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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가족공원묘지에 묻힌 다양한 사연의 외국인들 I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31. 01:23
인천은 구한말 최초로 외국인 공동묘지가 조성된 곳으로, 그 첫 장소는 바다가 보이는 북성동 언덕이었다. 지금의 지번으로는 북성동 1가 1번지,(제물량로 335번길 13) 현재의 지형으로 보자면 송월동에서 만석동으로 이어지는 육교 너머 경인선 철길이 보이는 구릉지대이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옛 자취는 전혀 찾을 길 없고, 공동묘지의 흔적 남기기를 꺼린 탓인지 표석도 없어 그저 잊힌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 구한말 이래 조성된 약 8천 평의 외국인 공동묘지가 존치되었더라면 꽤 유명한 명소가 될 뻔했다. 하지만 묘원은 진즉에 훼손되었으니 1941년 5천 평 정도의 땅이 철도 부지로 수용당하며 침탈받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시에는 인민군들의 직접적인 파괴 행위와 인천상륙 작전 때의 포격으로 인한 손상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 계획에 밀려 1965년 연수구 청학동에 마련된 4천여 평의 외국인 묘역으로 이전되었다.
북성동 외국인 공동묘지의 첫 매장은 1883년 7월의 일로, 당시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가 조성되기 한참 전이었다. 그래서 1890년 7월 26일 별세한 제중원(濟衆院) 2대 원장 존 헤론(John W. Heron, 1856~1890)도 북성동 묘지에 묻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무더위로 인한 부패의 염려가 인천까지의 운송을 허락지 않았고, 이에 서강 양화진 언덕에 묻힘으로써 양화진 외국인 묘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 1885년 입국했다. 테네시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의대교수로 초빙받았지만 이를 마다하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를 지망하여 조선에 왔고, 뛰어난 의술과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조선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조선인의 병마를 치유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도 마다않다가 이질에 걸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가 양화진에 매장된 후 미국 공사를 비롯해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5개국 공사가 공동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공동묘지로 허락해 줄 것을 조선정부에 청원하여 승낙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사망한 외국인들이 그의 무덤 주변에 묻혔다. 그래서인지 헤론의 무덤은 양화진외국인묘지 중앙에 위치해 있다.
북성동 외국인 묘지에 처음 매장된 사람은 미국 상인 조지 버트 모트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83년 7월 10일에 묻혔다. 가장 마지막으로 묻힌 사람은 미국 군인 브래드포드이며, 1962년 7월 17일에 안장됐다. 시기별 매장 수는 1910년 이전이 34기, 1910~1945년 사이가 27기, 광복 후의 무덤도 5기가 있다. 국적별로는 영국인이 21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인 14명, 독일인 9명, 러시아인 7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3명 등 11개국 사람 66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중 16기는 국적과 이름을 알 수 없다. (이중 1기는 합장묘이므로 이곳에 묻힌 사람은 67명이다)
북성동 외국인묘지가 공식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인천외국인묘지규칙'이 공포되면서부터였다. 이때 북성동 일대 대지 2만4000㎡가 외국인 묘역으로 조성됐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묘역은 1965년까지 운영됐고 이후 청학동 산53-1번지 일대로 이전했다. 청학동으로 이전한 뒤로는 관리사무소를 두어 묘역을 관리하였으나(1986~1997년) IMF 때 예산문제로 폐지됐고, 차후로는 묘역 자체가 개방되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관리 방법일는지도 몰랐다.(1965년 이후 청학동 묘지에 묻힌 외국인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천의 외국인 묘지는 2000년대 들어서 다시 이전 얘기가 나왔다. 주거지의 확장에 따라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대한 주민들의 이전 민원 등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에 인천시는 2016년 10월 부평의 인천가족공원 내에 외국인 특화묘역을 마련하고 청학동 외국인 묘지의 유택들을 옮겨왔다. 이 일은 2017년 5월 완료됐다.
인천 청국인 묘지는 북성동 묘지와는 별개로 조성되었으며 '의장지(義莊地)'라 불렸다. 의장지는 1884년 3월 조선정부와 청국이 맺은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契章程)'에 의해 생겼는데, "제물포 한 10여 리 내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넓고, 묘지를 지킬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장정 조규를 만족시키는 중구 내동 6번지 일대에 자리하였다가 도심이 확장되자 1912년 남구 도화동으로 이전되었다.
