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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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와 귀주대첩에 관한 몇 가지 의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0. 7. 21:57
서울 2호선 전철역 중 '낙성대'가 있다. 그 역이 공교롭게 서울대 옆이라 그 또한 대학교인가 착각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대학들도 꽤 있는 마당이라....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장난끼 가득한 뱃지 비슷한 것도 인터넷에 나돈다. 서울대 엠블럼을 흉내내 만든 듯한데 제법 그럴싸하다. ※ 개교년인 1983년은 낙성대역이 개통된 해라고 함. 2호선 낙성대 역 에는 낙성대 점퍼를 입은 학생 사진도 실렸다. 진실을 말하자면 낙성대는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으므로 낙성대(落星垈)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가 터에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를 건립하고 일대를 낙성대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 역 이름이 유래이다. 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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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장충단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7. 25. 23:59
* '장충단과 박문사'에서 못다한 이야기 앞서 말한 대로 장충단이라는 앞면의 예서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썼고 뒷면의 해서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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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과 박문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7. 24. 00:51
초등학교 시절 장충단(奬忠壇) 공원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살았다. 그래서 장충단 공원에는 정말이지 많이 왔고 특히 근방의 어린이 야구장(당시 리틀 야구장)에서는 거의 살다시피 했다. 당시 이웃 학교 애들이나 동네 친구들하고 야구공 내기 시합(당시 홍키공이라 불리던 약간은 귀했던 )에 미쳐 있었던지라..... 이후로도 이사 가지 않고 한참을 그 동네에 살았으니 장충단 공원에는 수없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충단 공원 이름이 왜 장충단인지 몰랐다는 거..... 그저 동네가 장충동이어서 장충단 공원인가 보다 했을 뿐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유래를 안 것은 최근이었다. 최근이라 함은 미스터 트롯 출신의 어느 가수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멋드러지게 불렀을 때이니 매우 가까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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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7. 14. 23:25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 (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이로써 한민족 역사 중에서 적어도 조선은 천신(天神)에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었고 땅과 곡식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제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예기》에 써 있는 규범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규범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했던 듯, 1464년(세조 10)까지 환단(圜壇=원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 국초(國初)의 환단은 지금의 한남동 매봉산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세조가 제사를 지낸 환단은 남단(南壇)으로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 부근에 있었다.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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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차경(借景)의 미(美)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7. 11. 23:50
한국의 예술과 건축을 논할 때 자연과의 관계를 빼놓으면 딱 절반만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의 예술과 건축은 규모가 크던 작던 간에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쳤던 바, 그것이 반(半)을 먹고 들어간다. 이렇듯 자연이 예술과 건축을 좌우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외에는 없을 듯싶다. 우리는 그것을 늘 보아 왔고 그래서 너무 눈에 익은 탓에 오히려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예술·건축과 자연과의 조화를 경탄해마지 않는다. 그것을 흔히 차경(借景)이라 부른다. '(예술과 건축에) 경치를 빌려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런 말 역시 우리나라밖에 없을 듯싶다. 얼마 전 문득, 새삼 그 차경을 느낀 뷰(view)가 있어 포스팅하려 한다. 언젠가는 쓰일 때가 있겠거니 해서 찍어온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스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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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3. 17. 21:12
임진왜란 때 깡그리 불탄 창경궁은 광해군 8년(1616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재건된다. 하지만 그 7년 후인 인조반정 때 일부 전각이 불타고 인조 2년(1624년 2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며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정전인 명정전(明政殿)만 남기고 다시 불타버린다. 이후 창경궁은 다시 재건되나 영조대왕 시절에 다시 대다수의 전각이 불타게 되는데, 이번에 방화범으로 몰린 사람은 공교롭게도 부왕(父王) 영조에게 늘 구박만 받던 세자 이선(李愃, 사도세자, 1735~1762)이었다. 영조 32년(1756) 5월 1일, 창덕궁에 살던 영조는 뭐 트집잡을 게 없나 하여 창경궁 낙선당에 살던 아들 이선을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선은 내시의 전갈에 놀라 일어나 다급히 아비를 맞으러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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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근방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3. 11. 22:30
사도세자의 비극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은 글이 포스팅되어 있어 내가 따로 부언할 거리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암 완치 기념으로(6개월 후의 검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간 서울대병원 일원에서 눈에 익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에 대해 사진과 함께 몇 자 글을 올리려 한다. 가장 먼저 말할 장소는 병원 입구의 함춘원지(含春苑址)이다. 함춘원은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위치한 창경궁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인조대왕 재위시절 사복시(司僕寺)[각주:1]의 마장(馬場)으로 쓰여지며 잠식됐고, 구한말 때 대한의원(大韓醫院)이 세워지며 뒷마당으로 쓰였다.(지금 조금 남아 있는 함춘원지는 사적 237호로 지정됐다) 함춘원지 경모궁 중문(내삼문)과 영희전 기단이 남아 있다. ~ 대한의원은 1899년 설립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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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뒤안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2. 27. 23:57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한말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차별당한 구식군대(훈련도감 등)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왕후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옹립한 사건이 1882년 임오년(고종 19) 6월 9일(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이다. 하지만 이들 구식군대들은 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척살되고 흥선대원군은 중국 천진(天津)으로 압송되니 쿠데타는 3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고종은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일에, 그것도 국가 간의 일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