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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II 헐버트ㅡ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2. 06:26

     

    흥미로운 썰을 먼저 늘어놓자면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한 최초의 외국인은 호머 헐버트가 아닌 중국인 위안스카이(원세개)였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쿠데타 갑신정변의 진압을 위해 내한한 23살의 위안스카이가 이후 조선 정부에 얼마나 모욕적인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앞서 '청일전쟁이 남긴 것(I)ㅡ한미수교를 대신 체결한 청나라 리훙장' 등에서 누누이 설명했다. 정말이지 그놈은 못된 자식이었는데, 이 하급 장교는 훗날 황제가 되었다. 인품을 떠나 명석한 구석은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그는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였고 이에 매료된다.  

     

     

    말년의 위안스카이

     

    그는 중국 글자인 한자는 그 수가 너무 많고(언필칭 5만 자) 익히기 어려운 문자로서 중국 국민의 높은 문맹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정확한 진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서 접했던 한글을 도입해 중국의 문맹률을 낮추려 했다. 한글은 아무리 꼴통이라도 1주일이면 터득해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자 대신 한글을 사용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그 반대의 명분인즉 다분히 중국다웠으니 "망한 나라의 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亡國之音, 何謂國字)"는 것!

     

    이처럼 반대가 심하자 불안전한 권좌에 앉아 있던 위안스카이는 일단 한글 도입안을 보류했는데, 이후 이것저것 사건이 터지고 1916년 요독증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한글 도입 계획도 사라진다. 그런데 그 계획이 1950년대 중국의 실권자였던 류사오지에 의해 되살아난다. 우리에게는 유소기(劉少奇)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이 된 인물이다. 그 역시 위안스카이와 같은 생각으로써, 한글을 도입해 중국인의 문맹률이 낮추려는 이른바 문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곧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이 참전이 참전하게 되는 대전쟁에 휘말리며 한글 도입안은 다시 사라졌다. 사후 공개된 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직 중국 문자개혁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몽골, 조선, 베트남은 이미 문자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 그들의 어문개혁은 우리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들은 우리의 한자를 들여가 사용했으나, 그중 조선의 한글은 이미 오랫동안 쓰여 오기도 했습니다. 조선대사 이국원은 (한자 대신) 한글만 사용해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점을 우리가 유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어문연구자들이 조선의 문자개혁 경험을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학생들이나 학자들을 이들 나라에 보내 배우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자개혁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출처: 한글문화연대 누리집)

     

     

     마오쩌둥과 류사오지

     

    1886년 한글을 처음 접한 헐버트의 놀라움을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자신의 회고록에 "배우기 시작한 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피력했다. 이후 한글 학습에 더욱 매진한 그는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것이 앞에서 말한 <사민필지>이다.(☞ 'II 호머 헐버트와 육영공원') 육영공원 학생들의 교과서로 쓰인 그 인문학 책의 서문에서 헐버트는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한 한글의 가치를 오히려 한국사람이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고 있음을 통탄하고 있다.  

     

    생각건대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쉽도다.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사민필지≫ 서문
    호머 헐버트

     

    헐버트의 한글에 대한 소감을 요약하면, 첫째는 엄청나게 과학적인 글자라는 사실, 둘째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는 이렇게 훌륭한 글자를 한국인 스스로가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인의 객관적인 눈으로써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발견한 그는 한글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알렸는데, 그중 1903년 미국의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Institute) 학회지에 보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글의 우수성은 그 밖에도 많지만..... 누가 보아도 한국어는 영어나 기타 서양 언어들보다도 대중연설에 적합하다. 키케로나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에서와 같이, 많은 절로 구성된 한국어는 끝에 오는 동사에서 문장의 절정에 이른다. 또한 영어문장을 대개 용두사미로 만들어버리는 현상, 즉 문장 끝에서 약해지는 현상이 한국어에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어는 대중연설 언어로서 영어보다 훨씬 우수하다 말할 수 있으며..... 한글은 대중 의사소통 매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

     

    또 그는 1892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에 창간호부터 한글을 우수성을 알리는 논문을 실었는데,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과학적이고 간편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라는 것으로서, 영어와 달리 발음기호가 불필요하며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간편해 쓰기와 말하기가 세계 어느 언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쉽다는 것이었다. 한글을 티베트어와 산스크리트어의 구조와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도 있다. 

     

    한글은 문살 문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 없다. 지금의 동그라미가 원래 세모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말은 사실이며 자음과 모음을 모두 문살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한글보다 더 간단하고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 시스템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글 창제자가 완벽한 음성학적 기준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를 알아보자. 맨 처음 글자를 완성한 이후 버려진 글자는 단 두 글자다. 하나는 모음을 약간 강렬하게 발음할 때 목구멍에서 약해지는 소리(ㆆ)이고, 다른 하나는 희미하게 내는 소리(ㅿ)이다. 

     

    조선에는 각 소리를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진정한 소리글자(true alphabet)가 존재한다. 모음은 하나 빼고(※ '아래 아'를 말한 것 같다)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한글 조합의 과학성은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ㅏ와 · 는 소리 차이가 없으니 이중 중 하나는 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국의 소리글자와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세종은 어려움을 마다치 않고 한자를 변형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문자인 소리글자를 창제하여 한자로 인한 백성의 고충을 덜어준 첫 번째 인물이다..... 한자는 세종 때 진작 폐기되었어야 했다.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자를 던지고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띄어쓰기를 매우 강조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설명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띄어쓰기와 점찍기는 그가 제자인 주시경과 함께 도입한 것이다. 

     

     

     '장비가 말을 타고'와 '장비 가말(sedan chair)을 타고'는 천지 차이다.

     

    * 4편 '호머 헐버트와 주시경'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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