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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눈의 대감마님 묄렌도르프(II)-거문도 사건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3. 6. 23:42

    * I편에서 이어짐.

     

    알렌이 외과적 수술을 통해 빈사의 민영익을 살려낸 일은 매우 유명하다. 알렌의 밤샘 수술을 어의(御醫)를 비롯한 조선의 의사들은 침묵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에 알렌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큰 신임을 얻었고, 갑신정변 실패 이후 폐가가 된 재동 홍영식의 집을 인수받아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세운 일에 대해서는 앞서 '박영효와 홍영식'에서 설명한 바 있다.

     

     

    민영익을 치료하는 알렌 / 1904년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 신문에서 호레이스 알렌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때의 삽화이다. 제목이 'Horace N. Allen. The First Amerlcan in Korea' 이다.

     

    * 호러스 알렌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기도 하니 그가 조선에 온 이유도 의료가 아닌 선교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민영익을 회생시켜 고종의 신임을 얻은 이후에는 조선의 각종 이권에도 개입하였으니 대표적으로 조선 최대 금광인 평안남도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했다. 서울 행촌동의 '딜쿠샤'는 알렌에게 금광 채굴권을 넘겨받은 채굴업자 조지 테일러의 아들인 엘버트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쁨의 궁전'이란 뜻으로 부인 메리 테일러가 붙였다.
    1923년 건립되었음을 알리는 딜쿠샤 정초석

     

    갑신정변으로 알렌 이상의 신임을 얻은 자는 당연히 묄렌도르프였다. 게다가 사사건건 대립하던 눈엣가시 김옥균이 사라졌으니 묄렌도르프로서는 그야말로 10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산 너머 산이랄까, 이번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나라의 청년장교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말썽이었다. 당시의 원세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선의 새로운 왕'이란 설명이 맞을 정도로 위세를 떨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셋에 불과했다.

     

    고종은 1882년의 임오군란에 이어 갑신정변 때도 어김없이 청국군을 불러들였다. 이에 김옥균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을 3일 만에 소탕할 수 있었지만 이후 청국과의 관계는 과거의 형식적 속국에서 실질적 속국 관계로 바뀌었다. 갑신정변 후 '주차조선교섭통상의'란 직함으로 조선 땅에 눌러앉은 23살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전에 보지 못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며 고종을 제 발밑에 두는 행패를 부렸으니 말을 타고 궁궐에 드나드는 것쯤은 예사였다.

     

    원세개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궁녀나 광혜원(=제중원) 간호사 등을 수시로 불러들여 노리개로 삼았으며, 조선 정부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헌납한 명문가 안동김문의 여식을 첩으로 맞을 때는 그녀의 몸종까지 데려가 함께 첩으로 삼았다. 가히 국가에 대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양념이고 제 마음에 드는 부녀자를 강제로 납치해 능욕하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으니, 능욕을 당한 여인들 중 스스로 목을 매는 자가 속출했다. (이에 민간에서는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고 되놈을 저주하는 원청굿이 행해지기도 했다)

     

     

    젊은날의 원세개
    지금의 중국대사관은 원세개가 10년간 주둔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 스물세 살의 청나라 초급장교는 고종보다 상석에 앉아 고종을 윽박질렀고, 고종은 그 어린놈에게 절절맸다. 하긴 개인 간에도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거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며 두 차례나 청나라의 신세를 입은 고종이니, 그가 받는 모욕은 어쩌면 자업자득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묄렌도르프는 딱하고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자주국도 속방도 아닌 그저 식민지였고, 원세개는 그 식민지의 총독이었다.

     

    원세개는 정치적 간섭 외에도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새로운 조규를 통해 청국 상인들에게 엄청난 통상 특권을 보장했다. 이 조규를 한마디 설명하면, 조선 정부의 통제를 무시하고 중국상인 멋대로 상행위를 할 수 있는 법이었다.이에  조선 상인들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없었고, 기존의 상권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나아가 원세개는 중국 어선들의 연안어업권과 청나라 군함의 연안항행권 등을 허용하였던 바, 바다도 중국의 내해(內海)가 되어갔다. 

     

     

    경복궁 집옥재 구역 /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와 팔우정, 휴식처인 협길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옥재와 팔우정 / 원세개 간섭 시절 고종의 침전인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원세개의 영향력이 엿보이는 청나라풍 건물이다.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경복궁 건천궁 지역으로 옮겨왔다.
    고종 때 발행된 닷량 은화 / 1892년 대조선 개국 501년을 기념해 발행한 대한제국 최초의 일련의 주화들은 이후 원세개의 명령에 따라 '대'(大)자가 빠지게 된다.

