집으로 신축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외관이 특색있거나 호화롭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전망은 빼어나 인천항이 훤히 바라다보였다. 헨켈 사후 이 집은 부인인 안나 헨켈과 한국인 김부영 여사, 그리고 천주교 측과 2중 3중의 소유권 분쟁이 걸려 소송까지 갔으나 안나 헨켈이 소유권을 포기하고 독일로 출국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후 이 자리를 인천항 하역업체인 우련통운 배인복 사장이 구입해 새집을 지어 살았는데, 작고한 후 빈집으로 방치되었던 것을 인천제일교회가 인수해 교회 부속 건물을 짓고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헨켈 저택의 옛 자취는 지금 축대밖에 남은 것이 없으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뷰는 여전히 일품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폭격으로 반파된 헨켈주택
    헨켈 주택이 있던 곳
    헨켈 주택의 옛 축대
    옛 헨켈 주택 자리에서 바라본 바다

         

    타운센트 묘 옆의 베넷 하나 글로버(Bennett Hana Glover, 1873~1938)라는 일본 여인의 무덤도 주목할 만한다. 그의 묘표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소재와 무대가 되었던 나가사키의 무역상 글로버 집안의 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즉 글로버 베넷의 어머니인 야마무라 츠루(山村ツル, 1848~1911)가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인 쵸쵸상(蝶さん, 쵸쵸는 나비를 뜻함)의 실제 모델이라는 것이다.   

     

     

    베넷의 무덤과 묘표

     

    하나가 베넷이라는 성을 갖게 된 것은 1897년 홈링거상사(Holme & Ringer Company)의 영국 청년 월터 베넷(Walter G. Bennett, 1869~1944)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하나(花)는 월터와 일본에서 만나 결혼을 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제물포에서 4남매를 낳고 40년 동안 살다가 죽었고, 남편 월터는 홈링거상사 인천지점과 홍콩상하이은행(현재 HSBC은행의 전신) 대리점 점장을 거쳐 1906년부터는 베넷상사(Bennett & Company/광창양행)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다 아내가 죽은 뒤 사업을 접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푸치니가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15살 일본여인 게이사 쵸쵸가 미군 장교와 계약 결혼을 한 후 아이까지 낳고 잠시 행복한 삶을 살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이까지 빼앗기자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는 새드엔딩의 스토리로, 푸치니의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의 어머니 야마무라 츠루와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역상 토머스 글로버(Thomas Glover, 1838~1911)와 결혼한 야마무라 츠루는 오페라와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았고, 딸의 결혼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하나와 월터는 인천으로 와 정착했다. 

     

    야마무라 츠루와 오페라 나비부인 속 쵸쵸상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나가사키에 산 이력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잘못된 내용이 묘표에 새겨지게 된 이유인즉, 아마도 나가사키 관광명소 글로버 가든(クラバ 園)에 세워져 있는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三浦環の像) 때문인 것 같다. 미우라 다마키(1884~1946)는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여주인공 쵸쵸상의 역할을 맡아 이름을 날렸던 프리마돈나였다. 그의 동상을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전망 좋은 글로버 가든에 세운 것인데, 이곳에는 실제로 토머스 글로버의 집이 있었다. 글로버는 일본과의 무기, 선박 거래로서 큰돈을 벌었으며 메이지 유신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글로버 가든 속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동상의 여인은 자신의 아이에게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필시 애 아빠가 있는 미국일 터이다. 근방에는 흰 대리석의 푸치니 동상도 있다. 그런데 그 동상들이 있는 곳이 하필 글로버 가든이다 보니 이것저것이 뒤섞여 또 하나의 엉뚱한 스토리텔링이 탄생한 듯싶다. 물론 이 스토리가 만들어진 곳은 일본이다. 

     

     

    나가사키 글로버 가든
    문제의 미우라 다마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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