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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님 웨일스의 아리랑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1. 8. 02:38

     

    님 웨일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Edgar Snow, 1905-1972)는 대단히 친(親) 중국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그에 대한 사랑은 지대했으니, 그가 말년에 스위스에서 암 투병 중일 때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는 중국의 저명 의사들을 파견해 보살피기까지 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배척받았으니 그는 미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에드거 스노가 1937년에 쓴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1936년 대장정(大長征)을 마친 마오쩌둥(모택동)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그때까지 서방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책이 되었다.(물론 긍정적으로) 그는 중국에 7년간 체류하면서 중국의 홍군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많은 것들을 친 공산당적인 시각으로 서방에 알렸는데, 오늘 말하고자 하는 님 웨일스(Nym Wales)도 그 시절 중국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사람이었다.

     

     

    《중국의 붉은 별》 재간본 / 런던에서 출간된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정보에 목말랐던 유럽인에 큰 반향을 일으켜 한 달 만에 2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고 곧바로 재판을 찍었다. 국내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님 웨일스(본명 Helen Foster Snow, 1907-1997)는 미국 유타주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 개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유타대학에서 수학했으나 당시의 극심한 경제공황의 여파로 졸업을 못하고 미국 은광산업협회에 취직해 일하며 국무성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작가를 꿈꾸던 그녀였기에 헤밍웨이처럼 유럽을 순방하고 싶은 마음에 응시한 시험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합격을 하였으나 원하는 유럽 쪽에는 좀처럼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중국 상하이 영사관으로 가게 됐던 바, 1931년 8월 중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배는 그녀를 다른 운명으로 이끌었으니 상해에서 에드거 스노를 만난 결혼하게 되었고,(1932년) 12.9항일 운동을 취재해 서방에 알린 저널리스트가 되었으며,(1935년) 남편에게 경도되어 옌안(연안)의 공산당을 취재한 <인사이드 레드 차이나(Inside Red China)>라는 책을 출간해 서방에 중국공산당을 홍보하기도 했다. 님 웨일스가 그 무렵에 만난 사람이 한국인 독립운동가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으로, 그를 취재해 저술한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1937년 주덕과 함께 찍은 사진
     《인사이드 레드 차이나》의 표지
    님 웨일스의 《아리랑》 / 1941년 뉴욕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전세계에 50권, 국내에는 정선 '아리랑 박물관'에 단 1권만 있는 희귀본이다. 그가 사회주의운동가로 치부된 탓에 국내에서는 뒤늦게 공식 번역본이 나왔다.
    2016년 방영된 TV 시리즈 '중국의 붉은 별' 속의 님 웨일스 / 미국 작가 겸 사업가인 엘리스 리본스가 님 웨일스 역할을 맡았다.

     

    님 웨일스가 중국으로 간 1931년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공한 날로, 14년 중일전쟁이 사실상 시작된 해였다. 그리고 그녀가 상해에 머물던 1932년 4월 29일에는 상해 홍커우 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이날 한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윤봉길 의사가 행사장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 2만 명이 넘는 환영 인파들 앞에서 상해 주둔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요인들을 골로 보내는 쾌거를 이루었던 바, 님 웨일스에게 코리아라는 나라가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터였다.

     

     

    폭탄 투척 후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 / 단상 위의 사상자들이 줄줄이 아래로 이송되고 있다.
    상해 루쉰공원의 루쉰 동상
    루쉰공원의 윤봉길 의사 / 오마이뉴스 사진

     

    1936년 님 웨일스는 남편 에드거 스노를 따라 중국 공산당 정부의 본거지인 연안으로 가게 되는데, 그는 그곳에서 또 한 명의 강렬한 이미지의 코리안을 드라마틱하게 만나게 되는 바, 그 사람이 바로 김산이었다. 그녀가 김산을 알게 된 곳은 연안 시내 중심가를 흐르는 연안하(延安河) 변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천주교 성당으로 당시 루쉰(魯迅)예술학원 건물로 전용돼 쓰이고 있었다. 혁명에 필요한 예술가를 양성하는 기관인 그곳 도서관에는 소설을 비롯한 백여 권의 영문 서적들도 있었는데, 그 서적들의 대출 카드에는 한결같이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장명이란 사람이었다. 

     

     

     연안시의 어제와 오늘 / 오른쪽 강이 연안하이다.
    연안시 중국 공산당 임시 청사
     루쉰예술학원으로 쓰이던 성당

     

    도서관 관계자에게 장명에 대해 묻자 조선에서 온 혁명가로, 지금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웨일스는 그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공손한 편지로써 미팅을 청했다. 하지만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두 번째의 간절한 편지를 보내고서야 겨우 성사될 수 있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장지락(張志樂), 신의주 아래 땅인 평안북도 용천 사람이었다. 장지락을 만난 님 웨일스는 기대 대로 그의 강렬한 포스와, 불굴의 항일 투쟁 정신, 그리고 불타는 조국애(祖國愛)에 매료되었다. 

     

    님 웨일스는 22번의 만남을 통해 33살의 한국인 독립운동가가 문어체 영어로 구술하는 그의 치열한 삶을 7권의 노트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던 그의 뜻을 따라 김산이라는 가명을 채택하여 장지락의 일생을 다룬 <아리랑>이라는 책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출간하였다.(하지만 그녀는 이때 장지락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을 당한 줄 알지 못했다) 그 책의 서문에 님 웨일스는 장지락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매우 독특한 인물로서, 내 인생에 이런 인물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는 내가 근래 7년 동안 동양에서 만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혁명가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투철한 의식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성, 그리고 자주정신이었는데, 이는 가히 신앙이라 부를 만했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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