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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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I) - 마지막 어전회의와 통감부 합병 비화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30. 00:07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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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29. 00:00
는 일제의 의병 탄압 기록물이다. 1913년 일본 조선주차군사령부에 의해 발행된 이 책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항일의병의 발생 원인, 교전 상황, 탄압 작전이 망라돼 담겨 있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위 기간 동안 일본군과 의병과의 전투는 2,852회를 넘었고 의병의 숫자는 141,815명에 달했다. 우리는 흔히 이 의병들의 궐기를 '한말의 의병운동'이라 부르나 이쯤 되면 '의병전쟁'이라 부르는 게 맞을 듯하다. 아울러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의병은 일제에게 충분히 공포스러웠고 위협적이었으며, 또한 결사적이었다. 에 의거한 아래의 표를 보면 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은 1907년 군대해산이 체결되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첫 총성은 앞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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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 - 남대문 전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20. 00:16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 I'에서 언급했듯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잃어버린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통감부의 지배를 받았던 바, 조선의 국권은 1905년 망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1907년(융희 원년) 7월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통감부의 통치가 합법화되었고, 이어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나는 1907년 8월 1일을 실제적으로 대한제국의 호흡기가 뽑힌 날이라고 보고 있다. 그 전날,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창덕궁의 순종 황제를 겁박해 군대해산조칙서의 사인을 받아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그 조칙에 의거, 무기를 무기고에 반납한 후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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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8. 23:40
이태원 경리단 길이 거짓말처럼 떴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느낌이다. 경리단 길이 유래된 경리단은 육군의 회계, 계약, 급여 등 재정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인데, 지금은 국군재정관리단에 흡수되며 도로명으로서 그 이름만 남게 되었다. 경리(經理)란 말은 회사의 재정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나 직책명으로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나 엄격히 말하자면 게리(けいり)에서 비롯된 왜색 짙은 단어다. 경리단은 상무(尙武)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전, 직업 운동선수들이 군복무를 대신하는 팀의 이름으도 쓰였으며, 까닭에 과거 경리단 야구팀은 언제나 실업리그를 휩쓸었다. 선수층이 두꺼우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리단이 있던 그 길은 언제부턴가 맛집과 멋집이 어우러진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미군부대와 외국 대사관의 영향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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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땅 이태원 - 임진왜란과 잉태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5. 23:59
임진왜란의 전범 가토 기요마사가 스쳐가기 전까지 이태원(梨泰院)은 그저 조용한 역원(驛院) 마을이었다. 배나무 꽃 아름다운 역참 동네 이태원은 오얏나무(자두나무) 이(李)의 이태원(李泰院)으로도 불렸던 바, 하얀 배꽃과 자두꽃이 어울려 흐드러진 풍치 있는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태원은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맑은 물이 산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고, 운종사 동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크고 깊은 골짜기에 가득하니 성안의 아녀자들이 피륙의 빨래와 표백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러한즉 본래부터 자연발생적인 마을이 있었겠으되,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가 영남지방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만든 역원 이태원으로부터였다. 원(院)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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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4. 00:35
숭례문이 대한민국의 국보 1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전에는 통칭 남대문이라 불려졌고 지금도 그와 같은 호칭이 일반적이나, 숭례문이라는 정식 이름을 되찾으려는 듯 지금은 도로표지판도 모두 바뀌었으며 인터넷 맵과 핸드폰 앱의 지명도 바뀌는 추세다.(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1934년 숭례문을 '남대문'의 명칭으로써 보물 1호에 지정함으로부터인데,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이후 숭례문으로 환원시켰다) 더불어 이 건축물이 대한민국 국보 1호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진행중이다. 숭례문이 남대문으로 불리운 건 알다시피 한양도성 4대문의 남문이기 때문이다.(유감스럽지만 그 명칭은 일제가 부여했다) 그리고 국보 1호가 된 건 한양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1398년에 지어진(14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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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노기(乃木) 신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2. 00:17
노기신사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라는 근대 일본군 장수를 기리는 신사이다. 우리는 대부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거니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노기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본인들에게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인들과는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대 타이완 총독을 지냈기 때문에 대만 사람들에게는 민감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조선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나 초대 총독 데라우찌 마사다케를 대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타이완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일본에 할양됐다) 그런데도 내가 그를 주목함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가끔 이곳을 찾아오는 일본인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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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1. 23. 23:58
대한제국의 운명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침몰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해군에 박살나자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종전(終戰) 회담 알선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1년 여의 전쟁 기간 동안 15억8,400만 엔이나 되는 전비(戰費)를 사용했는데, 예상했던 돈의 4배에 이르는 금액이었다.[각주:1] 일본은 전비의 거의 전부를 영국과 미국에서 빌려온 차관으로 충당했으므로 더 이상의 전쟁이 지속되면 국가파산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의 입장을 적극 받아들여 뉴햄프셔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 양국의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은 당연히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