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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힌 아사카와 타쿠미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2. 9. 23:59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의 아사카와 타쿠미(淺天巧, 1891-1931) 묘소에 다녀왔다. 집에서 3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임에도 이제 왔다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의 직원으로, 먼저 조선에 와 있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의 권유로 조선 근무를 자원했다. 1914년 24세로 조선에 온 그는 산천의 민둥산을 보고 놀랐다. 오랫동안 신탄(薪炭, 장작)을 연료로 쓴 결과였는데, 더불어 일제의 목재 수탈도 한몫을 했다. 그는 조선의 민둥산을 울창하게 하는 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준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는 산림과 직원으로서 전국을 다니며 조선의 지형과 토양에 맞는 수종을 채택해 식목하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수종을 개발하고,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연구했다. '조선오엽송 노천매장 발아촉진법'은 그 대표적 사례로, 그는 양묘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는 양묘법을 연구해 조선의 산천에 입식(入植)시켰던 바, '현재 한국의 인공림 37%가 아사카와 타쿠미의 공이 들어간 나무'라는 평을 듣는다. 이렇게 조선에 식목사업에 매달리던 그는 과로 등으로 발병한 급성폐렴으로 1931년 4월 2일, 만 40세로 사망했다.
4월 2일 그의 장례식이 임업시험장(현 청량리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치러졌을 때 억수 같은 비에도 조선인들이 서로 상여꾼을 자원해 돌아가면서 운구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니, 그만큼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터였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핍박받는 조선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에 사는 한, 조선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청량리 근방의 한옥을 얻어 살며 조선인과 같이 먹고 입고 마시며, 외출 시에는 망건을 착용했다. 따라서 당연히 조선인으로 비쳤지만 일본 순사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이에 전차 안에서 망건과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그를 본 한 일본 순사가 "요보.(조선인의 '여보'를 비하한 말) 세키오 유즈레!(자리를 양보해)"라고 비하하며 조롱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한복을 고수했다. 그의 유언도 "흰색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조선 예법으로써 조선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1884-1964)는 일찍이 조선의 자기에 매료돼 한국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로 재직했는데, 오랫동안의 천착한 도자기 연구로써 '조선 도자기의 신(神)'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사카와 타쿠미 역시 조선의 자기와 민예품에 천착하였던 바, 전국의 가마터를 찾아 연구하고 그곳에서 수습한 파편들을 제 형 노리다카와, 친구이자 유명 민예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에게 보냈다. 그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총독부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울러 주변 빈민 구제를 위해 애쓰기도 하였으니 박봉의 월급은 대부분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였고, 아버지를 잃은 학생의 학비를 대신 지불해 졸업시키기도 했다. 이에 그의 대문 앞이나 부엌에는 고마움의 표시인 과일과 농작물 등이 놓였는데 그나마 없는 사람들은 그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주었다. 이것을 본 야나기 무네요시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선 사람은 일본인은 미워해도 아사카와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데, 다쿠미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볼 수 있다.
"조선인 아이들은 특별히 이쁘다. 왠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일본의 행위가 이 아름다운 천사와 같은 사람들의 행복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다면, 하나님,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1922년 1월 28일)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내가면서까지 숭경(崇敬)을 강제하는 신사 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 없다. 남산 정상에서 경복궁 안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1922년 6월 4일)
그는 자신의 형 노리다카와는 따로 조선의 자기와 소반을 연구해, 그 안에서 조선만의 독창성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한국 문화가 중국 아류라는 일본인들 주장에 맞설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그는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수집한 한국의 자기들을 전부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했다. 이상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모태가 된 이 조선민족미술관을 그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건립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24년 마침내 경복궁 집경당 내에 조선민족의 이름을 건 미술관을 세울 수 있었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부인인 성악가 가네코가 1921년 5월 경성에서 개최한 음악회의 수익금 3천 엔을 기반으로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는 여러 일본인 부호들을 만나 건립기금을 모금했는데, 기부한 사람 중에는 독립운동가 백남훈, 김중년,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 민족지도자 조만식 등도 있었으며, 가네코는 1924년 다시 경성에 건너와 두 번째 공연을 가짐으로써 모금에 힘을 보탰다. 미술관 개관 후에는 노리다카가 개인 소장 고미술품 3천 점과 도자기 서른 상자를 기부했으며, 타쿠미 사후 동생을 대신해 미술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조선 미술에 대한 연구 결과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와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냈는데,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우리 공예와 도자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보물 같은 책"이라고 찬했다. 타쿠미는 <조선의 소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당시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예언이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 흉내를 내기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 망우리 공원묘지 내의 관련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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