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던 인천신사/문화주택이 있던 긴담모퉁이와 리키타케 별장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5. 23. 00:16


    지금의 신생동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는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힘들지만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신사 남쪽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떠러지였다. 일본인들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이곳에 1890년 6월 신사를 세웠다. 신사는 신도(神道)라는 일본 토속종교에서 비롯된 사원이다. 우리에게 신사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신사참배'라는 단어의 거부감과 함께 강한 정치적 영향력 느껴지지만 인천신사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당시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은 일대에 신사가 없음을 아쉽게 여겼다. 그리하여 1889년부터 기금을 모아 신사 건립에 나섰고 일본 영사 하야시 겐스케(林權助)가 이를 후원했다. 신사 공사는 1890년부터 시작되어  6월에 소규모 신전이 완공되었으나 이후 쌓인 기금으로 1915년(대정 4) 공사비 약 1만 5천원이 소요된 대규모 개축 공사를 하였다. 그리고 1928년(소화 3) 지역 유지의 헌금으로써 제관(齊官), 참롱소(參籠所), 동서 대옥(大屋)이 증축되었으며, 1931년(소화 6) 4월 다시 보수 공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대지 4,744평에 경외지 948평을 갖는 신사가 완성되었다.

     
     

    옆서에 실린 인천신사 설경

     

    1890년 6월 17일 첫 건물이 세워졌을 때의 명칭은 인천대신궁(仁川大神宮)으로, 일본의 국신(國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안치했다. 하지만 건물은 대신궁이라는 이름과 달리 규모가 매우 작았다. 이에 한일합병 후, 위에서 설명한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져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으며,(1916. 4. 24) 이때 일왕 메이지(명치천황)를 합사(合祀)하고 인천신사로 개칭하였다.
     

     

    인천신사 / 가장 나중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옛 매립지에서 바라본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 인천신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전국의 일본신사가 파괴되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곳은 평양 만수산에 있던 평양신사로 8월 15일 저녁 당일로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교회가 많았던 평양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장로교 목사들이 총회를 갖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1938. 9. 10) 이에 평양신사는 장로교인을 비롯한 기독교도들의 참배가 성했고, 여러가지로 분노가 폭발했던 민중들에 의해 8월 15일 저녁 곧바로 방화와 파괴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사 자리에는 훗날 김일성 별장이 들어섰다)
     
    서울의 조선신궁(남산신사)을 비롯한 전국의 신사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졌다. 까닭에 인천의 일본인들은 신사 본전의 신체(神體, 우리의 위패와 비슷)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던 바, 8월 17일 오후 4시 인천신사의 승려들과 일본인 인천부윤(인천시장), 부두관리국장이 입회한 가운데 인천항 앞바다 한가운데에 탁구공 크기의 검은 옥사리(玉砂利) 신체를 가라앉히는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인천신사는 다른 신사들과 달리 곧바로 파괴되지 않고 한동안 원형이 유지되었다. 이것은 인천신사가 인천에 있던 다른 신사(월미산 아타고신사, 주안동 주안신사)와 달리 거의 일본인 전용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인천신사에 대한 강압적인 참배 요구가 없었던 바, 이렇다 할 반감이 존재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인천신사는 오랫동안 을씨년스러운 건물로 남아있다가 남인천여자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는데, 그 탓에 이 학교 학생들은 "밤에는 귀신들의 망령이 돌아다닌다"는 부질없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신사가 뒤늦게 철거된 까닭인지 지금도 인천여상(1984년 남인천여자중학교 관교동으로 이사하고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섬) 교정에서는 인천신사의 흔적이 쉽게 발견되며, 정문 옆 담에서는 당시의 석축과 석조 난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의 암반 밑으로 방공호를 뚫어 유사시 승려나 참배객들이 급히 피신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도 존재하기는 하나 사유지라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일본식 축성법이 완연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정문 옆 축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정문의 계단
    일제강점기 인천신사 입구의 난간
    학교 축대 난간으로 재활용된 신사 입구의 난간석
    본전 계단의 흔적
    인천신사 본전 앞에 있던 좌우 도리이 기둥
    도리이 기둥 뒤의 가스카 석등
    소화 19년(1944년) 2월의 건립연대가 새겨진 석등 기둥
    당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계단 박석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길 옆의 표지석 받침돌
    신사 표지석을 세웠던 받침돌로 추정된다.
    담쟁이덩쿨로 덮힌 축대 밑에 방공호가 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속의 인천여상 학생들과 인천항

