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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진흥왕릉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8. 26. 23:07

     

    거두절미하고 말하건대 지금껏 알려진 경주시 선도산 고분군의 진흥왕릉은 진흥왕의 무덤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신라왕릉에 대한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일로서, 조선 영조 시절 경주김씨 종친회에서 별다른 고증없이 비정한 것이 지금껏 진흥왕의 무덤이라 하여 전해져 오는 것이다. 진흥왕은 작은 나라 신라를 대국으로 진흥시킨 자로서 명실공히 태왕(太王, 황제)의 지위를 누린 군주였다.(☞ '태왕의 순수비에는 무엇이 써 있나?) 따라서 그의 능묘를 찾는 일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왕의 무덤이 아래와 같은 꼴로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어렵거니와 묘제(墓制)의 편년과도 비껴난다. 그래서 모두들 이 무덤이 진흥왕의 능묘일 확률은 0%라고 입을 모으는데, 과거 추사 김정희는 진흥왕의 무덤을 찾아 경주를 탐방하며 "진흥왕과 같이 뛰어난 공적과 성대한 업적을 남긴 이의 활과 칼, 유품 등은 전해오지 않으며 무덤조차 모르는데, 하물며 나머지 능에 대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장탄식을 내뱉기까지 하였다.(以眞興嵬功盛烈 弓劒遺藏 泯沒無傳 其下三陵 又何言也)

     

     

    진흥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는 곳

     

    진흥태왕의 무덤,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네.(오마이뉴스의 사진과 글)

     

    진흥왕릉?

    진흥왕릉 앞에 현장학습을 온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답사자들 뒤의 무덤은 진지왕릉. 진흥왕은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불리는 개척 군주이지만 무덤은 그저 '추장' 수준이다.(오마이뉴스의 사진과 글) 

     

     

    진흥왕의 치적을 따지자면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일 외에도 화랑도를 창설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일, 불교를 진흥시키고 거찰 황룡사를 건립한 일, 김거칠부로 하여금 자국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점 일을 들 수 있으니 크게 정치를 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왕의 무덤이 위 '오마이뉴스' 기자의 표현대로 추장급에 불과한 바, 어처구니가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남아 있는 황룡사지만을 보더라도 위와 같은 비정은 감히 힘들 터, 나는 위의 무덤에 진흥왕의 이름을 갖다붙인 경주김씨 종친회의 어느 종친을 왕손(王孫)의 자격으로 규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2012년 발표된 김용성, 강재현의 논문 <신라 왕릉의 새로운 비정>에는 그간 신라왕릉 연구에 천착한 강인구, 이근직의 연구 성과가 실렸는데, 우연찮게도 두 사람의 연구 결과는 진흥왕의 무덤을 서악동 2호분으로 보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결과인 만큼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담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 중 이근직 교수의 주장인즉 "무열왕릉 뒤편 서악동 고분군은 중고기 왕릉으로, 이곳의 1호분은 진지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4호분은 법흥왕릉으로 각각 비정된다"는 것이다. 

     

     

       왕

    재위기간

     장지기록(삼국사기 본기, 왕력)

     강인구 비정

     이근직 비정

     비고

     23대 법흥왕

     514-540

     葬於哀公寺北峯, 陵在哀公寺北

     서악동 1호분

     서악동 4호분

     

     24대 진흥왕

     540-576

     葬于哀公寺北峯

     서악동 2호분

     서악동 2호분

     일치

     25대 진지왕

     576-579

     葬于永敬寺北, 陵在哀公寺北

     서악동 3호분

     서악동 1호분

     

     

    진흥왕릉은 서악동 2호분?

    김용성, 강재현의 논문 <신라 왕릉의 새로운 비정>에 실린 강인구, 이근직의 서악동 왕릉 비교

     

    서악동 고분군

    왼쪽부터 통칭 1, 2, 3, 4호분이다.

      

    이근직 교수가 주장하는 서악동 고분 주인

    "1호분은 진지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4호분은 법흥왕릉으로 비정된다." 

