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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본원사와 서본원사 & 신흥동 정미소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6. 12. 06:56
인천 답동 일대가 일제강점기에 데라마찌(寺町)라고 불렸다는 얘기는 앞서 언급한 적이 있다.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며 법정동으로만 존재하는 답동은 지금의 신포동, 신흥동, 율목동에 일대에 두루 걸쳐 있었는데, 이곳은 과거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쉽게 말하면 뒤차로 온 일본인들이니, 먼저 온 일본인들은 개항장 인근 조계지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리도 부족하고 땅값 또한 올라 있는 상태였으므로 뒤차로 온 일본인들은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에서 가까운 답동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즈음하여 이곳에 일본 사찰들도 대거 들어섰다. 동본원사, 묘각사, 인천사, 명조사, 서본원사, 화엄사(지금의 해광사) 등으로서, 이중 가장 먼저 들어선 절은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大谷)파가 설립한 본원사(本願寺, 혼간지)였다. 일본 진종은 가마쿠라 시대에 생겨난 종파로 그들이 세운 절의 이름은 모두 본원사였다.(앞에 지명이 붙는다)
진종은 12~13세기경 일본 내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진종이 군벌화될 것을 두려워해 본원사를 동·서로 쪼개 분리시켰다. 이후 동본원사(히가시 혼간지)는 정토진종 오타니파로, 서본원사(니시 혼간지)는 진종 혼파(本派)로 나누어져 독립된 다른 길을 걷는다.
진종 오타니파는 한국에 가장 먼저 진출한 종파로서 개항 이듬해인 1877년 부산 출장소를 시작으로, 1878년에 동본원사 부산별원이 설립되었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종교활동뿐 아니라 교육기관, 유치원 운영, 빈민구휼 등의 기능도 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이후 원산, 인천, 서울 등지로 사원 수를 늘려갔다. 앞서 말한 대로 경성별원은 조선총독부 바로 앞에 있었으며 광복 후까지도 존속했다.
인천의 경우는 1885년 포교를 시작하여 1886년에 인천지원을, 그리고 1888년 개항장 내 조계지에 임시본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교세의 확장에 힘입어 1899년 10월 일본인 공동묘지 부근인 현 로열답동맨션 자리에 본원사 인천별원이 세워지고 그들의 화장 묘제를 반영한 본원사 산하 화장장도 만들어졌다. 로열답동맨션 옆의 신흥초등학교는 본원사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세운 아사히(朝日)소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이 절은 1910년대까지 본원사로 불리다가 1920년 지금의 송도중학교 부근에 서본원사가 들어서면서 동본원사로 개칭되었다.
서본원사는 비교적 늦은 1920년에 지금의 송도중학교 부근에 세워졌다. 그래서인지 동본원사보다 많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물론 흔적이라야 남은 축대뿐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온전한 까닭에 옛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절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서본원사뿐만 아니라 답동 일대의 절들은 모두 규모가 크지 않은데, 당대의 부촌(富村)으로 땅값이 비쌌던 이곳에서 넓은 평수의 부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과거 이곳이 부유한 동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흥동 일대에 산재했던 정미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곳이 부촌이었다는 사실은, 쇠락했음에도 여전히 폼나는 옛집들과 담장 너머로 간간히 드러나는 정원을 장식한 일본식 석등으로써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리키다케의 별장을 들 수 있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조건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리키다케 정미소도 이곳 신흥동에 있었다.
정미소는 벼 · 보리 등 곡식들의 껍질을 벗겨 내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곳으로, 예전 어느 동네이건 한 두 곳 있었던 방앗간의 큰 규모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곡식의 껍질을 벗겨 내는 일을 도정이라고 하며 그 정도에 따라 현미 · 5분도미 · 7분도미 · 백미(수정미)로 등급을 구분한다. 정미소 여공들이 하는 작업은 긴 작업대에 앉아 정미기가 미처 도정해내지 못한 쌀과 뉘를 일일이 골라내는 일로서, 이를 선미(選米) 작업이라 불렀다. 일 자체는 단순하나 노동강도는 만만치 않았던 작업이었는데, 여공들은 하루 11~13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신흥동 일대에는 인천에서 가장 컸다고 하는 카토 정미소를 비롯한 대소(大小) 정미소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곳이 정미산업의 메카가 된 이유는 일본으로 반출되는 중부 지방 일원 미곡들의 집산지이기 때문이었으니,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인천 연안부두의 쌀창고와 수인역(근방에 수인선의 종착역 수인역이 있었다) 미곡창고가 분주했던 과거를 증언한다.
그리고 리카다케 정미소의 굴뚝과 창고가 지금도 시대의 아픔을 더불어 증언하고 있다. (광복 후 고려정미소로 바뀜) 정미소는 당시 인천 경제를 좌우하던 중요 경제시설이었으나 명암이 뒤따랐다. 답동 긴담모퉁이 길을 걸어 출근하는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조선 여공들의 출근길 행렬은 인천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일본인들이 홍예문로에 앞서 건설한 긴담모퉁이 길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던 인천신사/문화주택이 있던 긴담모퉁이와 리키타케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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