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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머 헐버트와 육영공원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1. 07:31

     

    길모어의 부인은 꼬박 일주일을 누워 있다 겨우 기력을 회복하고 일어섰다. 뉴욕에서 제물포까지 온 약 두 달 간의 여행보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의 하루 여정이 훨씬 힘들었을 터였다. 아무튼 훗날의 회고처럼 헐버트에게는 한국에서의 첫날이 힘들고도 기쁜 날임에 틀림없었겠는데, 잠시 후 말을 타고 나타난 언더우드는 그 기쁨을 배가시켰다. 목적은 달랐지만 먼 조선 땅에서 같은 미국인을 만났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기쁨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젠틀한 사람이었다.

     

    ~ 북미 장로교회에서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1859-1916)는 선교 목적으로써 헐버트보다 약 10개월 앞선 1885년 4월 5일 조선 땅을 밟았다.(☞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II-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

     

    한국에 올 때인 23살 무렵의 헐버트
    한국에 올 때인 26살 무렵의 언더우드

     

    헐버트는 언더우드가 살고 있는 정동의 외국인 전용숙소(foreign quarter)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자신이 일할 정동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찾았다. 육영공원은 근대 서양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고종이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로서 당대 고위관원의 자제들이 교육의 대상이었다. 헐버트 일행은 바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校舍)는 그렇다 하더라도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으니 그 무렵 창궐한 콜레라가 하루에도 300~400명의 사망자를 양산해내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 헐버트는 비망록에, 아침에 숙소 가까이에 있는 소의문(서소문)이 열리면 매일 300~400명의 시체들이 들려 나왔던 바, 추산컨데 도성 안에서 1천 명 정도, 그리고 도성 밖에서 1천 명 정도가 매일 죽었으며, 전국적으로는 수십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지금은 사라진 소의문 /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찍은 사진
    육영공원은 화살표 쪽에 있었다. / 오른쪽은 경운궁(덕수궁)이며 왼쪽으로 사람이 보이는 길이 오늘날의 덕수궁 돌담길이다.
    맨 왼쪽 건물이 육영공원으로 추정된다.
    육영공원으로 가는 덕수궁 길
    덕수궁 돌담길의 운교 표지판 / 1902년 덕수궁이 확장되며 궐외각사와 연결되는 운교(구름다리)가 놓였으나 헐버트의 육영공원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의 육영공원 터 표지판
    육영공원 자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 육영공원이 있던 곳에는 후일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세워졌다가 일제가 1928년 경성재판소를 지었고(현 건물) 광복 후에는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

     

    헐버트 일행은 창궐하는 콜레라 속에서, 또 폭염과 장마 속에서, 그리고 극성부리는 모기와 싸워가며 제대로 된 육영기관을 만들기 위해 진력했다. 그들은 맡은 바 소임인 육영공원의 교육을 위해, 더불어 이곳에서 배출된 학생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헐버트는 의외로 육영공원 건립에 있어 미국 공사관 무관으로 대리공사 역할을 했던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의 노력을 크게 평가했다.(<Korea Review> 1901년 10월호)

     

     

    보빙사를 수행하던 시절의 조지 포크/ 왼쪽부터 수행원 메이슨 대위, 민영익, 안내를 맡은 퍼시벌 로웰, 서광범, 홍영식, 수행원 포크 소위
    초대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재임 1883-1885)와 조지 포크(가운데 붉은 점) /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은 통역인 윤치호다. 포크는 1885년 1월 푸트 공사가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육영공원의 학생은 크게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뉘었다. 좌원은 과거에 합격한 젊고 유능한 관리가 선발되어 집에서 통학했고, 우원은 15~20세에 이르는 고관 자제 중 똑똑한 자가 선발되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좌·우원을 합친 총원은 35명이었다. 이들의 학원 생활은 매우 엄격하였으니 규율을 어기는 자는 본인은 물론 부모까지 처벌하겠다는 고종의 엄명이 있었다.(헐버트가 기고한 <뉴욕 트리뷴>지의 내용> 

     

    정부에서는 초빙된 3명의 선생, 즉 헐버트와 길모어와 벙커를 위해 통역사를 붙였으나 통역이란 자들의 수준은 지지리 낮았던지라 오히려 하나하나 단어를 가르쳐줘야 했다. 답답한 마음의 헐버트는 아예 자비로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웠다. 헐버트는 3명의 독선생을 차례로 두었는데 세 번째 선생을 흡족히 생각했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세 번째 한글 선생은 영어를 그때도 못했고 그 후에도 못했지만, 인성이 좋고 이해력이 빠르며 준비성이 있고 두뇌가 명석한 사람으로 그에게 진 빚은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헐버트에게 인식시킨 사람이라고 했는데, 헐버트의 한글 사랑에 관해서는 따로 지면을 만들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헐버트는 이렇듯 열심히 한국말을 익혔음에도 수업 중에서는 절대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육영공원의 수업은 외국어 과목 이외의 다른 과목도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쉬는 시간에도 영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와 같은 학습방법 때문인지 학생들은 매우 빨리 영어를 습득하였으며, 본래 복잡한 한문 글씨에 단련된 사람들인 까닭에 글씨는 모두 훌륭하였고, 어떤 학생은 선생보다도 영어 글씨를 잘 써 헐버트를 비롯한 선생들을 놀라게 하였다.

