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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과 드라큘라 백작의 최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7. 11. 06:51
1453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1461년까지 약 8년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소국들을 모두 평정하고, 드라큘라 백작이 다스리는 왈라키아 공국을 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이에 남은 것은 대규모 진격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겨울의 혹한이 진격의 고삐를 늦추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드라큘라는 오히려 역으로 오스만 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던 바, 얼어붙은 도나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와 흑해 연안 일대의 이슬람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때 벌인 이슬람인들에의 처형은 훗날 그가 블라드 체페슈(Tepes; 꼬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드라큘라는 붙잡은 이슬람인들을 모두 꼬챙이에 꽂아 죽이거나 몸을 토막내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던 것이었다.(그 중에는 항문에 꼬챙이를 끼워 매달아 서서히 죽임과 동시에 체중에 의해 그 꼬챙이가 입으로 나오게 만드는 처형 방법도 있었다 하는데, 이같은 광경을 보며 식사를 하는 드라큘라의 판화 등이 훗날 그를 흡혈귀로 만드는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가 이와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포로들을 죽인 것은 자신이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슬람인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약소국의 군주인 그가 적에게 공포심과 위축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인즉 그 외는 별로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드라큘라 백작은 이와 같은 처형을 대량으로 행했다 뿐, 사실 당시는 이 이상의 극악한 처형 방법도 흔한 시절이었고, 게다가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다)
~ 잠시 동양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우리에게 익숙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가 있다. 알다시피 이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인도주의나 쓸데없는 인정은 오히려 화를 부른다는 뜻인데, 출전은 <십팔사략(十八史略)> 등으로 원전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개괄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에 양공(襄公)이라는 군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도 패자(覇者)가 되고 싶어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초나라 성왕(成王)의 군사와 홍수(泓水)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초군이 강을 건널 준비를 하자 양공의 태자 목이(目夷)가 말했다.
"적이 강을 건너느라 분주합니다. 이때 저들을 몰아치면 반드시 대승을 거둘 겁니다."
하지만 양공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준비도 안 된 적을 어찌 공격하겠는가? 잠시 기다려라."
초군이 강을 건너자 다시 목이가 말했다.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진열(陣列)을 갖추기 전 몰아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역시 송공의 대답은 같았다.
"진열도 안 갖춘 적을 공격하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적이 진열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라."
이에 모든 채비를 마친 초군은 송나라의 군대를 몰살시켰다.
드라큘라는 이와 같은 송양지인을 사양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어찌됐든 이는 메흐메트 2세를 격분시키기 충분한 행동이었을 터, 1462년 봄 그는 자신이 직접 12만 명의 대군과 175척의 함대를 이끌고 왈라키아 원정에 나섰다.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래의 최대 군사작전이었다. 1462년 5월 오스만 군은 도나우 강 브러일러 포구에 상륙하였고 다음 달 공격을 개시하였다.
반면 이에 맞설 왈라키아 군의 병력은 최대 3만 정도였던 바, 드라큘라는 정면 승부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내륙 깊숙한 타르고비슈테로 후퇴했다.(II편의 지도를 다시 옮긴다) 그리고는 그 길까지의 모든 곡식과 식량거리를 불태우는 청야(淸野)작전을 펼침과 동시에 모든 식수원에 독을 풀어 적에게 한 방울의 물도 마실 수 없게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놔 두고 중간 식수원부터 독을 풀어 살상을 극대화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타르고비슈테의 중세시대 성벽
타르고비슈테 법원 거리에 있는 드라큘라 시대의 유적
아울러 드라큘라는 추격하는 적들에 대해 왈라키아의 울창한 숲을 이용한 게릴라식의 역공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소리 소문 없이 숲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공격을 하고 사라지는 무리들은 오스만 군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드라큘라는 날랜 특공대를 조직해 메흐메트 2세에 대한 직접적인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추격을 멈출 메흐메트도 아닐 터, 그해 6월 마침내 타르고비슈테에 도착했으나 그가 만난 것은 예의 꼬챙이에 꿰어진 시신들 뿐이었다. 드라큘라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본보기로 처형한 후 사라진 것이었다.사라진 드라큘라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 게다가 한여름의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오스만 군은 왈라키아에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 이번 싸움의 승자는 드라큘라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다시 두 번에 걸친 오스만 군의 공격을 격파하기도 하였던 바, 메흐메트 2세는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와 있었던 드라큘라의 동생 라두 3세를 귀국시켜 왈라키아의 대립(對立) 군주로 세우고 드라큘라의 공포정치에 불안감을 느끼던 귀족들을 회유하여 그를 축출시키려는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군사적 행동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으니, 드라큘라는 결국 왈라키아에서 쫓겨나 떠돌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더 멀리는 헝가리 본토에까지 들어가 자신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를 반기거나 지원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체페슈(꼬챙이)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진 데다 늘 주전론(主戰論)만을 외친 까닭에 그는 어느새 군주들 사이에서 기피인물 1호가 돼 있었다. 게다가 헝가리에서는 헝가리 왕 마티아슈 1세와의 사감(私感)까지 겹쳐 지원은커녕 오히려 붙잡혀 구속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구속된 시간은 생각보니 길었으니 그는 무려 12년을 헝가리 부다의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는 사이 라두 3세가 왕이 된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의 완전한 제후국이 돼 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드라큘라에게는 호기로 작용되었다. 왈라키아의 속국화에 위협을 느낀 헝가리 왕 마티아슈 1세가 드라큘라를 다시 왈라키아의 군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드라큘라는 독실한 크리스트교도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왈라키아 군주였던 바사라브 3세를 몰아내고 1476년 왈라키아의 군주로 복위할 수 있었다.(라두 3세는 1475년 병사했다)
하지만 이번엔 축출된 바사라브 3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터, 1476년 말 그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앞세워 다시 왈라키아를 접수하고자 돌아왔는데, 이들은 상대하던 드라큘라는 그해 부크레슈티 인근의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전사하고 말았다. 오스만 군대는 그의 목을 베어 술탄에게 보냈으며 술탄은 왈라키아가 정복되었다는 의미에서 그 목을 이스탄불 광장에 효수했다.
그의 이미지 중에는 이렇듯 멋진 모습도 있지만 대개는 아래처럼 피에 굶주린 잔인한 군주로 그려졌는데,
그중에는 그를 예수를 처형하는 인물로 묘사한 그림도 있다.
하지만 팩트는 왈라키아의 군주로서 평생을 이슬람의 군대와 싸운 인물이라는 것이니,
그가 사라진 왈라키아는 곧 오스만 제국에 종속되었다. 이후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발칸반도 국가의 지원 요청을 수수방관한 사이, 오스만 제국은 유럽대륙의 심장부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쳐들어간다.
* '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 (IV)'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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