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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 호머 헐버트와 성삼문과 신숙주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5. 07:12

     

    한국의 우리나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헐버트는 15년간의 집념 어린 연구와 발품을 아끼지 않은 노역으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대한제국 쇠망사(The Passing of Korea)≫라는 두 권의 명저를 탄생시켰다. 이중  ≪한국사≫는 ≪대한제국 쇠망사(The Passing of Korea)≫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역작인 듯 ≪파란 눈의 한국인 헐버트≫를 쓴 김동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사≫는 2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409쪽과 398쪽으로 800쪽이 넘는 360,000개의 단어로 쓰인 초대형 한국 역사책이다..... 헐버트는 단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기록한 ≪동사찬요(東史纂要)≫를 공부하면서 한국 역사에 흠뻑 빠졌다고 스스로 밝히면서, 자신은 외국인으로서 한국 역사를 가장 깊게 연구한 사람이라는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사≫는 헐버트의 역사에 대한 천재성이 발휘된 실로 놀라운 대작이며 이렇게 방대한 영문판 한국 역사 기록은 지금까지도 필적할 만한 책이 없다고 여겨진다. 

     

     

    1962년 미국 맨스필드 주립대학 윔스 교수가 극찬과 함께 재출간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 헐버트는 그에 앞서 1908년 관립중학교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 역사≫라는 순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 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는데, 이마저도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이에 1909년 금서로 조치되었으니 한글로 쓰인 조선 역사서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일 터였다. 헐버트는 미국에 보낸 편지에서 일본 경찰이 영장도 없이 들어와 책을 몰수해 불태웠다고 분개했다. 

     

    더불어 한글에 매료됐던 헐버트는 "한글은 과학적이고 간편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로서,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에 하나님에 틀림없다(It is certainly one of the finest alphabets in existence)"는 사실을 여러 매체에 논문으로, 혹은 기고 형식으로 발표했다.(☞ 'III 헐버트ㅡ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

     

    그중에는 세종이 밝힌 창제 목적과 원리, 애민 정신을 다룬 논문도 있었는데, 헐버트는 특히 세종대왕의 창제 목적에 대해 "어려운 한자를 쓰는 백성을 위해 한글을 독창적으로 창제했음은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이라고 상찬해 마지않았다. 

     

    헐버트의 기고문들을 보면 ≪세종실록≫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내용들도 다수 눈에 띄지만, 개중에는 발품을 팔아 채록한 내용들도 있는 듯하니, 더러는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스토리가 실렸다. 이를테면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일익을 한 성삼문이라는 학자에 관한 일화'라면 소개한 아래의 내용 같은 것이다.   

     

    성삼문이 태어나기 직전 성삼문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세 번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성삼문이 태어나기 전, 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서 아들이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성삼문의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다음 날에 또 소리가 들리면서 같은 질문이 왔다. 또 아니라고 답변했다. 

     

    셋째 날에 똑같은 질문이 왔다. 그때 성삼문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대답하면서 왜 세 번 질문했느냐고 하늘에 물었다. 하늘에서 대답하기를 첫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세계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두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는 '조선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세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난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예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성삼문의 아버지는 세 번의 질문이 있었다는 뜻에서 아들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했다. 헐버트는 그 글의 끝 구절에서 '실제로 성삼문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아들 중 하나였으며,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하여 모든 사람이 훌륭한 문자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라며  세 번째 질문의 의미와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이상 ≪파란 눈의 한국인 헐버트≫에서 발췌)  

     

    앞서 말한 대로 육영공원이 폐교된 뒤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이후 다시 와 국립학교인 관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우연찮게도 관립중학교 자리는 세종조 시절 성삼문이 살던 곳이었다. 이후 구한말 그곳에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서재필이 살았고, 을사5적 중의 한 명인 매국노 박제순이 살았다.(그는 한일병합조약에 동의한 경술국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자리했고 지금은 정독도서관이 있는데, 그 입구에 성삼문 집터 표석이 서 있다.  

     

     

    정독도서관 입구의 성삼문 집터 표석

     

    헐버트가 언급한 인물은 아니지만 한글 창제에 일익을 한 학자로는 신숙주(申叔舟, 1417~75)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집현전의 인재로서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집현전 학사들과 달리 수양대군의 쿠데타(계유정난)를 묵인하고 세조 편에 붙어 실과(實果)를 누렸다. 까닭에 을사오적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변절자의 대명사로서, 잘 변하는 숙주나물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문적 소양만큼은 뛰어났고, 특히 언어학적으로 발군이었으니 신라시대의 이두문(吏讀文) 해독에 어려움이 없었으며, 중국어 · 일본어 · 몽골어 · 여진어 등의 말에 능통해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했다.(<연려실기술>) 이에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로서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했음 것임은 틀림없을지니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한글창제 사적비가 이를 증명해준다. 

     

     

    신숙주 묘 /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에 부인 윤씨와 함께 묻혔다.
    1971년 한글학회에서 세운 한글창제 사적비
    오른쪽 비각 안의 신도비 / 성종 8년(1477)에 세운 4면에 글씨가 쓰여진 독특한 형태의 대리석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모든 나라의 음운(音韻)을 두루 통달하여 손수 그 나라의 언어를 번역하여 올리니 어학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이 번거롭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쉽게 통달할 수 있었다"(公旁通諸國音韻 手翻諸譯以進 學譯者不煩師授)는 내용이 있다.

     

    성삼문은 반정(反政)을 기도하며, 동지들에게 "범옹(泛翁, 신숙주의 자)은 나의 오랜 벗이나 그 죄가 심히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하였으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혀갔다. 그리하여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국왕 세조를 '나리'라고 불러 세조를 뚜껑 열리게 만든 일, 고문을 가하려 불에 달군 인두를 지질 때 인두가 식었으니 더 달궈오라며 기백을 보인 일, 그리고 배석한 신숙주에게 "범옹은 원손(元孫, 단종)을 잘 보살펴 달라는 선대왕(세종)의 부탁을 벌써 잊었는가?" 꾸짖자 신숙주가 부끄러워 건물 뒤로 숨었다는 이야기 등은 매우 유명하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 속의 사육신 추국 장면
    추국의 현장 경복궁 사정전
    사육신 묘 중의 성삼문과 하위지 묘
    성삼문의 묘
    사육신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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