     

    ~ 이들 학생 중에 좌원에 속한 이완용이 있었다. 앞서 '이완용과 독립협회'에서 말한 대로 그는 과거에 턱걸이했으나 어쨌든 합격했으므로 좌원에 들 자격이 있었고, 게다가 양아버지 이호준의 배경이 있어 입학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이때 배운 영어를 평생의 무기로 삼았으니 1887년 미국 주재 공사로 갈 수 있었고,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또 친일파로의 변절이 가능했다. 역시 말한 바 있지만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화에서 언제나 영어를 사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런던대학 화학과 출신이다)

     

    헐버트는 자신의 제자 중에 매국노 이완용이 나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분노했으니,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일본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며, 다른 미국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독립전쟁 당시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군의 편을 든 아놀드 장군(Benedict Arnold) 같은 놈'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반면 학생 중에는 훗날 주영국 공사로 근무하다 을사늑약 체결 후 런던에서 자결한 이한응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과목은 헐버트가 가르치던 '세계지리'였다. 당시 외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학생들에 있어 세계지리 과목은 세상을 보는 창문이요,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었다. 이 과목의 교재가 헐버트가 직접 집필한 <사민필지(士民必知)>로서 이 책에는 각국의 지리뿐 아니라 태양계와 지구에 대한 설명, 일식과 월식, 세계 여러 나라의 위치와 정치 형태, 풍습, 종교, 인종, 산업, 교육, 군사력까지를 망라해 피력했다. 그는 이 책을 순 한글로 지어 초판 2000부라는 엄청난 부수를 찍었는데, 이는 책의 제목 그대로 '관리나 일반 백성이나 반드시 알아야 지식(knowledge Nessessary for All)'이었기에 일반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민필지≫ 아시아 편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민필지≫ 아프리카 편 / 국립한글박물관
    ≪사민필지≫ 남아메리카 편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등록문화재로 신청된 ≪사민필지≫ / ≪사민필지≫는 개화기 최초의 교과서인 ≪서유견문≫에 앞서는 교과서일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보다 앞서 한글 활자체를 시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총 161쪽의 <사민필지>는 수정본인 2판에 이어 3쇄가 나왔고 한문번역본도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아라사(러시아)를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수백 년 간 아시아와 유로바(유럽)를 잠식한 나라로 설명했고, 초판에서 옝길리국과 합즁귝으로 표기됐던 두 나라의 국명을 2판에서는 영국(英國)과 미국(美國)으로 표기하였던 바, 오늘날 표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즉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기존 한자권 표기인 '미리견합중국(米利堅合衆國, America United States)'의 '쌀미(米) 자'에서 탈피한 '美國'이 사용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米國'이다. (※ 1909년 일제는 전체적인 내용이 자극적이라 하여 <사민필지>에 대한 출판과 판매를 금지시켰다)  

     

    시험(Test)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부담스러워하는 일임에 틀림없는데, 육영공원에서의 시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학교는 국왕의 명에 의해 설립된 왕립학교답게(영어 이름은 Royal College, 혹은 Royal English College였다) 간혹 고종이 문답시험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까닭에 헐버트는 고관인 학부모로부터 시험문제의 사전 유출에 대한 청탁을 받기도 했고, 답안을 가르쳐달라거나 점수를 높여달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물론 헐버트에게 통할 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인쇄 등에 관련된 관리를 통해) 유출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속상해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헐버트는 1888년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그리고 한국에 오기 위해 헤어졌던 여친과 다시 만나 결혼을 한 후 같이 한국으로 왔다. 우연찮게도 그녀는 사범대학(Hunter College) 출신이었던 바, 한국에 온 후에는 이화학당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헐버트는 육영공원 교사 외에도 왕립병원 제중원 학생들의 영어교육까지 담당했는데,(1888년 3월부터 하루 2간씩) 이에 늘 몸이 피곤하였지만 열정만큼은 초지일관이었다. 오히려 육영공원의 학생들이 그의 열정에 따르지 못했으니, 급기야 학생들의 요청으로 수업 시간도 6시간에서 4시간으로 단축되었다.

     

    헐버트는 수업 시간 단축에 반대해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학구열 저하에 따른 실망감에 길모어는 5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1889년, 사직 후 미국으로 돌아갔고, 헐버트는 몇 년을 더 버텼으나 그 역시 1894년, 사임을 하고 귀국했다. (헐버트가 돌아간 해  육영공원은 폐교되었다) 다만 벙커만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육영공원 폐교 이후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었고 1902년 아펜젤러가 사망하며 2대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갔던 헐버트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요청으로써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1893년) 조선 정부가 육영공원의 후속으로 만든 관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 황제의 교육담당비서실장(Superintendent of Education for the Entire Kingdom)이 되었는데,(1898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 3편으로 이어짐

     

      

    1904년 관립중학교 교사 시절의 헐버트
    관립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헐버트
    정독도서관 앞의 관립중학교 표석 /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 관립중학교이다.
    당주동 '주시경 마당'의 헐버트 상 / ≪사민필지≫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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