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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산(장지락)의 아리랑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1. 12. 05:00

     

    님 웨일스는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Song of Ariran)>을 발간하며 책의 표지에 '한 한국인 혁명가의 일대기'(The Life of a Korean rebel)라는 설명을 달고, 그 책의 저자를 자신과 김산이라고 했다.(by Kim San and Nym Wales) 자신이 쓰긴 했으되 김산의 구술을 받아 쓴 것이므로 공동저자 식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 김산이라는 이름은 주인공 장지락을 보호하기 위해 쓴 가명이라는 사실을 앞서 I편에서 말한 바 있다. <아리랑>에 서술된 장지락의 일생은 대강 아래와 같다. 

     

     

     《아리랑》의 표지 

     

    장지락은 1905년 5월 12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리에서 태어났다. 1903년 러시아가 조선 정부로부터 조차한 압록강 입구의 작은 포구를 두고 영일(영국과 일본)과 러시아가 격하게 대립하였고,(이른바 용암포 사건)  그리하여 결국 러일전쟁의 단초가 된 용암포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바로 그 세기의 대전에서 뜻밖에도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 식민지화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바,(1905년) 장지락은 출생부터 일본과는 악연이 맺어진 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자신이 6살 때인 1911년, 당시 창궐하던 발진티푸스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어머니를 개 패듯 때리던 금단추 제복을 입은 일본순사의 모습이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 13살 때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로 진학했는데 바로 그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지락은 제적을 당했다.

     

    지락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집안에서의 특별한 꾸지람은 없었고, 그의 영민함을 알고 있던 작은 형은 오히려 100원(현 시세로 약 300만원)을 장만해주며 일본으로 가 의학공부를 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지락은 그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와 고학을 하며 입시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지락은 그 1년 후 동경 생활을 접고 중국 만주로 가 무장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가 왜 의대 진학의 꿈을 접고 만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그 내막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마도 앞서 언급한 루쉰(魯迅)의 경험 같은 것이 지락에게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니 간략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앞서 말한 윤봉길 의사의 쾌거가 있었던 홍커우 공원은 지금은 루쉰공원으로 바뀌었다. <아Q장전> <광인일기>등의 작품으로서 세계적 문호의 반열에 오른 중국 작가 루쉰을 기념하는 뜻으로 이름이 바뀐 것인데, 그도 처음에는 의학을 배우러 일본에 갔으며 1904년 센다이(仙台)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다 2학년 무렵,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수가 틀어준 러일전쟁에 관한 뉴스 필름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필름은 러시아 간첩의 죄목으로 일본군의 칼에 의해 처형당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루쉰은 처형 자체보다 그것을 구경하는 주위의 중국인들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중국인들은 일본 군인에게 연유를 따져 물을 수 있을 만큼 건장했고 숫자도 많았지만 모두 넋 놓고 처형 광경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처형이 끝나자 무표정하게 흩어졌다. 루쉰은 이때 중국인들의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소흥으로 돌아와 작가가 되었다. 

     

     

    루쉰(1881-1936)

     

    루쉰은 중국인들의 몸보다 생각을 고치는 쪽을 택한 것이었는데, 장지락에게도 그와 같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장투쟁의 길을 결심하고 군인이 되고자 1920년 1월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입교 기준은 최소 18세였으나 그는 당시 고작 15세였다. 하지만  입교를 위해 700리 길을 걸어온 가상함을 인정받아 3개월 기본 과정에의 훈련이 허락되었다. 그렇게 무관학교 맛을 본 지락은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지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를 찾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춘원 이광수가 주간을 맡았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하며 서양 언어와 서양 과학과 정치학 등을 공부한다. 그러면서 말로만 듣던 안창호, 이동휘와 같은 인사들을 만나게 되나, 그들보다도 피가 뜨거웠던 지락은 젊은 나이답게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명사수 오성륜(吳成崙, 1898-1947)과 운명적 만남을 이루게 된다. 

     

    앞서 '의열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던진 남산 조선총독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열단은 급진 · 과격투쟁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였다. 그들은 만주와 중국 본토 내의 대부분의 독립단체들이 뜨뜻미지근한 노선을 걷고 있는 데 반발해 만들어졌으며(1919. 11. 9)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행한다'는 정강답게 일본의 중요시설이나 주요 인물에 대한 과감한 테러를 행했던 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종로경찰서, 일본황궁 등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경찰 군인 간부들의 살상시켰다. 이에 의열단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독립단체가 되었고, 단장인 김원봉은 일본의 체포 1순위에 올랐다.  

