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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머 헐버트(I)ㅡ조선과의 운명 같은 조우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1. 12. 20. 05:55

     

    양화진 외국인 묘소의 호머 헐버트 묘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일생을 몇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한국과 관련된 그의 일생은 그만큼 파란만장했으며 다사다난했다. 그리고 너무도 희생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푸른 눈의 애국지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말로 그러해서 그에 관한 여러 자료를 읽고 나니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는가 하는 감동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 가는 잘 알려져 있는 편이나, 최근 내가 알게 된 몇 개를 덧붙이고자 한다. (물론 기존의 자료와 중복될 수는 있다)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빈 헐버트버몬트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고,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증손녀였다. 헐버트 집안의 가훈은 '인격은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였다. 그가 어떤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는가는 이 가훈으로써 모두 갈음되니, 성장기에 이르러 '편법은 결코 원칙을 이기지 못한다(Expediency must always yield to princip)'는 좌우명을 갖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 아버지 칼빈 헐버트 사회적 명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칭송받을만한 도덕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도덕성과 남을 위한 배려, 사랑과 겸손을 주지시켰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는 집에 있던 흑인 하녀 제니(Jennie)를 늘 가족의 일원으로 대했으며 아침 가족 기도에는 꼭 그녀를 참석시켰다. 이에 그의 자녀들 역시 그녀를 가족으로 대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1884년, 헐버트는 이른바 아이비리그의 하나였던 동북부 명문대학인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뉴욕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던 그에게 아버지 칼빈 헐버트가 무척 생경하지만 호기심 당기는 소식 하나를 가져왔다. 최근 미국과 국교를 맺은 동양의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영어와 근대교육을 가르칠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은 미 국무부는 교육위원장 죤 이튼에게 이를 위임했고, 이튼은 대학선배 칼빈 헐버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칼빈 헐버트는 장남 헨리와 차남 호머에게 이 소식을 알렸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있다는 것일 뿐 강권(强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시 유니온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큰 아들 헨리의 반응 역시 시큰둥했으니, 아시아에 그런 나라가 있느냐는 정도였다. 하지만 호머 헐버트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으니, 즉석에서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는 훗날, "그 제안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 왔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흥분을 가눌 길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대학 졸업 무렵의 헐버트

     

    신기하게도(?) 그는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학시절 체육부장을 지낼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활달한 청년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문학과 역사와 세계지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리스 문학가 호머의 <일리어드>를 좋아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애독한 책이라 하여) 틈나는 대로 둥근 지구본을 돌리며 미지의 여러 나라를 상상 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가 코리아를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 때문으로, 조선에 대해 남다른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즉 필시 모험심 강한 활달한 성격이 그를 조선으로 이끌었을 터,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평소 지구본에서 바라보았던 미지의 나라 코리아에서 선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1883년 가을, 대학 수업 시간에 창밖 너머로 크고 둥근 차양이 달린 모자와 망토 같은 흰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으며 이들이 코리안일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는데, 그해 9월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퍼시벌 로웰과 조선')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는 광경과 당황해 하는 대통령을 그린 당시 신문의 삽화

     

    그가 한국행을 희망하자 선생 모집에 약간 암담한 기분이었던 국무부 교육위원장 이튼은 갑자기 힘이 난 듯 일사천리로 두 명의 더 뽑아 조선 정부가 원한 3명의 T/O를 맞췄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행은 뜻밖의 사건에 봉착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해 12월 일어난 개화파의 갑신정변과 그로 인해 어지러워진 국제 정세로 정부에서 외국인 선생 초빙 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국행 지원자들에게는 '일단 대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실망한 다른 두 사람은 취소 결정을 내렸으나 헐버트는 그 지시에 따랐다.

     

    그렇다고 마냥 대기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그는 자신의 형이 다니던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조선에 대한 공부를 했으니, 조선의 수도는 한성이고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온화한 기후(그러나 겨울에는 몹시 추운)를 가졌으며 인구는 1천6백만으로 대부분은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 되던 1886년 봄, 조선정부에서 육영사업을 재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튼은 헐버트에게 이 소식을 알리며 같이 갈 2명의 선생을 선발해보라고 권했다.

     

    헐버트는 원래의 지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길모어(Gilmore)와 새로운 지원자 벙커(Bunker)를 선발했다. 이후로는 마음이 급해졌으니, 미국의 공립학교 교육 시스템에 대해 알아보고 여러 교보재(敎補材)도 구입했다. (그는 곧바로 유니온 신학교를 중퇴했고 그 무렵 사귀기 시작한 여친과도 어쩔 수 없이 이별한다) 그리고 1886년 5월 6일, 일행과 함께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와 나가사키를 경유해 (나가사키에서 한국 가는 배로 갈아탔다) 7월 5일 아침, 드디어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당시 헐버트는 23살이었고 벙커는 33살이었으며 길모어는 30살 유부남으로 아내와 동행했다. 

     

    헐버트가 처음 마주한 조선의 항구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항구에는 등대도 없었고 큰 배를 댈 수 있는 접안시설은 커녕 제대로 생겨먹은 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가 힐끗 보니 일행들의 표정은 차라리 어처구니없다는 쪽이었지만 헐버트는 애써 내색을 삼가며 배에서 내려 조선 땅을 밟았다. 그때의 기분이 따로 기록된 자료는 없다. 하지만 굳이 설명이 없어도 그 벅찬 기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제물포항 풍경 /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월미도로, 헐버트는 미국인 선장이 그 섬을 로즈 아일랜드라고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병인양요 때 조선을 쳐들어온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의 이름이 붙었다.

     

    헐버트는 일행을 마중 나온 둥근 차양의 모자를 쓴 조선 관리와 만나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성문이 닫히기 전 도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별다른 교통편도 마련되지 않은 까닭에 꼬박 26마일을 걷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6월 1일에 느림보 중국 배(뻬이징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경유해 도착한 1개월여의 힘든 여정이었음에도 잠시 쉴 새도 없이 서울을 향해 걸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짐은 조랑말이 실어주었고, 길모어의 부인에게도 조랑말 한 필이 마련되었다.

     

     

    제물포항에 당도해 조랑말을 타고 이동하는 외국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이에 길모어 부인은 걷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녀 역시 한국을 추운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걸친 옷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곧 땀범벅이 되었으며, (게다가 날씨는 무려 35º였다) 그 위에 흙먼지까지 달라붙어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논두렁에 지날 무렵 조랑말이 엎어지는 바람에 설상가상 도랑에 처박히는 불상사마저 치러야 했다.

     

    이와 같은 고생 끝에 일행은 해가 지기 전 서울 어귀에 도착했으나, 서둘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고 또다시 걸음을 바삐 해야 했다. 곧 성문이 닫힌다는 몹시도 공포스러운 재촉 때문이었는데, 그 덕분인지 가까스로 남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행은 안내된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볏단 쓰러지듯 뉘었다.

     

    * 2편 '육영공원과 호머 헐버트'로 이어짐 

     

     

    일행은 한강 백사장 1마일을 걸어 작은 나룻배를 타는데, 부는 강바람에 처음으로 시원함을 만끽한다.
    헐버트가 보았을 별영창 읍청루(挹淸樓) / 별영창(別營倉)은 훈련도감 군량미를 저장하던 군창(軍倉)으로 벼랑고개에 있다 하여 흔히 벼랑창으로 불렸다. 한강변 절경으로 이름 높던 곳으로서 최근 마포 청암동 SK 주유소 옆에 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후에는 다시 땀비를 흘리며 술(戌)시의 닫힌다는 도성 남쪽 문을 겨우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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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