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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물포 개항 140년의 영욕, 인천세관역사공원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2. 10. 2. 01:44

     

    오래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특이한 모양새의 부산 지하철역 사진이 올라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부산 2호선 감전역과 가야역으로, 역 이름만큼이나 강한 인스피레이션을 주는 역 입구였는데, 사실은 본래의 지형을 극복하지 못한 고육지책으로부터 탄생한 장소라고 한다. 당시 네티즌들은 "다른 세상으로 통할 것 같다", "들어가면 다신 못 나올 던전 입구 같다"며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는데, "왠지 뭔가 있어 보인다"는 댓글에 단 "왠지 없어 보인다"는 대댓글을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도 있다. 

     

     

    부산 2호선 감전역 출입구
    부산 2호선 가야역 출입구

     

    최근에 본 지하철 역 중에서 인상적인 곳은 대전시 대전역 3번 출입구와 수인선 신포역 2번 출입구이다. 대전역 3번 출입구는 비둘기호 열차 모양인데  특별히 40대 이상 세대에게 와닿을 듯하다. 비둘기호 열차는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운행됐던 경부선 열차의 객차에 붙여진 이름으로 처음에는 급행열차였으나 1984년 이후 새마을, 무궁화 등의 익스프레스가 출현하며 가장 느린 운송수단으로 전락한 비운(?)의 열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마다 모두 멎는 가장 저렴한 열차였던 까닭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던 바, 대전역 3번 출입구가 비둘기호 열차를 차용한 건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 듯하다.

     

     

    대전역 3번 출입구

     

    2016년에 개통한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 출입구는 일제강점기 건립된 세관창고를 디자인했다. 세관창고는 1911년 신(新) 인천세관 건물과 함께 지어진 적벽조(赤壁組) 건물로서, 수인선 공사가 시작되며 그 처리를 두고 고민하다  2016년 본래의 자리에서 항구 방향으로 40m 옮겨져 복원되었다.

     

    창고가 옮겨진 장소에는 1918년경에 지어진 항구·선박에 대한 관리 업무를 보던 직원 사무실인 구 선거계(船渠係) 건물과, 화물에 대한 관리 업무를 보던 구 화물계(貨物係) 건물이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천세관역사공원으로 꾸며졌다. 이축(移築)된 세관창고는 세관역사관으로 개장하였다. 이것이 모두 신포역 2번 출입구와 지척이다. 즉 신포역은 인천 개항 140년 역사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셈이다. 

     

     

    신포역 2번 출입구 / 1917년 신(新) 세관과 함께 건립된 세관창고를 디자인했다.
    모델이 된 구 세관창고 건물 / 중구 항동7가 있던 면적 172㎡의 조적조 건물이다.
    환풍구 역시 세관부속창고를 디자인했다.
    엘리베이터 승강장도 마찬가지
    안은 다른 전철역과 진배없다. (엄청 깨끗함!)

     

    당시 제물포로 더 많이 불려진 인천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항구로, 비교적 개항이 늦었음에도 각국조계장정 체결(1884)에 의해 국제항으로서 급격히 변모하였다. 특히 이곳은 1883년 개항하던 해, 한반도 최초로 세관이 설치되었다.

     

    그럼 그 전의 부산과 원산에는 세관이 없었다는 소리일까? 놀랍게도 없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은 일자무식의 조선을 7년간이나 갖고 논 셈이었다. 바깥세상에 깜깜했던 당시의 조선은 근대 관세제도 자체를 몰랐기에 개항을 하고도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뒤늦게 관세의 개념을 알게 된 조선은 일본에 관세 협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요구를 깔아뭉갰다. 조선은 1878년 부산 두모진에 부라 부랴 세관을 설치했으나 일본의 무력시위에 무력하게 철폐되었다.

     

    그러던 중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청나라 이홍장의 거중조정(Good Officer)으로 조선에 파견된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에 의해 비로소 외국 물품에 관세가 매겨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도 별수 없이 조선의 관세제도를 따라야 했는데, 묄렌도르프의 역할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그의 고용계약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편이 이해가 빠를 듯하다.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 1 -갑신정변')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톈진에 영선사로 갔던 김윤식 일행과 함께 조선에 왔으며, 그에 앞서 조선에서 파견된 관리 조영하와 다음과 같은 고용계약을 맺고 계약서에 사인을 교환했다.

     

    1. 목인덕(穆麟德, 묄렌도르프)은 조선정부 외교 사무의 자문역을 맡는다. 