     

     

    김원봉(1898-1958) / 당시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는 현상금 60만원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는 100만원(320억)이 걸렸다.  

     

    의열단은 폭탄 제조 기술과 사격술 등을 배우고 훈련했는데 오성륜은 의열단원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명사수였다. 그는 1922년 3월 28일 상해를 방문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황포탄(黃浦灘)에서 저격했으나 환영 인파 사이에 있던 미국인 관광객 스네트 부인이 끼어들며 대신 총을 맞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히는데, 그 후 심문을 받던 일본 영사관 감옥을 탈출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경도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바, 젊은 장지락에게 사격술 이외에도 많은 것을 전수해주었다. 

     

     

    운좋게 죽지 않은 다나카 기이치
    대신 절명한 스네트 부인 / 이에 상해 임시정부는 유감과 사죄의 의사를 표하고 도산 안창호는 남편에게 보상금을 전달하는 높은 도덕심을 보였다. 
    다나카 대장 저격사건이 일어난 상해 황포탄 거리

     

    그가 의열단에 가입했을 때도 고작 16살이었다. 그래서 그는 안창호의 권유로 천진 난카이 대학에 특대 장학생으로 입학해 학업을 잇게 된다. 하지만 그곳의 학교 생활 또한 여의치 않았던 바, 후일 중국 영화계의 황제가 된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이라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모욕에 항거해 같은 조선인 학생 5명과 함께 자퇴를 결행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작은 형의 권유와 지원으로 다시 학업을 잇게 되니 작은 형이 초지일관 권하던 의대를 택해 베이징 협화의학원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지던 마르크스주의에 탐닉하여 1923년 사회주의 계열 모임인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게 되는 바, 아마도 의열단원 오성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인생은 이때부터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되니 가장 큰 변화는 1924년 6월 쑨원(孫文)이 1차 국공합작(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후 광저우(廣州) 교외에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에서 오성륜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중국인 및 의열단원을 비롯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군사교육을 시켰는데, 1925년 3월 쑨원의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장제스(蔣介石 )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중국 내의 군벌과 공산당을 아우르는 대대적인 북벌 토벌 작전을 단행하게 하지만 장지락은 북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지락은 당시 이미 좌파 노선으로 크게 경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광저우의 중산의과대학 본과 2학년으로 편입했던 그는 결국 이듬해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되니, 1927년 12월 11일 장제스 국민당의 공산주의자 학살에 저항해 광저우 시내를 점령한 이른바 '광저우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이때 벌어진 3일간의 시가지 전투에서 공산주의자 7000명 이상이 학살되며 폭동이 진압되는데 약 200명가량의 조선인도 희생되었다)

     

    이때 가까스로 광저우를 빠져나온 장지락은 오성륜과 함께 잔여 공산세력이 있는 광둥성의 작은 마을 하이루펑(海陸豊)에 정착한다. 그리고 이른바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불린 그곳의 사수를 위해 국민당 토벌군과 다섯 차례의 전투를 벌이지만 1928년 2월 하이루펑마저 점령당하자 이번에는 천신만고 끝에 홍콩으로 탈출하는데, 이후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중국공산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한다.(1929년 봄)

     

    그러면서 베이징에 있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계열 젊은이들 간의 살육극인 이른바 '북평(북경)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때 어떤 역할을 한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신문에 오르게 되고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1929년 11월 21일 천안문 인근의 한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국민당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이후 그는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인도되어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돼 진다.

     

    장지락은 그곳에서 구금된 40여일 일본경찰들에게 공산당원임을 자백하라며 여섯 차례나 물고문 등을 받았지만 끝내 불복해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지락은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나 그를 추대하려는 무리로 인해 다시 공산당의 무장봉기에 다시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1933년 4월 26일 새벽, 은신처를 급습한 국민당 경찰에게 두 번째로 체포되나 이번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1932년 텐진 일본 영사관에 구금되었을 때의 장지락 / 패찰에는 장지학(張志鶴)이라 쓰여 있다.

     

    이런 혼란을 거듭하던 그는 이듬해 1월 중국인 여성 동지 조아평과 결혼하며 투쟁에 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결혼 후 잠시 철도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그해 가을, 아내와 함께 허베이성 석가장(石家庄)으로 이사하였고, 노동 후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름대로의 조직을 꾸린다. 그러던 중 1935년 석가장에 아내를 남겨둔 채 홀로 상하이로 오게 되는데, 그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각별히 지냈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성숙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서 김성숙 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과는 궤를 달리 하는 '조선민족연합전선'이라는 투쟁조직을 이끌게 되지만, 1936년 4월 중국공산당과 함께 옌안으로 이동한다. 김구의 상하이 임시 정부는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의지한 반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김성숙과 장지락은 마오쩌둥에 의지했던 것이니 훗날 중국 공산당의 힘이 회복되면 그들의 힘을 빌려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을 품은 듯싶었다.

