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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V 호머 헐버트와 주시경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4. 06:09

     

    1891년 육영공원 교사 계약기간이 만료 후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가 1893년 아펜젤러 등의 감리교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1893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일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이후 그는 조선 정부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교사들을 양성하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장 겸 교사로서 강단에 서게 되는데, 그에 앞서 잠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울러 감리교 선교사의 본분으로 아펜젤러가 운영하는 삼문출판사(Trillingual Press)의 책임자로서 아펜젤러와 함께 성서번역사업을 추진했다.

     

    ~ 영어 Trillingual은 ' 세 언어'라는 뜻이나 흔히 '3개 국어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유럽제국의 언어는 어형과 어미의 변화로 문장을 만드는 라틴어 계통의 굴절어군(群)에 속함으로써 단어만 알면 문장을 엮거나 대화를 나누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 그래서 의지만 있다면  Trillingual이 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생판 다른 언어(문자)인 한글, 영어, 한문의 경우는 Trillingual이 힘드니,  아펜젤러가 주로 기독교 계통의 인쇄물을 출판하던 그곳을 삼문(三文, Trillingua)출판사라 이름한 것은 이와 같은 이방이 언어를 극복해 선교에 원활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 삼문출판사에서는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소설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 출간되기도 했다. (☞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의 동상

     

    잘 알려진대로 배재학당은 외국인(선교사 아펜젤러)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학(私學)으로 이 당시의 학생이었던 이승만은 훗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헐버트는 이곳에서 육영공원 시절과 다름 없는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학생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였으니, 한글은 과학적이고 간편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로서, 한글과 견줄만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생들 가운데서 헐버트의 이 말을 가장 새겨들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주시경이었다.

     

     

    복원된 배재학당 동관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1885년 8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했으며,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동관이 있던 자리는 아펜젤러 기념 공원이 됐다. 
    배재학당 자리에 조형된 기념 표석

     

    이에 주시경은 본래 지닌 남다른 언어학적 재능으로서 그때까지 아무런 체계가 없던 한글을 다듬어 갔는데, 잘 알려진 대로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든 사람도 바로 주시경이었다. 우리말 '한'은 크다는 뜻이며, 또 '하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므로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의 단어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정음, 언문, 혹은 조선글로 불려지던 우리말은 비로소 '한글'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사민필지≫ 서문에서 보았듯 헐버트도 처음에는 '조선 언문'이라는 표현을 썼다)

     

    두 사람은 함께 한글을 연구했다. 헐버트는 주시경에게 서양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한글을 배우는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한글을 연구하였는데, 경제사정이 좋지 못했던 주시경을 위해 헐버트는 자신이 운영하는 삼문출판사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아가 서재필과 함께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만들 때,(당시 서재필도 배재학당의 선생이었다) 주시경에게도 역할을 주어 한글 활자의 제작과 원고 교정 등을 맡게 했다. 

     

     

    당주동 '주시경 마당'의 헐버트 상 / 기둥에 '한글과 견줄만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써 있다.
    주시경(1876-1914)과 1914년 펴낸 한국 독본 《말의 소리》 / 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불의의 죽음을 맞는다.
    한글학회가 탄생한 봉원사 / 1908년 8월 31일 주시경은 김정진 등과 함께 이곳 '새절'에서 '국어연구학회'를 만든다.

     

    주시경은 헐버트의 배려와 보살핌에 힘입어, 또한 헐버트의 조력에 힘입어 한글을 더욱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어문법≫을 편찬하여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잡고, 오늘날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모태가 된 국문연구≫를 출간해 올바른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업적들을 쌓는다. 그밖에도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출간했으며 1908년에는 신촌의 '새절'(봉원사)에서 오늘날의 한글학회의 모체가 '국어연구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박동에 있던 보성학교에 일요강습소를 열어 많은 국어학자와 국어교육자를 길러냈으며, 또한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했는데, 당시의 제자인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는 주시경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길고 긴 나의 학문의 바다 여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나아갈 길을 지도해 주신 스승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그중에서 나에게 결정적 방향을 지시하였고, 따라 나의 추모의 정한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스승님은 조선 청년이 누구든지 다 잘 아는 근대 조선어학 최대의 공로자인 한힌샘 주시경 씨이다..... 오늘날 같으면 조선어 선생을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지마는 그 당시에는 주 선생 한 분뿐이었다. (《조광》 1936년 1월호/ 「조선어의 은인 주시경 선생」)

     

     

     주시경 마당'의 보따리를 든 주시경 상 / 등사판에 박은 교재를 보따리에 싸서 늘 들고 다닌 까닭에 '주보따리'로 불렸다.

     

    이렇듯 주시경으로 하여금 사장되었던 한글을 되살리게 만든 헐버트는 그 밖에도 우리 민족의 숨은 우수성을 간파해냈는데, 1949년 7월 2일 자 <스프링필드 유니언>에 보낸 기고문에서는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제시했다.

     

    첫째,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 발명.

    둘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서의 일본 격파.

    셋째,  임금이 국사를 편견 없이 기록하여 3년마다 정리, 3부씩 보관한 역사 기록 문화.

    넷째,  기원전 1122년 한족 5천 명을 이끌고 넘어온 기자를 한민족으로 만든 이민족 흡수 문화.

    다섯째,  1919년 3.1운동 때 보여준 한민족의 애국심.

     

    * '호머 헐버트와 성삼문과 신숙주'로 이어짐

     

     

    당주동 주시경 마당 / 서울시는 2013년 12월 주시경 선생과 헐버트 박사를 기리는 '한글역사인물 상징조형물'을 세웠다. 주시경과 헐버트 인물상을 돋을새김하고 한글 자음과 모음을 조형했다.  
    위 조형물을 세운 작가 주영호 / '본 작품은 한글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위해 헌신한 주시경 선생과 헐버트 박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 분들의 애국 애족 정신을 본받아 한글과 나라 사랑의 의미를 함양하고자 표현하였다'라는 작품설명이 붙어 있다. 작품의 제목은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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