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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와 귀주대첩에 관한 몇 가지 의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10. 7. 21:57
서울 2호선 전철역 중 '낙성대'가 있다. 그 역이 공교롭게 서울대 옆이라 그 또한 대학교인가 착각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대학들도 꽤 있는 마당이라....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장난끼 가득한 뱃지 비슷한 것도 인터넷에 나돈다. 서울대 엠블럼을 흉내내 만든 듯한데 제법 그럴싸하다.
※ 개교년인 1983년은 낙성대역이 개통된 해라고 함.
2호선 낙성대 역
<나무위키>에는 낙성대 점퍼를 입은 학생 사진도 실렸다.
진실을 말하자면 낙성대는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으므로 낙성대(落星垈)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가 터에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安國祠)를 건립하고 일대를 낙성대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 역 이름이 유래이다. 그런데 그곳이 강감찬 장군의 연고지인가는 살짝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우선은 그에 관한 전설이 전반적으로 앞뒤가 없으니 대표적으로는 낙성대의 지명 유래도 그랬다. 보통 별이 떨어지는 것은 위인이 태어날 때가 아니라 죽을 때 나타나는 징조이므로.....
안국사 안국문
안국사의 외삼문으로 고려시대 건물인 강릉 객사문을 모방해 지었다.
낙성대 안내문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찾아갔다는 송나라 사신과 태어난 아기가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스토리도 우습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직(前職)이 점성술사? 동방박사의 환생? 뭐 그런 내막 같은 것이 있는 자일까?(예전에는 그 사신이 아기를 데려가 키웠다는 설명문도 있었는데, 정말로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그 내용은 없어졌다)
재미있게도 개성에도 강감찬의 집이 있고 그 집의 이름도 낙성대이다.(태어나서 이사 갔다는 얘기렸다) 위치는 궁성 만월대의 남쪽 양온방의 태평관 부근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어린 전설은 서울의 집과는 정반대이다. 즉 그가 죽을 때 별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이고 강감찬은 고려의 관리였던 만큼 가뜩이나 그쪽으로 기울었는데, 낙성대의 지명과도 부합되는 바, 나는 개성의 낙성대가 진실에 가깝다고 믿고 싶다.
그가 태어난 집에서 옮겨왔다는 삼층석탑도 수상쩍다. 여기가 강감찬 장군의 생가 터라면서 옮겨왔다는 얘기는 또 뭔가 해서 봤더니 그에 부합되는 설명이 있었다. 안국사와 낙성대 공원을 조성하며 가까운 생가 터에 있던 탑을 옮겨 왔다는 것이다. 탑신의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라는 명문(銘文)까지 얼추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내 눈에 옳게 보이는 건 그것이 고려시대 탑이라는 것과, 원래 관악구 봉천동 218-9 번지 자리에 있었다는 것 뿐, 나머지는 얼척없다. 그것이 강감찬의 집에 있었다는 근거도 없거니와 탑은 일반적으로 절에 세워진다.
내 생각에는 주저리주저리 전설 만들기를 하지 말고 그저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 장군을 기려 이곳에 그의 사당인 안국사를 세웠다고 하는 편이 깔끔하지 않을까 한다.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장소라면 다만 그것으로도 충분한데, 1974년 정부가 이른바 호국사업을 벌일 무렵 안국사를 건립하며 봉천동 218-9 번지의 석탑을 생가 터의 것이라면서 옮겨 놓은 듯하다.(필시 탑신의 여섯 글자도 그 무렵의 것으로 개성 흥국사의 것을 흉내낸 듯)
낙성대 삼층석탑(문화유산채널 사진)
뒤에 보이는 건물이 강감찬 장군의 사당 안국사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모방해 지었다.