도화동 묘지는 현 시립 인천대학교 정문 일대에 자리했으나 1958년 인천대학교 부지로 선정되며 대학에 양여되었다. 그리고 대신하여 남동구 만수동 산6번지 일원 국유지 53,400평을 보상받아 이전했는데, 만수동 이전 당시 총 2,873기의 분묘(무연묘 1,482기 포함)가 있었다. 그리고 1981년 인천 구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일대의 묘지는 부평 가족공원묘지 내로 3번 째 이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본인 공동묘지는 처음에는 따로 묘원이 조성되지 않고 답동 싸리재 부근에 흩어져 있다가 일대에 긴담모퉁이라는 길이 조성되며 1902년 법부대신 이하영 소유였던 율목동 야산에 일괄적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유골만을 안장하는 일본의 장례법에 따라 신흥동의 일본 사찰 동본원사 관리 하의 전용 화장장도 만들어졌다가 주택지 확장에 따라 1922년 지금의 중구 도원동 인천축구전용구장 자리로 이전되었다.이상의 묘지는 현재 모두 부평에 있는 인천가족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2017년 8월 인천 서구 당하동으로 이전된 답동성당 주임신부 조셉 마라발과 그의 동생 장-바티스트 마라발 형제의 묘소는 제외) 하나하나의 사연은 다 알 수 없지만, 이곳에 묻힌 외국인들에게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를테면 1912년 6월 북성동에 묻힌 중국인 우리탕은 수백만 원(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지만, 27년 후 그의 곁에 묻힌 스페인인 그의 부인 아말리아는 거의 빈털털이 신세였다. (☞ '인천해관 라포르트와 오례당')
일확천금의 꿈을 가지고 조선 땅에 건너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시류(時流)에 휩쓸려 죽은 일본인도 다수 있다. 그중 일본인 묘역 첫째 자리에 묻힌 오쿠가와 가타로(奧川嘉太郞)와 동생 기이치(義一) 형제의 죽음은 안타까운 경우다. 형 가타로는 조선인과 합작해 일본식 사기그릇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883년 조선 정부 의뢰로 인천~서울 간 세곡(稅穀) 운반 증기선의 도입을 추진하던 중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의 와중에 타살됐다. 그때 죽지 않았자면 정말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같이 죽은 동생 기이치는 겨우 15살이었다.선교사 랜디스의 죽음은 슬프고, 그의 유택은 아름답다. 랜디스는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대부분의 형제들은 농부가 되었지만 워낙에 똑똑했던 랜디스는 공부를 하게 하였으니 불과 16살에 명문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5년 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랭커스터 시립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유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정이 많았던 그는 캐나다 벽촌에서의 의료 봉사를 택했다. 그의 성정이 이러했던 바, 성공회 관계자들이 그에게 5년간의 조선 선교사 의료사역을 제의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1890년 한국에 온 랜디스는 현재 인천 내동 성공회 교회 자리에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 선행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병원/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을 열고 조선의 빈민 환자를 돌보았다. 인천 지역에서는 처음 생긴 이 서양병원으로 인천뿐 아니라 근방 지방 및 강화도를 비롯한 섬사람들까지 몰려들었고, 용한 의사라는 소문에 황해도와 충청도, 멀리는 전라도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약이 부족했으나 부족한 약들은 조선의 시장과 산천을 돌며 비슷한 성분의 약재들을 찾아 보충했다.그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천해관(세관) 촉탁의사로서 검역을 담당했으며, 해관 주치의도 맡았고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도 보살폈다. 그는 5년간의 사역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았다. 자신이 아니면 버려지게 될 조선인 환자들 생각에 돌아가고 싶어도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1898년 4월 16일 피로 누적에 장티푸스가 겹치며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 '의료봉사에 매진하다 요절한 성공회 선교사 랜디스')
미국인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1856~1918)는 인천에 진출한 외국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업가였다. 19세기말 23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가 미국무역상사 모오스에 취직한 그는 입사 불과 1년 만에 고베지점 설립 및 운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의 인천으로 파견된 후 모오스&타운센드상사(Morse and Townsend & Co.)의 책임자가 되어 왕실관련 사치품, 전기용품, 호랑이·담비가죽 등의 각종 피혁, 식료품, 그릇, 의류, 침구류, 의약품 등 돈이 되는 것은 닥치는 대로 사고팔았다.
타운센트는 에디슨 전기회사와 합자해 경복궁 전등시설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무기 및 탄약류를 무관세로 수입하여 조선정부에 납품하기도 했다. 나아가 경인선 철도건설에 참여하며 모오스의 권리를 사들여 1895년 타운센트상사(Townsend & Co.)라는 독립회사의 CEO가 되었다. 그는 이미 단순한 무역상을 넘어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는 거물급 경영인이자 독일 은행의 지부를 회사 내에 개업해 국제거래를 대행하는 국제금융인이기도 했다. (그는 국내 산업이 성장해야 자신도 발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로써 조선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빌려주었으나 원금 상환율이 크게 낮아 고생하기도 했다)
그는 1885년 인천의 순신창(順信昌) 상회를 인수하며 미곡 무역에도 손을 뻗쳤고, 특히 1892년 설립한 '담손이 방앗간'(타운센트 정미소를 조선인이 부르던 말)으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엥겔식 스팀 정미기 4대를 들여왔는데, 석탄을 연료로 증기를 만들어 그 힘으로 맷돌을 돌리는 혁신 시스템의 정미기였다. 이 스팀 정미기는 당시 미국에서도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첨단 제품으로서 폭발적이며 효율적인 에너지를 냈을 뿐 아니라 (60마력의 힘으로 하루 16가마를 도정할 수 있어 총 64가마의 어머어마한 생산력을 과시했다) 돌도 들어가지 않으며 쌀겨가 완전히 벗겨진 깨끗한 백미(수정미)를 생산해냈다.
1897년 3월에는 미국의 메이저 석유회사인 아메리카 스탠다드 오일과 계약을 맺고 조선에 석유를 독점 공급했다. (그는 이미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 톤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유류창고를 완공했다 / 현 월미전통정원 자리) 타운센드 양행이 수입한 미국산 석유는 경쟁사인 세창양행이 들여온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산 수마트라 석유 및 일본산 '월후유'(越後油), 기타 러시아산 석유의 품질을 크게 앞질러 완승을 거두었다. 그밖에도 1900년 부평 서면 율도에 폭약창고 건설, 1910년 홍콩&상하이 뱅크 국내지점으로서 보험업 진출 등 그의 사업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타운센드는 1918년 3월 10일 62세의 일기로별세했다.
* II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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