     
    인천신사 건너편, 축현역 쪽(지금의 동인천 역 방향)으로 가는 경동 싸리재 방면으로는 일본인들이 언덕을 깎아 만든 '긴담모퉁이'라는 길이 있었다. 긴담모퉁이는 인천신사 일대의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자 축현역 쪽 경인가도와의 왕래를 위해 1908년 건설한 혈문(홍예문)길보다 1년 먼저 낸 신작로인데, 아마도 일본어 '카도미찌'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원래 이 일대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당대의 혼란 때 죽은 일본인들의 묘지가 있었으나 일제가 그것을 율목동으로 이장시킨 후 길을 내었다.
     
    드문드문 있던 조선인 초가집들과 무덤들이 정비된 이 길에는 일본인들의 문화주택(서양식 주택)이 들어섰다. 지금 길은 통행이 드물고 당대의 풍경은 그저 길 양 쪽의 긴 축대뿐이나, 다만 아직도 '긴담모퉁이 집'이라고 명명된 당대의 문화주택 한 채가 온전히 보존돼 있다. 1938년 건축된 목조 철근 콘크리트의 이 2층집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954년부터 1966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쓰였기 때문일 터였다. 당시 주변에도 여러 관사들이 들어서며 한때  일대가 '관사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긴담모퉁이 양쪽 축대 길
    일부 쇠락한 건물
    과거 문화주택의 계단
    '긴담모퉁이 집'
    골목 갤러리가 된 담장
    관사로 쓰이다 1977년 귀금속상 이경부에게 매각됐던 것을 인천시가 2020년 다시 매입해 '긴담모퉁이 집'이라는 이름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 개관을 준비 중이다.

     
    그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앞서 말한 중국인 우리탕(吳禮堂,☞ '인천해관 라포르트와 오례당')의 과수원을 겸한 별서가 있었다. 물론 바다가 보이는 높고 평편한 명당이었다. 그리고 이 땅은 다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 리키다케(力武)에게 인수되었는데, 그는 9,917.4㎥(3,000평)의 이 땅에 집을 신축하고 별장을 꾸몄다. 이후 이곳은 리키다케 별장, 혹은 역무별장으로 불렸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 숙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인천시립도서관을 거쳐 현재는 율목 어린이도서관이 되었는데, 리키다케의 집이 있던 계단 위에 본관이 건축됐다. 주변에는 리키다케가 꾸며 놓았던 석물들이 마치 야외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그 리키다케라는 자의 악행이다. 당시 인천의 정미산업이 얼마나 활황이었는가는 앞서  미두취인소 이야기를 다루며 설명한 바 있다. 다시 언급하자면 전성기 때인 1930년대 인천 정미소의 일일 생산량은 7천석으로 조선을 넘어 동양에서도 1위였다. 리키다케는 1920년대 정미업을 시작한 이래 줄곧 납세 상위권을 달렸다고 하는 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조선 여공들의 피땀이 배어 있었으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한국인 근로자의 파업이 잦았고, 항의하는 여공을 폭행해 유산시킨 적도 있으며, 정미소 앞 길을 사유지라는 이유로써 통행을 차단시키기도 하는 등 지역의 트러블메이커로 악명 높았다.

     
     

    리키다케의 집이 있던 곳의 돌계단
    율목도서관 안내문
    울목도서관 주변의 석물
    훈맹정음(訓盲正音)의 창시자 박두성 선생 생가 터 표석 / 맹인 점자를 창안하여 맹인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박두성의 생가가 이곳에 있었다.
    울목도서관에서 보이는 답동 주교좌성당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