    2. 조선 해관(海關, 관세청)을 설립 및 관리를 총괄하며, 외국 해관원을 고용할 시에는 사전에 알리고 근무기간을 명시한다.

    3. 조선 해관은 조선정부의 산하기관으로서 그 지시를 받으며, 목인덕은 해관 업무에 관한 사항을 보고할 의무를 진다.  

    4. 월봉은 해관은화 300량으로 하고, 출장비와 주거비를 따로 제공한다.

    5. 이 계약 조건을 위배할 시 3개월 전 미리 통지하고 해고할 수 있다.

     

     

    묄렌도르프 고용계약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묄렌도르프의 월봉 해관은화(Tael) 300량이다. 해관은화 1Tael은 은() 37.783g으로 1냥의 무게에 해당한다. 당시 미국 달러로 400달러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묄렌도르프는 보수에 걸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분골쇄신하며 조선을 위해 일했다. 그리하여 해관(海館=세관)을 짓고, 세제 개혁과 상공업 진흥을 추진하였다. (해관은 CUSTOMS의 중국식 용어이다)  

     

    묄렌도르프는 이미 중국에서 관세의 유용함과 그 수익이 국제경제에 지대한 보탬이 됨을 익히 경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임 초기 민영익과 함께 청나라에 출장 가(1883년 1월 22일~4월 10일) 청나라로부터 세관 일에 관한 경험이 있는 23명을 추천받고, 이중 영국인 스트리플링(인천 초대 해관장)을 비롯한 13명의 해관원을 고용했는데,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노르웨이·미국·중국·일본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가 이처럼 외국인들을 고용한 것은 조선인 중에서는 세관 업무를 아는 자가 없기도 했지만, 지난날 청나라 해관장 로버트 하트(Robert Hart, 1836~1911)가 보여주었던 마술과 같은 위력을 기대했음이었다. (※ 로버트 하트는 청나라 초대 관세청장이 된 영국인으로 청렴·정직을 바탕으로 해관 일을 보았고, 관세로서 청나라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조선은 청국과 달리 외국과의 교역량이 미미했던 바, 기대 만큼의 수익은 거두지 못했다)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1848-1901)
    개항 초기의 제물포 해관 / 맨 위는 영국영사관이고 아래는 해관(중앙)과 부속건물이다.
    인천화교역사관 정자 옆에 세워진 인천 해관 터 표석
    표석 내용문 : 1883년 6월 16일 이곳에서 우리나라 관세업무가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용하여 관세업무를 총괄시켰고, 초대 인천 해관장으로 영국인 스트리플링이 부임했다. 인천역 자리에 있던 임시부두에 가건물을 짓고 업무 시작, 항구 시설이 준공되자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인천세관의 변천

     

    그런데 이때는 일본보다 청나라가 더 골칫거리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저앉은 청나라 군관들은 정치적 간섭 외에도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새로운 조규를 통해 청국 상인들에게 엄청난 통상 특권을 보장했다. 이 조규를 한마디 설명하면, 조선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물론 관세도 없이)  중국상인 멋대로 상행위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장정(章程)의 서두에는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으로 대등한 국가 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例)와는 다르다"고 전제했다. 종주국과 속방과의 무역이니 다른 나라와 같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아예 첫머리부터 대못을 박아 놓은 것이었다. 즉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바, 조선상인들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없었고, 기존 상권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묄렌도르프는 일본과 청국을 모두 제재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조선의 힘의 너무 미약했다. 이에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로써 두 나라를 제압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일본정부는 당연히 항거하였으니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이홍장에게 묄렌도르프의 교체를 강력히 요구했고,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경쟁하던 영국 역시 묄렌도르프를 명렬히 비난하였다.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 2-거문도 사건'

     

    이렇게 되자 조선에 묄렌도르프를 파견한 이홍장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처음의 약속과 달리 청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묄렌도르프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도 한 마당이었다. 이홍장은 고종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묄렌도르프는 외무협판(외무부 차관)과 해관총세무사(관세청장) 직에서 해임되었다. 1885년 6월과 7월의 일로, 이후 묄렌도르프는 쓸쓸히 상해로 돌아갔다.