     

    다만 원세개가 묄렌도르프에게 뭐라 하는 법은 없었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이 재정고문 마건상(마첸창)과 함께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사람이었으니 같은 편이라 여기고 있었다. 묄렌도르프 역시 최대한 그러한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원세개로부터 조선을 구해낼 궁리에 골몰했으니, 그 방법으로서 찾은 것이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즉 러시아의 힘으로 청나라를 물리치겠다는 중국식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모색한 것이었다.

     

     

    묄렌도르프의 두 번째 집무실이 있었던 정동 해관본부 신관 자리/ 이후 미국기업 싱어 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와 신아일보사 사옥으로 활용되었다.
    1975년 건물을 증축했을 때의 사진
    정동 해관본부의 위치

     

    묄렌도르프는 고종을 독대해 이 방안을 은밀히 전하고 허락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이를 실현하기 위해 1885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러시아공사 다비도프(Davidoff)와 접촉했다. 갑신정변 때 입은 일본측의 피해 보상과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송환을 위해 파견된 특명전권대신 서상우의 부사 자격으로서였다. 그리고 이때 다비도프와 러시아 훈련교관 초빙문제를 비밀리에 협의하고 구체적인 시기까지 논의했다. 

     

    이 일은 곧 일본의 레이다 망에 포착되었다. 조선을 노리는 일본은 이 사실을 영국에 알렸고, 지구촌 각지에서 러시아와 싸우던 영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였으니, 1885년 3월 1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주둔하던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도웰 제독이 군함 3척으로 남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이른바 영국의 거문도 점거 사건이었다. (이때 거문도를 무단 점거한 영국군은 이후 러시아 정부로부터 조선의 영토를 침탈할 의지가 없음을 확실히 보장받고 철수한다. 이때가 1887년 2월 5일이었으니 영국군은 근 2년간이나 조선에 주둔한 셈이다)

     

     

    거문도에 정박 중인 영국함선 플라잉피쉬 호
    항구(해밀튼 항)를 건설 중인 영국군
    거문도의 영국군 묘지 / 오마이포토

     

    영국함대가 거문도를 점거하자 묄렌도르프는 이에 대항해 정여창이 지휘하는 청나라의 함선을 타고 거문도로 가서 주준군 대장인 플라잉피쉬 호 선장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이어 나가사키로 건너가 도웰 제독에게 항의서를 제출하고 각국 외교관들을 만나 거중조정을 요청했다. 물론 일본정부도 가만있지 않았으니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미국에 섭외하고 이홍장에게 압력을 넣어 조선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미국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그즈음 영국 내에서도 조선 땅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묄렌도르프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청나라가 파견하긴 했지만 묄렌도르프는 독일 정부의 지령을 받는 스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러시아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묄렌도르프의 행위가 모국인 독일 정부의 지령에 따른 공작이었다는 주장이 20세기 한국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요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신흥제국 독일(프로이센)이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영국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직접적 위협을 극동으로 돌리기 위해 묄렌도르프에게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는 것으로, 그 시기는 1884년 10월 독일 총영사 젬브쉬(Zembsch)가 서울에 부임했을 때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임계순 저 <청일 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이렇게 되자 이홍장도 묄렌도르프를 그냥 놔둘 수 없게 되었다. 처음의 약속과 달리 청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묄렌도르프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도 한 마당이었다. 이홍장의 압력을 받은 고종은 1885년 6월 결국 외무협판에서 해임시켰고, 7월에는 해관총세무사직에서도 해촉시켰다. 이홍장은 해임된 묄렌도르프를 톈진으로 소환하고 그의 후임으로 미국인 데니(O.N. Denny)를 파견했다. (이어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왔던 스티븐스는 지독한 친일행각을 일삼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는다)

     

     

    일본에 컨트롤 당해 일본의 이익을 추구하다 사살된 조선의 외교고문 스티븐스

     

    그는 그렇게 청나라로 돌아갔지만, 묄렌도르프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러시아는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마지막 희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묄렌도르프는 톈진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으로의 재입국을 희망해 노력했고 이홍장에게도 매달려보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홍장의 힐난에 대해서는, 자신은 그러한 적이 결코 없으며 이홍장이 알고 있는 내용은 전부 영국의 농간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홍장의 허락은 없었다. 신뢰에 금이 갔기도 했거니와 당시의 이홍장은 과거에 비해 힘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바, 각계의 반대가 심한 묄렌도르프의 조선행을 밀어붙이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조선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묄렌도르프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닝보(寧波)시 통계국 국장 등으로 일하던 그는 1901년 4월 20, 54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해 상하이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1901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묄렌도르프의 조문(弔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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