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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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중시계 앙부일구와 일성정시의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8. 23:40
앞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1888년에 착공하여 1892년 무렵 완공한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앞 시계탑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언급한 대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탑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공공재적 성격의 것은 아니다. 시간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건청궁에 살던 왕과 왕비, 그리고 관리나 나인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탑 자체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그 가치 매김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그전에는 공중시계가 아예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은 세종 16년(1434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공중시계가 설치됐다고 말하고 있으니 바로 앙부일구(仰釜日晷)라 불리던 해시계이다. 앙부일구라는 말을 풀이하자면 '하늘을 우러러보는(仰) 가마솥(釜)의 해 그림자(日晷)'로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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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2. 19:43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 1년 7개월간 보수·복원 공사를 마치고 5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1934년 서울 성북구 일대에 마련한 북단장(北壇莊) 권역 내에 건축가 박길룡(1898∼1943)에게 의뢰해 완공한 보물 전시관 보화각(葆華閣)이 그 효시로서, 우리나라 근대 사립미술관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의 일이다. 이번 전시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박길룡이 설계한 북단장과 보화각 설계 도면이 최초로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33살이던 전형필은 39살의 한국 1세대 근대건축가 박길룡을 만나 보물 전시관인 보화각을 의뢰하였는데, 금번 보수·복원 공사 중 박길룡이 직접 그린 설계도가 발견돼 그간의 설왕설래로부터 자유로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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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용마산 용마폭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0. 22:46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四佳亭)역과 중랑구 사가정로는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 1488)의 호를 따 붙인 이름이다. 사가정역 근방의 사가정 공원 역시 서거정의 호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가 중랑구 용마산 부근에 살았던 연고로 붙여졌다. 공원 안에는 그의 시비(詩碑)가 4개나 세워져 있다. 그래서 언뜻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가 개인 문집인 에 남긴 한시(漢詩)만도 무려 6500여 수에 이른다고 하니 지나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살아생전 시 짓기와 술 마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시벽(詩癖)을 고황(膏肓, 고질병)이라 했고, 잦은 음주에 대해서는 주마(酒魔)라고 표현했다. 술의 악마가 깃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음주로 인한 별다른 사건·사고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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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면목동에 살던 네안데르탈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0. 00:06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대개 '기록의 유무'에 따른다. 즉 문자의 사용 이전은 선사, 이후는 역사시대로 분류한다. 그중 선사시대는 구석기·중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시대로 나뉘는데 이번에는 그 구분이 '도구'다. 즉 당시의 인류가 타제석기(뗀석기)를 사용했으면 구석기, 마제석기(간석기)를 사용했으면 신석기, 함께 사용했으면 중석기, 구리로 만든 연장이나 무기를 사용했다면 청동기, 쇠로 만들어 썼다면 철기시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살아온 시대를 뭉퉁그려 역사시대로 분류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흔히 한반도의 역사를 35만년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는 1978년 당시 주한미군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병사 그렉 보웬(Greg Bowen)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그가 연천 전곡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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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근교의 최고 비경(秘景) 삼천사 계곡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8. 18:10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의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1)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절로, 흔히 진관사·흥국사와 더불어 북한산 3대 사찰로 불린다. 이 절을 정말로 원효대사가 창건했는 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이 절의 산령각 앞에 위치한 높이 3미터의 마애여래입상은 형식으로 볼 때 최소한 고려 초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시대적 가치와 조형미를 인정받아 1979년 보물 제657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삼천사에서 눈이 가는 유적은 그것이 전부다. 물론 절 자체가 옛 자리가 아닌 새 터에 지어진 새 절인 까닭에 옛 당우가 전혀 없기도 하지만, 너무도 화려하게만 꾸며진 탓에 그저 볼수록 정신 사나울 뿐이다. 물론, 뽀샵 지나친 절들을 혐오하는 개인적 성향이 반영된 결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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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 동네에 살던 혁명의 주역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4. 21:40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써 외면 하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야마구치현까지는 부산에서 약 215km이다. 다만 직항은 없어 전통의 부관페리를 타고 밤 10시에 출항하면 다음 날 아침에 7시에 시모노세키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관부연락선이라고 불렸던 부관페리는 부산과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한 자씩 따 붙였다.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약 1시간 30분을 가면 하기시 죠카마치(城下町, 성밑 마을)에 이른다. 1874년 스스로 해체한 하기 성(城)과 이어진 죠카마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유명한 요시다 쇼인(1830~ 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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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밤섬)에서 일어난 엽기적 살인사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3. 08:26
앞서 1편(☞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채 설명을 못했으나 밤섬이라는 지명은 와우산에서 본 모양이 밤톨처럼 생긴 데서 유래됐다. 당시에는 한자어인 율도(栗島)로 불렸다. 지금 보면 밤보다는 땅콩처럼 생겼으나, 과거 섬이 작았을 때는 밤톨처럼 보였을 것이니 아래 심사정의 그림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마(馬), 판(判), 석(石), 인(印), 선(宣)씨의 5개 희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앞서 말한 대로 배를 만들고 누에를 치며 생계를 이었다. 주민들은 길이 18m의 장도릿배, 15m 정도의 조깃배, 12m 정도의 늘배 등을 만드는 배 목수 일을 했다. 이들의 기술은 꽤 뛰어났던 듯, 상류인 단양·영월에서부터 하류인 김포·강화도에서까지 배를 만들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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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무인도 밤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 23:09
한강의 밤섬은 지금은 무인도이며 들어갈 수조차 없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던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천여 명의 주민들이 고깃배 제작과 함께 누에를 치고 약초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하는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섬 전체가 뽕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밤섬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이 버드나무와 뽕나무 군락이다. 1968년 섬을 폭파하고 뽕밭을 싹 밀어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를 만들었음에도 다시 섬이 생기고 뽕밭을 이룬 것을 보면 자연의 힘이란 정말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밤섬에는 1960년대 말까지도 78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마포 창천동 와우산 기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고,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다이너마이트 폭발 굉음과 함께 섬은 폭파되었다. 당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