낙성대 표석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시고자 장군이 출생하신 이곳 관악산 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落星垈'라는 휘호를 하사하시었다...." 라는 내용의 유신시대 글귀가 써 있다.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의 명문(銘文)
탑이 있던 곳에 세워진 강감찬 장군 유허비
차제에 말이거니와 강감찬 장군의 이름 역시 문제가 있다. 그의 이름은 姜邯贊(고려사)과 姜邯瓚(흥국사 석탑)의 두 개가 전해지는데, 한자는 조금 달라도 발음은 같은 '찬'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운데 이름자 '감'은 문제가 되니 그것을 '한'으로 불려야 될 지 '감'으로 불려야 될 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邯은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 한단지몽(邯鄲之夢)에서 알 수 있듯 '한'이 독음이다. 여러 자전을 찾아봐도 邯이 '감'으로 불린 용례를 찾지 못했는데, 다만 인터넷 자전에서는 邯을 '땅 이름 한'과 '고을 이름 감' 두 가지로 적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위의 '한'이 '감'이 된 건 오로지 글 자를 착각한 결과다. 한약의 감초(甘草)는 단 맛이 나는 초본류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 '달 감(甘)'자는 邯과 비슷하다. 혹시 邯을 '이름자로 쓸 때는 감으로 읽는다'는 법칙 같은 것이 있으면 모를까, 강감찬의 '감'은 '한'으로 읽혀져야 옳다.(성이나 이름 자로 쓸 경우 발음을 달리하는 한자가 종종 있으나 邯이 이름자의 경우 '감'으로 불려진다는 용례가 적힌 자전은 보지 못했으므로)
~ 그래도 강한찬 장군의 것은 답이 있으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같은 경우는 답이 없다.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귀양 간 정약전이 지었다는 물고기 백과사전인 그 책을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玆을 우리에게 익숙한 慈(사랑 자)나 혹은 '풀나무 불어날 자'자로 착각하여 그간 '자'로 읽혀졌지만 글자의 훈과 음은 '검을 현'이니 독음은 '현산어보'가 되어야 맞다는 것이다. 정약전이 자신의 호를 玆山으로 한 것은 흑산도(黑山島)의 이명(異名)이니 그와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증명할 길은 없다.
발음을 어쩔?
다 아는 바와 같이 강한찬 장군은 1019년 2월2일 지금의 평안북도 귀주 근방에서 벌어진 10만 명의 거란 침략군과 싸움에서 고려군의 승리를 견인한 명장이다. 이것이 귀주대첩으로, 흔히 이 싸움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한민족 3대 대첩'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쟁으로 얼룩진 5천년 한민족사 중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분명 매우 큰 싸움에서의 승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고려사>에만 기록된 전투가 아니라 거란의 역사 책인 <요사(遼史)>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돼 있어 과장의 역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당시 고려를 3번이나 쳐들어온 거란, 즉 요나라는 중국 최초로 북방을 통일한 나라로써 그 영역과 세력이 어마어마했던 국가였다. 이에 중원의 송나라도 세폐를 바치며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고려는 그 강한 요나라와 세 차례나 맞짱을 떠 모두 이겼다. 그 1차 침입 때 문관인 서희가 외교 전략으로 소손녕의 90만 대군을 물리치고 덤으로 강동 6주까지 얻어낸 쾌거를 앞서 '고려 외교관 이장용'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거란족의 요나라가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 일단 아래 지도를 보자.
요(遼)의 영토
귀주대첩이 벌어졌던 거란과의 3차 전쟁은 1018년 12월, 요나라 소배압이 우피실군이라 불리는 황제 직속의 최정예군 10만 기병을 몰아 내려오며 시작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한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침략군의 2배 정도에 이르는 20만 8천 명을 차출해 전장으로 보내는데, 당시의 인구를 생각하면 아마도 젖먹이를 제외한 모든 남자가 동원되었을 성싶다. 고려가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었다는 말일 테다. 그런데 고려는 이 싸움에서 의외의 대승을 거두었던 바, 26년간에 걸친 거란과의 싸움은 종식되고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된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이는 오로지 강한찬 장군의 작전의 승리였다. 소배압은 2차 침공 때 실패를 맛본 난공불락의 흥화진성(현 의주군 위원면)을 우회해 개성 북쪽의 신은현(新恩縣)을 유린하고 이후 자주(慈州)와 귀주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강한찬은 이를 감지하고 귀주성으로 이르는 산중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대천(大川)을 막은 후 적들이 도강할 때 일시에 물을 터뜨렸다. 이에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매복해 있던 병사들을 공격시켜 승첩을 거두었다는 것이 <고려사> 강한찬 열전의 개요다.
