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
잃어버린 광해군의 꿈 (I)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1. 20. 06:59
광해군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많은 궁궐을 지은 왕이다. 그는 1608년 왕위에 올라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의 15년간 궁궐만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궁궐 영건(營建)에 공을 들였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을 비롯해 인경궁, 경덕궁(경희궁), 자수궁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까지 복원하려 하였으니 폐위되지 않았다면 경복궁도 복원했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경희궁과 경복궁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만들어 그 두 곳을 하나의 궁궐로 연결하려는 SF와 같은 구상도 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듯 궁궐 건설에 집착했을까? 누구나 말하는 것처럼 서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의 컴플렉스 때문이었을까? 대규모 건축 사업은 국력의 낭비를 불러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는 상식과도 같은 역사의 범..
-
박영효와 홍영식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0. 3. 23:57
앞에서 김옥균의 화려한 스팩을 말했지만 부마도위(駙馬都尉) 박영효(1861-1939)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우선 부마도위라는 위호(位號)를 주목해볼 만한데 이는 임금이 사위에게 내리는 호칭을 말한다. 즉 그는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가 되며 이로 인해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를 받아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는데, 그가 철종의 딸과 결혼하게 된 데는 그 할아버지 우의정 박규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아울러 내각 총리대신과 주미전권공사를 지낸 박정양 역시 그의 집안이니 한마디로 금수저 출신이다. 과거는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워낙에 집안이 빵빵하다 보니 굳이 볼 필요도 없었을 터, 1878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시작으로 판의금부사까지 한 걸음에 내닫는다. 이미 설명한 김옥균과 서광범, 그리..
-
전봉준과 서광범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9. 28. 23:09
전라도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공주 우금치에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날렸다.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농민군의 희망은 거기서 끝났고 그들 농민군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꿈도 거기서 날아갔다. 수적으로는 4만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으나 대부분이 구식 화포에 죽창을 들었던지라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개틀링 기관총과 무라타 소총을 갈겨대는 일본군의 속사(速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 1894년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약 20일간의 공주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0월 25일 1차 전투가 끝났을 때 4만이던 병력은 1만으로 줄어 있었고, 2차 전투(우금치 전..
-
구암 허준과 송강 정철에 관한 일화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8. 6. 18. 09:11
국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언제나 비정상적으로 여겨진다. 만날 정신 없이 싸움질만하면서도 세비는 꼬박꼬박 챙겨간다. 에에 극단적으로는 국회 무용론이 나오기도 하고, 배가 뒤짚어지면 국회의원부터 구해야 된다는 좀 old한 우스개도 있다. 물론 물이 오염될까 봐서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 제도를 표방하고 있으니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회의 여야 싸움이 격화될 때마다 연상되는 것이 과거의 사색당파다. 아울러 과거의 조선은 그 같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 또한 연상된다. 하긴 조선 역사에 비춰 보면 지금 국회의원들의 정쟁(政爭)은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다. 그때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지는 쪽은 생명을 잃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파면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