     

     

    묄렌도르프의 사인이 있는 인천항 해관문서

     

    묄렌도르프가 돌아가자 인천은 짱꿔 천국이 되었다. 인천이라는 지명조차  조차지에서는 중국 발음을 따라 ‘Jenchuan’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살판났던 중국인들은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며 쫓겨났다.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해관 통제권을 장악하였으니 1905년부터 개항장의 세관원과 세무사는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해관이라는 청나라식 명칭도 일본식 명칭인 세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조선 세관은 조선총독부의 예하 기관이 되었다. 

     

     

    1926년 일제가 건립한 인천세관 건물
    1911년 일제가 건립한 부산세관 건물
    1910년 일제가 제주도 성산리에 건립한 부산세관 소속 성산포 감시서 터

      

    조선총독부는 1917년 인천항 제1부두에 화려한 세관 청사를 지었으며 조적조 부속 창고도 여러 동 지어졌다. 인천항은 물동량이 늘어나자 1911년 확장 공사에 들어가 1918년 완공했다. 일제가 세운 인천세관은 한국전쟁 때 불탔다. 창고와 일부 부속동은 남았으나 수인선 공사와 맞물리며 철거되었다. 그 자리가 수인선 국제여객터미널 역 출입구 부지와 충돌했기 때문으로, 건설사인 대우건설은 2010년 11월 22일 창고 두 동을 삽시간에 부숴버렸다.

     

     

    1926년 신(新) 세관이 건립되기 전의 인천 세관

     

    하지만 나머지 1개 동은 역사 보존을 외치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유보되었고, 항구 방향으로 옮겨 복원하는 쪽으로 결정 내려졌다. 주민들도 이것은 반대하지 않았던 바, 지금의 인천세관역사공원에서 구 선거계·화물계 건물과 함께 인천의 파란곡절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이 건물들을 등록문화재 569호로 일괄 지정하였다) 

     

     

    보존이냐 철거냐, 운명의 걸림길에섰을 때의 7호 창고
    다행히도 2012년 9월 세관창고의 해체 복원이 시작됐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동쪽 벽체는 크레인으로 떠 옮겨졌고 훼손상태가 심한 다른 3개 벽체는 적벽돌을 일일이 해체한 뒤 회반죽을 써 원래의 지붕과 함께 다시 세워졌다.

     

    한국은 해방이 되어서도 관세 자주권을 갖지 못했다. 미군정이 실시된 탓이었으니 미군이 물러간 194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세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개항부터 따지자면 65년 만의 일로, 참으로 길고 긴 질곡의 세월이었다. 사람이나 나라나 다 마찬가지로 굴욕의 기억은 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오히려 잘 잊히지 않는데, 때로는 그것이 나을 수도 있다. 망각은 어쩌면 굴욕의 시간을 재현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천세관역사공원은 앞서 말한 신포역 2번 출구를 나가면 바로 만날 수 있다. 

     

     

    2021년 여름, 뉘늦게 개장된 인천세관역사공원
    인천세관역사관으로 쓰이는 7호 창고 건물
    입구 쪽 사진
    구 선거계 사무소 건물
    구 화물계 사무소 건물
    7호 창고 쪽에서 본 광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구 인천우체국 건물
    크게 퇴락한 옆탱이
    1923년에 건립돼 2019년 5월까지 운영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인천우체국에서 보이는 세관건물 (인천투데이 사진)
    신포 문화의 거리의 대화조(大和組) 사무소 건물
    대화조(야마토쿠미)는 일본인이 운영한 하역회사 겸 인력사무소로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장소다. 1880년에서 1890년 사이 현 위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은 대화조의 사무 공간으로, 2, 3층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주거 공간으로 쓰인 주상복합의 마찌야(町家) 형식이다. 지금은 까페로 쓰이고 있으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항구 앞 청·일 조계지 거리와 조선인 지게꾼 상
    대한통운 구 창고 앞에 세워진 개항장 지게꾼 상 / 인천항의 물동량이 늘어나자 대화조와 같은 하역회사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싼 값에 고용해 일을 부렸다. 가혹한 노동환경과 민족차별에 시달리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1892년 5월경 '두량군'이라고 불리던 조선인 미곡 운반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여러 차례 파업을 일으켰다.
    개항장 지게꾼에 관해 연구한 노동경제학의 권위자 윤진호 교수는 1892년 인천 미곡노동자 파업이 조선 최초의 파업 기록이자 근대적 노동조합 조직의 맹아라는 학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개항장이 있던 거리에서는 구 대한통운 창고 외 과거의 보세창고들을 만날 수 있다.
    개항장 거리에 재현된 왜식가옥 / 관광객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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