     

    국민당 정부든 공산당 정부든, 아니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든 일본은 공동의 적인 까닭이었다. 그는 사상을 떠나 오로지 그와 같은 항일정신으로 옌안으로 이동하였으며, 앞서 I편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곳의 항일 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 및 과학을 가르치는 강사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석가장에 있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심경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연안하(延安河)의 강변에 서 있소. 눈물이 연안하의 모래밭을 적시는구려. 곧 연안을 떠나 전선으로 갈 생각이오. 아이가 자라면 백의민족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으로 길러주오."

     

     

    연안시를 관통해 흐르는 연안하
    연안하 상류의 후커우 폭포 / 중국인이 천하제일로 치는 황하 본류의 폭포다.

     

    그가 님 웨일스를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웨일스는 이때 장지락이 구술한 일생을 책으로 엮어,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Song of Ariran)>이란 제목으로서 출간하지만 장지락은 이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토벌에 후퇴를 거듭해 옌안까지 몰린 마당이었다. 그리고 권토중래를 위한 희생양을 찾고 있었는데, 그 역할을 가지고 1938년 10월 캉성(康生)이라는 자가 출현했다. 

     

     

    장지락을 처형시킨 캉성(1898-1975)

     

    당 중앙 조직부장의 직함의 캉성은 옌안에서 대대적인 트로츠키주의자 숙청 작업을 벌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 당시 민주적 방식으로써 사회주의화할 것을 주장하며 멘셰비키 편에 서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맞선 사람이었다. 그는 레닌의 후계 자리를 놓고 스탈린과 경쟁하다 결국 축출되어 국외로 추방되었는데,(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됨) 중국에서의 트로츠키주의자라 함은 혁명에 반대하는 스파이라는 의미였다.

     

    캉성은 장지락을 일본의 첩자인 트로츠키주의자로 분류했다. 체포된 장지락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을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워 반동분자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희망은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0월 19일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북으로 가는 도중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그가 정확히 무슨 잘못을 했으며 어떤 죄목 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아내에게 보낸 위의 편지를 보면 지락은 이미 이와 같은 최후를 예감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무렵 만난 님 웨일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솔직한 인간적 고뇌를 토로하는 바, 한없는 연민도 느껴진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지금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 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을 가릴 것 없이.....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아직 내게 살아 있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나약하게도)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나약해질 것인가를 망설인다."   

     

    님 웨일스와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녀의 기록이 없었다면 장지락은 우리에게 전혀 기억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이 담은 기록이 존재함에도 남북한, 심지어는 그가 활약한 중국 공산당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비운의 혁명가로 남아 있었다. 남한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로 취급된 탓에 그러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항하는 세력이었다가 모조리 숙청된, 이른바 연안파에 속한 인물로 분류된 탓에 그러했으며,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인물인 탓에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고영광(계부 성을 따 고씨가 됨)이 1978년에 이르러 중국 공산당에 아버지 장지락에 대한 명예 회복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중국공산당중앙조직부는 1983년 '장지락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는 발표를 하며 사실상 명예 회복의 조치를 내렸는데, 한국에서는 1953년 일본에서 번역 출판된 <아리랑>이 당시 합동통신사의 이영희 기자가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들여온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용한 신드롬을 형성하였다. (일본에서 이 책이 이와나미 문고가 선정한 ‘세계명작 100선’에 꼽혔다)

     

    이 책이 한국에서 처음 출판된 것은 1984년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은신 중이던 노동운동가 조우화(본명 송영인)가 번역한 것을 '동녘 출판사'를 운영하던 친구 이건복이 출판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후 이건복 사장은 기관에 끌려가 고생을 했고 <아리랑> 또한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장지락에게는 2005년 '조선 독립혁명가 김산'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KBS에서는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 · 방영되기도 했으며, 2017년 12월 15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대 연설에서 마오쩌둥 주석과 대장장을 함께한 동지로 소개하기도 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랄까..... 나는 조금은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아리랑>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책 속에는 제목이 '아리랑의 노래'가 된 이유가 장지락의 육성으로 담겨 있었다.

     

    "조선에는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을 담고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서른 셋 인생 말엽의 장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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