      

    이근직 교수

    평생을 신라왕릉 연구에 천착했으나 2011년 재직 중이던 경주대 앞에서 일어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사진: 경상일보)

     

     

    이것은 또 '신라사학회'의 연구 결과와도 같은 바,(<경주 서악동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왕릉 명칭 비정>) 그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경주 서악동고분군은 신라 마립간 시기 경주선상지에 조영되던 왕릉이 지증마립간(지증왕)을 끝으로 법흥왕부터 왕경 외곽 구릉지로 옮겨 조성된 처음 왕릉들이다. 신라 중고기를 대표하는 왕릉군인 이곳이 조선말 김정희에 의해 왕릉으로 비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나름 근거를 제시하면서 왕릉 주인을 비정하였다. 그러나 기록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우리는 그간의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재해석하고, 현장의 유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롭게 왕릉 주인을 비정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확실한 태종무열왕릉에서 출발하여, 애공사와 영경사의 위치를 추정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애공사와 영경사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된 자료를 현장에 적용하여 확인하였고, 애공사와 영경사를 기준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를 이용하여 비정하였다. 결과적으로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4호분은 진지왕릉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3호분은 솔직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주인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다만 추정해 본다면 진흥왕비 사도부인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왕비로서 장례에 관해 기록이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고, 진흥왕릉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계통의 예쁘장한 통일신라 탑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이 문제의 애공사지로, 말년에 불가에 귀의한 진흥왕이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사학회가 주장하는 서악동 고분 주인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4호분은 진지왕릉이 확실하며 3호분은 진흥왕비 사도부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상의 주장들은 모두가 추정이다. 이상은 학자들의 주관적 추정에 그간 무덤 위치의 바로미터가 돼 온 애공사와 영경사를 끌어들인 것이니, 예를 들면 <삼국사기>의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於哀公寺北峯)",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秋七十七日 王薨 諡曰眞智 葬于永敬寺北)"와 같은 내용들이다. 

     

    '신라사학회'도 이와 같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나 사실 이러한 기록은 확실한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우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를 때도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법흥왕릉의 경우에는 애공사 북봉(삼국사기)과 애공사 북쪽(삼국유사)으로 같지만,

    진지왕릉의 경우에는 영경사 북쪽(삼국사기)과 애공사 북쪽(삼국유사)으로 애매하고,

    무열왕릉의 경우에는 영경사 북쪽(삼국사기)과 애공사 동쪽(삼국유사)으로 다르다.

    (진흥왕릉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에 애공사 북봉 하나만 실려 있다)

     

    즉 애공사와 영경사가 사천왕사와 망덕사, 황룡사와 분황사처럼 앞뒤 집이었으면 모르겠으되, 웬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면 기준점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애공사와 영경사 중에서 그 위치가 확인된 곳도 없는 마당이니 나침판이나 지도책도 없이 장소를 찾고 있는 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위의 학자들은 애공사와 영경사의 위치도 모르면서 왕릉의 위치를 비정했을까? 이것이 궁금해질 즈음 이번에도 예의 김정희가 등장했다.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찾아 고증하고,(☞ '문무왕의 사천왕사와 감은사') 화쟁국사(원효대사) 비의 대좌를 찾아냈으며,(☞ '사도행전과 금강삼매경론') 진흥왕의 순수비를 고증하기도 한(☞ '태왕의 순수비에는 무엇이 써 있나?') 바로 그 추사 김정희다.

     