사실 이와 같은 수공(水攻)은 매우 위력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니 <삼국지 연의>에서도 수 차례 등장하며, 대표적으로는 관우가 번성에서 같은 방법으로 조조의 대군을 전멸시킨 일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기가 2월이라는 데 있다. 거란군이 12월에 군을 이끌고 내려온 것이나 훗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12월에 침공을 한 것은 압록강을 비롯한 강들을 여하히 건너기 위해서였다. 즉 이때가 되면 모든 강이 결빙되므로 도강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한 2월 초하루에 강물을 막아 수공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그럼에도 <요사>에는 다하(茶下)와 사하(蛇河)를 건널 때 고려군이 나타났다고 기록돼 있는 바, 뭔가 답을 구하긴 구해야 할 것 같다.
다하와 사하는 귀주성 동쪽의 동문천과 백석천(혹은 풍소천)으로 짐작된다. 그 두 물줄기(아래 그림 참조)는 분명 큰 강이 아니니 2월 1일에는 꽁꽁 얼어 있었을 것이나 다만 그것이 음력이라면 조금 숨통은 트인다. 올해를 기준으로 말하면 음력 2월 1일은 양력으로 2월 24이고, 우수는 2월 19일, 경칩은 3월 5일이다. 여기서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옛 속담을 빌리면, 그리고 날씨가 예년보다 조금 따뜻했다면 두 강은 적에게 혼란을 줄 만큼의 수량을 확보할 수가 있게 된다.(<고려사>에도 혼란을 주었을 뿐, 수장시키거나 익사시켰다는 말은 없다)
거란의 1~3차 칩입
귀주성과 거란군의 공격로( ← )
요즘 역사가들은 수공보다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의 군대가 반령발판에서 효과적인 포위전을 펼친 것을 대승의 요인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튼 <고려사>에 기록된 귀주대첩은 다음과 같이 장하다. "거란군의 시체는 들판을 뒤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낙타·갑옷 및 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僵尸蔽野俘獲人口·馬駝·甲冑·兵仗不可勝數. 生還者僅數千人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개성 흥국사탑
귀주의 대승을 기념해 세운 탑이다. 화살표 표시에 아래의 기념 명문이 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개성 유수영의 문루.(알라딘서재 사진)
흥국사탑 기단부의 명문
현종 12년(1021년) 강한찬이 거란과의 전쟁을 종식시킨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안국사 안의 기념화
강한찬 장군의 개선과 흥국사탑 건립을 왕과 백성들이 함께 축하하고 있다.
강한찬의 외모와 행실에 대해서 <고려사절요>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품은 맑고 검소했으며 먹고사는 일을 꾀하지 않았다. 젊을 때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기이한 책략이 많았다. 체격과 외모는 작고 볼품없었으며 옷은 때가 묻고 헐어서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얼굴빛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섰고 큰일을 대할 때면 큰 계책을 결정해 부지런히 움직여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性淸儉 不營產業 少好學 多奇略 體貌矮陋 衣裳垢弊 不踰中人 正色立朝 臨大事 決大策 矻然爲邦家柱石)
그 행실만큼은 그야말로 공직자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안국사 강한찬 장군의 영정
<고려사절요>의 묘사에 충실하려 했는지 뭔가 허접한 느낌이다.
하지만 낙성대 공원의 동상은 참 잘 만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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