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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고아들을 돌본 의인(義人) 소다 가이치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1. 28. 19:24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래서 그 역시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일본인 선교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교사가 아니다. 다만 크리스천이긴 한데, 그가 크리스천이 된 이유는 오히려 한국 YMCA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에게 감회됐기 때문이다. 이 낯선 이름의 묘비명에는 '고아들의 자부(慈父)'라는 문구가 함께 쓰여 있다.  

     

     

    소다 가이치와 부인의 묘 / 서울 양화진

     

    즉 그는 이 땅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삶을 살다 영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이치의 젊은 날의 생을 보면 그는 고아들과는 물론 한국과도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나가사키의 광부를 거쳐 26살 무렵 노르웨이 화물선박회사의 선원으로 홍콩 등지에 체류하였고, 대만 주재 독일인 회사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도 근무했다. 이후 34살 무렵에는 중국본토와 대만을 넘나들며 여러 가지 사업을 꾸렸는데, 생각대로 순탄하지는 못했다. 이에 소다는 좌절감에 대만 고산지대를 누비는 산 사나이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곡절의 젊은 날을 보냈다.

     

    그는 37살 무렵, 결국 외국생활을 접고 고향인 야마구치 현으로 돌아왔으나 열패감에 따른 음주가 잦았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과음으로 길거리에 쓰러져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낯선 여관방이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으로부터 어떤 한국인이 쓰러진 그를 여관으로 업고 와 치료와 간병을 해주고 여관비와 밥값도 지불한 후 떠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정말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따로 없다)

     

    소다는 이 사실에 감복했다.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천대받으며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를 그 역시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감복할 수밖에 없는 구원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머지 삶을 조선인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했고, 38세 되던 1905년 6월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 왔다. 그리고 서울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일하며 한국인을 위한 봉사 생활을 시작하니, 그가 이상재 선생과 아내 우에노 다키코(上野瀧子)를 만난 곳도 그곳이었다. (그는 41세 때,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서른 살의 우에노 다키코와 결혼한다) 

     

     

    1909년의 황성 YMCA
    소다 가이치 부부

     

    그는 1911년 9월, 일제가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한국인을 대거 체포한 사건)을 일으키자 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찾아가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촉구하며 반일 활동의 전면에 나선다. 나아가 그는 와타나베 도루(渡邊暢) 대법원장을 찾아가 '105인 사건'의 피의자들을 탄원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사건에 이상재와 윤치호 등 YMCA 인사가 연루된 까닭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제의 조선 지배와 수탈에 대한 저항감의 표현이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였으며,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은 한국인들의 오해를 받아 '이중인격자'나 '일본의 스파이' 소리를 듣기도 했고, 거류 일본인들과 총독부 관리들로부터는 '반역자', '조선인 앞잡이' 소리를 들으며 불려 가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개의치 않고 꿋꿋이 제 길을 걸어갔다.  

     

     

    YMCA 시절의 소다 가이치 /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후 1921년, 그는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장이 되었다. 가마쿠라 보육원은 일본의 사회사업가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가 1896년 도쿄 가마쿠라에 설립한 보육원으로 1913년 중국 뤼순(旅順)에 이어 1921년 서울에도 지부를 냈던 바, 소다 가이치가 경성지부장으로 보육원을 운영하게 된 것이었다. 국가 지원금도 없고, 당시의 세계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국제 지원금마저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였다.

     

    그럼에도 소다 부부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으니 그들 수입의 전부는 모두가 아이들을 위해 쓰였다. 그 어려움 속에도 부부는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이와 부모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 보육했고, 부인 소다 다키코는 영아들의 젖동냥까지 다녔던 바, 그들 부부의 삶이 얼마나 지난했을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례로 부부는 매일 수레를 끌고 일본군 부대를 돌며 잔반을 얻어 와 아이들을 먹였고, 군대의 버려지는 군복들을 주워다 그것들을 뜯어 아이들의 옷을 해 입혔다.  .  

     

    *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는 후암동 전생서(典牲署) 자리에 있었다. 전생서는 조선시대 국가의 여러 제사에 사용될 짐승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전생서를 '관유토지건물 입찰불하'하였는데 이를 소다 가이치가 일본 가마쿠라 보육원 지원 자금으로써 1,310평을 매입해 보육원으로 사용했다.(지금의 후암동 영락보린원의 전신) 아래 사진은  소다 부부가 가마쿠라보육원 원생들과 기념촬영을 한 1935년 사진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집이 전생서의 정청(正廳)이다.  

     

     

    가운데 흰수염 사람이 소다 가이치, 그 오른쪽이 부인 다키코 여사다. / 배경 오른쪽으로 보이는 집이 전생서의 정청 간줄헌 (看茁軒)이다.
    후암동 영락보린원 앞의 전생서 터 표석

     

    소다 가이치는 보육원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잡혀 가면 일본 순사들에게 싹싹 빌어 빼오곤 했는데, 그때도 아이들을 한 번도 혼내지 않은 자애로운 아버지였다고 한다. 부인 소다 마키코는 1926년부터는 교사 일을 사직하고 보육원 일에 매달렸는데, 1950년까지 그들의 보육원을 거쳐간 아이들이 무려 1천 명을 넘었다.

     

    그녀는 해방 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한국에 머물렀고,(1947년 한국 영주권을 취득) 말년의 폐렴 속에서도 보육원을 홀로 경영하다 1950년 1월 74세로 별세했다. 당시는 해방 5년 후로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하던 시절이었으나 장례는 보건사회부 장관이 장례위원장이 되어 한국사회사업연합회장(葬)으로 엄숙히 거행됐다.

     

    그 당시 소다 가이치는 일본에 있었다. 그는 1943년 원산 일본인 감리교회의 운영자가 없다는 말에 그곳에 봉직하러 갔다. 이후 무보수로 봉직하던 그는 해방을 맞아 귀경하려 했으나 진주한 소련군의 횡포에 현지인들을 보호하며 맞서 싸우느라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1947년 11월 서울의 부인을 만나 후 일본으로 갔는데,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뜻하지 않게 남겨진 재일한국인들의 권익을 위해 가지 않았나 여겨진다. (실제로 그는 일본 전역을 돌며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그는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탓에 한국에 오지 못했다. 그러다 그의 봉사 인생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덕분에 1961년 5월 15일, 특별기 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당시 95세의 고령이었는데, 이후 가마쿠라 보육원의 후신인 후암동 영락보린원에서 예전처럼 고아들을 돌보다 이듬해인 1962년 3월 28일, 9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례식은 4월 2일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는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고사카 젠타로 일본 외무상이 조화를 보냈으며 유족 대표로 조카 마스다 스미코(增田須美子)가 참석했다. 그에게는 일본인 최초로 한국 정부의 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61년 한국 땅을 밟은 소다 가이치
    후암동 영락보린원
    묘소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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