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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온 벽안(碧眼)의 여의사 로제타 홀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1. 30. 03:35

     

    구한말의 푸른 눈의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의 일생을 약술(略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1889년) 뉴욕에서 빈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하다 1890년 10월, 보구여관(普救女館)의 두 번째 여의사로 내한했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 병원으로, 이름은 명성황후가 하사했다. (※ 保救女館은 잘못된 한자표기임)

     

     

    로제타 셔우드 홀
    정동제일교회와 이화여고 사이에 위치한 보구여관 터 표석

     

    당시 서울에는 알렌(Allen)이 경영하는 왕립병원 제중원이 있었고述,(☞ '박영효와 홍영식') 메리 스크랜튼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운영하던 정동병원이 있었으나 아직 남녀가 유별했던 까닭에 여자들은 대부분 여의사가 있는 보구여관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초대 의사였던 메타 하워드는 첫해에 1,137명을 치료하였고, 이듬해에는 1,423명의 환자를 돌보았는데, 결국 과로로 건강을 해쳐 2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로제타 홀은 그 후임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미국에 있었으면 전도양양하고 편한 삶을 살 수 있었을 로제타가 굳이 낯선 나라 조선을 택한 것은 선교와 봉사를 삶의 목표로 삼은 까닭이었다. 그는 처음 10개월 동안에 무려 2,350명의 여자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 외 82명에 대한 왕진을 실시했으며, 35명을 입원 치료시키는 강행군을 했다.

     

    그는 이듬해에는 더 많은 환자를 돌보았는데, 그러면서도 의료인력까지 양성하였으니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손으로'라는 구호 아래 이화학당 학생 4명과 일본 여성 1명으로 의학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기초적인 의학 공부를 시켰다. (이중의 한 명인 김 에스더가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유학하여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정동제일교회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의 정문
    이화학당 내에 있었던 보구여관
    2020년 마곡동 이대 서울병원 내에 재현된 보구여관

     

    가냘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로제타 홀은 매우 강인한 여성인 듯했으니 1892년에 동대문 쪽에 볼드윈 시약소(Baldwin Dispensary)라는 분원을 설치하고, 다시 1921년에는 동대문 병원이라는 분원을 설치했다. 볼드윈 시약소는 한국 여성의료사업을 위하여 돈을 희사한 미국 클리블랜드에 사는 볼드윈 여사(L. B. Baldwin)에 대한 헌정으로, 이 두 병원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의 기초가 되었다.

     

    * 축약해서 말하면 정동 보구여관은 1930년 동대문으로 이사와 분원과 합쳐지며 '동대문 부인병원'이 됐고 해방 후 이대병원이 됐으며 1993년 목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2020년 마곡동에도 다시 이대 서울병원이라는 이름의 초현대식 병원건물이 세워졌는데,  아직까지는 무리한 확장이라는 세평(世評)이 따른다. 

     

     

    동대문 이대병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08년 폐원 뒤 철거됨)
    건물 1동이 리모델링되어 한양도성박믈관으로 쓰이고 있다.
    병원 터에는 보구여관과 구 동대문 이대병원 건물이 그려진 기념동판이 조형됐다.

     

    뿐만 아니라 정동 보구여관은 간호학교의 효시이기도 했으니 1902년에 내한하여 보구여관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에드먼드(M. J. Edmund)는 1903년 보구여관에 간호원양성소(The Nurses’ Training School)를 설립하여 한국인 간호원을 양성시켰는데, 여기에도 로제타 홀이 일익 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을 터이다. 아울러 로제타 홀은 평양에 맹아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최초로 특수교육을 실시하였고, 최초로 점자를 도입하여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 외도 전국에 많은 병원과 특수학교, 의료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 축약해서 말하면, 죽은 남편 홀에 헌정한 기홀병원(Hall Memorial Hospital, 1897년), 광혜여원(여성전문 병원, 1898년), 맹학교(1900년, 한글 점자 교과서 발행), 농학교(1910년), 해리스 기념병원(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1912년), 동대문병원(1921년), 조선 여자 의학강습소(1928년),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을 위한 게암 학교(시기불명) 등 많은 병원과 기관을 세워 의사들을 초빙했고, 특수교육을 실시했으며, 후학을 양성해 한국 근대 의료의 기반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 해리스 기념병원은 1897년 10월에 내한하여 5년간 서울과 평양에서 부인병 치료를 담당하다가 1902년 평양 광혜여원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린 여자를 치료하던 중 감염돼 사망한 의사 릴리언 해리스에 헌정했다.    

     

     

    평양 광혜여원 병동 (기홀 병원과 함께 쓰인듯)

     

    반면 개인적 삶은 매우 불행하였으니, 그녀는 1892년 같은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윌리엄 홀과 결혼하였으나 신혼 초에 사별하였다. 닥터 홀이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 평양전투의 부상병을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사망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딸 이디드마저 3살 때 풍토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 죽었는데, 로제타 홀은 자신의 일기 속에 딸의 진료와 간병 기록을 단장(斷腸)의 아픔과 함께 담았다.

     

     

    홀 부부
    딸 이디드와 아들 셔우드
    양화진 전시관의 로제타 홀의 일기
    마지막 가족 사진
    홀의 71세 때 사진 / 한복을 입고 있다.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로제타 홀의 한글점자 교본

     

    다행히도 아들 셔우드 홀은 건강히 자랐으니 캐나다 토론토 의대에서 학위를 딴 후 돌아와 역시 의사인 아내 마리안과 함께 16년간 한국민의 의료를 위해 진력했다. (특히 결핵 퇴치를 위해 노력했던 바, 국내 최초로 결핵요양원을 건립하였으며, 크리스마스 실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로제타 홀은 45년간을 한국에서 봉사하다 1951년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고, 이후 남편과 아들 딸들을 비롯한 6명의 가족묘가 마련되었다. 지금 생각 나 적게 되었는데, 홀 가족은 무료 진료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환자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전하는 과일이나 계란 정도는 받았다고 한다. 

     

    로제타 홀의 가족묘
    셔우드 홀 공적비
    셔우드 홀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 왼쪽 것이 최초의 실로서 처음에 만든 거북선 도안 실이 일제에 의해 거부되는 바람에 남대문으로 바뀌었다. 그가 세운 해주구세요양원 글자도 보인다.
    메리 스크랜튼의 묘
    인천 로제타 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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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