    과거 김정희는 두 번 이상 경주를 방문했다. 첫 방문인 1817년, 그때 그는 다른 왕릉보다도 진흥왕릉 찾기에 주력하였으니 그것을 위해 애공사와 영경사를 탐사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는 사지(寺址)를 영경사로 추정했던 바, 태종무열왕릉 근방에서 절 터로 보이는 곳은 거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攷)>에서도 그 첫머리는 '태종무열왕릉 위에 있는 네 개의 큰 왕릉'(太宗武烈王陵上 有四大陵)에서부터 출발한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김정희는 이 탑을 근거로 영경사를 추정했다. 뒤에 보이는 무덤들이 선도산 고분군으로 현재 진흥왕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도 여기 있다. 경주 김씨종친회에서 이곳에서 진흥왕릉을 찾은 것은 '애공사의 북쪽 봉우리'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좇은 결과로서, 영경사와 애공사를 앞뒷집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1824년 두번째로 경주를 방문했다. 그때 그는 <창림사 무구정탑원기>를 판독하고 <동경잡기>(1669년), <여지도서>(1765) 등을 참고하여 보다 면밀한 조사에 나섰다. 그리하여 서악동 고분군을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무열왕보다 후대의 왕인 문성왕릉과 진지왕릉이 무열왕릉보다 위에 위치한 사실이 조선의 장법과 어긋났던 바, 이것은 후손의 묘가 선조의 자리보다 높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단지 조선의 사고일 뿐 신라인들은 도장지법(倒葬之法, 逆葬)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신라진흥왕릉고>에 남겼다.(聖憲安俱係太宗後 不當在太宗陵上 而倒葬之法 後人所忌 古則不然)

     

    추사의 고증이 맞는지 그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상 진흥왕릉과 당연히 같은 곳에 있어야 되는 법흥왕릉을 떼어놨던 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는<동경잡기> 능묘조의 기록과 법흥왕릉이 서악리에 함께 있다는(俱在西岳里, 김정희는 애공사·영경사 북쪽을 서악리로 보았음) <여지도서> 능묘조의 기록을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결과와는 다르지만, 어찌됐든 김정희가 진흥왕릉을 선도산 고분군에서 끌어내려 서악동 고분군에 정했다는 것은 나름 의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김정희가 비정한 서악동 고분 주인

    1호부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으로 추정하였다. 화살표시가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김정희가 진흥왕의 무덤을 서악동 고분군에서 찾은 일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김정희가 진흥왕릉을 선도산 초라한 고분으로부터 탈피시킨 일은 바람직했지만 서악동 고분군 중의 하나를 진흥왕의 무덤으로 정한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진흥왕릉이 영경사의 북쪽에 있다는 옛 기록을 존중해 서악리 삼층석탑이 있는 자리를 영경사로 비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쪽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에서 진흥왕의 무덤을 찾았다. 엄연한 이율배반이다.

     

    그것은 김정희 뿐만 아니라 강인구와 이근직, 그리고 신라사학회도 마찬가지이니 그들도 「진흥왕, 진지왕, 법흥왕의 무덤이 영경사와 애공사 북쪽에 있고, 무열왕릉은 영경사 북쪽, 애공사 동쪽에 있다」는 사서의 결정적인 증거들을 외면하고 그 능묘들을 모두 영경사와 애공사의 남쪽에서 찾았다. 이를테면 이근직은 사서의 기록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경사와 애공사가 같은 절이었다고 주장하며, 2006년 4월 30일 서악동 고분 4호분 남쪽 50m 지역(일부 주택이고 나머지는 밭으로 이용되는)에서 발견된 기와편과 무문전(무늬 없는벽돌)을 근거로 그곳을 애공사지(=영경사지)로 추정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모든 주장은 무덤의 위치에 관해 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반영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의존한 판단이므로 전혀 옳다고 할 수가 없다. 진흥왕, 진지왕, 법흥왕의 무덤이 태종무열왕릉과 가까이 있을 것으로만 여겨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 마침 그 곁에 큰 무덤 4개가 놓여 있는 까닭에 그것과 억지로 꿰맞추는 '쉬운 선택'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진흥왕, 진지왕, 법흥왕의 무덤은 그곳에 있지 않았던 바,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그 능침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시각을 넓히면 영경사와 애공사의 북쪽으로 그들이 누워 있을 만한 곳은 차고도 넘친다.

     

     

     

     

    이름 모를 건물지들과 함께 있는 인왕동 고분군

     

     

     

    대릉원 부근의 황오동 고분군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노동·노서동 고분군의 큰 무덤들

     

     

     

    쪽샘 지구 고분군에는 왕릉급 무덤이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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