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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고의 악마 레오폴 2세와 벨기에 초코릿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7. 10. 06:40
흔히 사랑의 징표나 달콤함의 대명사로 통용되는 초코릿으로부터 악마의 숨결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초코릿 속에는 분명 악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르와츠(Berwaerts), 코트 도르(Cte d’Or), 자크(Jacques)의 벨기에 3대 초코릿에는 히틀러보다도 더 잔혹했던 악마의 숨결이 남아 있다. 그 악마의 이름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Leopold II, 1865-1909). 제국주의 시절,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고를 무력 점령한 후 거대한 카카오 · 고무 농장을 경영하며 최소 수십만 명에서부터 최대 1,50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의 농장에서는 오직 강제노동과 체형(體刑), 그리고 학살만이 도구로 사용됐기에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농장에서 죽어간 사람이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의 농장에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자는 마구잡이로 족쳐졌고 손이 잘려졌으며 목숨을 빼앗겼다. 그는 콩고의 국왕이자 농장의 경영주이자 악신(惡神)이었다. 그 악마적 경영의 결과 벨기에는 한순간에 카카오 수출국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설립됐던 위의 영세 초콜릿 제조업체들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해 세계적인 초콜릿 회사가 된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와 교수당하는 콩고 원주민
교수당한 콩고 원주민
노동을 견디지 못한 채 도망가면 가족들이 살해됐다.
피골이 상접한 원주민들
악마에게 당한 사람들
무슨 사진일까?
한 남자가 잘려진 딸의 손과 발을 바라보고 있다. 레오폴의 사병들은 성인들 대신 노동력이 없는 그의 부모나 자식들의 수족을 잘랐다. 위 사진에 노인과 어린이만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옥을 알린 사진
손목이 잘린 소년의 표정이 이곳이 지옥임을 말해준다. 1900년 영국 기자에 의해 지옥 콩고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레오폴의 사병들은 총알을 낭비하지 않았다.
레오폴 2세는 '원주민들에게 폭력을 가해도 좋지만 아까운 총알은 낭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병사들은 총알을 사용하지 않고 체벌을 가했다는 증거로써 손발을 잘라 제출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콩고인
도망간 자들은 레오폴 군대의 비호를 받는 다른 부족에게 붙잡혀 와 처형당했다. 이것은 훗날 콩고 내전의 원인이 된다.
레오폴의 사병들은 총알을 낭비하지 않았다.
총알을 아낀답시고 3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쏘았다. 그래도 이렇게 죽은 사람은 차라리 행복했다.
레오폴에게 고통받는 콩고인을 풍자한 만화.
레오폴 2세는 카카오와 고무 이외에도 상아, 금, 다이아몬드, 주석, 구리, 아연 등을 채굴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악마의 미소
콩고인 1천만 명을 살해한 그에게 악마라는 호칭 외에 달리 부를 말은 없다.
1885년 레오폴 2세는 영국, 프랑스, 포르투칼 등 콩고를 노리는 열강의 틈바구니를 뚫고 운좋게 콩고 분지를 선점한다. 영국은 열악한 환경의 콩고 땅을 원치 않았고 대신 포르투칼을 지원했으나 레오폴은 독일 비스마르크의 적극적 지원으로써 본국 벨기에보다 80배나 넓은 콩고를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벨기에 의회는 식민 경영의 비용을 걱정해 침략에 반대했으므로 레오폴은 콩고를 철저히 자신의 사비로 경영해야 했으며 따라서 그만큼 철저히 자신의 개인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때마침 세계적인 자동차 붐이 일어 타이어 용 고무의 수요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제 콩고는 완전한 그의 사유재산으로써 아무런 제도적 제약도 거리낌도 없던 바, 레오폴 2세는 1885년부터 20년 간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 잔혹하게 원주민들을 부렸다.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벨기에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고 브뤼셀에 공원과 궁전 등 여러 건축물들을 세웠다. 까닭에 그는 벨기에에서 인기 만점의 군주가 되었으나, 1900년 초 영국 기자와 다른 나라의 선교사들에 의해 잔혹한 실상이 폭로되며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04년 영국과 미국이 간섭, 콩고를 왕의 사유재산에서 분리시켜 벨기에가 국가차원에서 통치하게끔 압력을 넣었다.
운좋게 콩고는 점령했지만 열강에는 끼지 못했던 바, 레오폴 2세는 압력에 굴복해 콩고를 벨기에에 합병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아진 것은 없었으니 사지절단만이 사라졌을 뿐, 전후 75년 간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 통치에 허덕였다. 콩고는 1960년 콩고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으나 식민지 시절 벨기에가 이용한 종족 차별정책으로 2차례의 극심한 내전을 겪어야 했고,(내전 기간 중 4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2천5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식민 통치를 받은 르완다, 브룬디도 내전을 치러 수십만이 학살되는 비극이 재현되야 했다.(르완다 내전으로 국민 814만 명 중 240만 명이 난민이 되어 흩어져 주변국에 분산 수용되었다)
벨기에 화폐 속의 레오폴드 2세
그는 여전히 벨기에 중흥군주로 추앙받는다. 악마가 추앙받는 아주 드문 예이다.
2007년 유로화에도 등장했다.
브뤼셀 왕궁 앞의 레오폴드 2세 동상
지난 6월 4일 동상 앞을 마스크를 쓴 흑인이 지나가고 있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와 수천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콩고, 부룬디, 르완다 내전의 원인은 벨기에 식민통치 시절에 그어진 인위적인 국경과 종족 차별정책에서 비롯된 앙금의 폭발이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레오폴 2세는 '벨기에의 중흥군주'요 '건축왕'으로써 우러러지고 있으니 벨기에에는 그의 이름을 단 공공건물이 넘쳐난다. 그의 기념 거리 또한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도 역사의 심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니, 그 시발은 지난 5월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비롯된 미국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건너갔고, 벨기에에도 불똥이 튀었다. 첫 타깃은 레오폴 2세로, 의식 있는 벨기에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레오폴 2세의 동상 철거를 요구했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도 없애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이제껏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식민역사의 실상을 학생들에게 교육시킬 것을 요구했다.(지난해 벨기에의 인종차별 문제 등을 조사한 ‘아프리카계에 대한 유엔 전문가 워킹그룹’은 "벨기에 고교 졸업생 중 4분의 1이 콩고가 벨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 및 그 기간 동안의 비인간적 통치를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시위 기간 중 레오폴 2세의 동상은 이렇게 됐고
또 이렇게 되었다.
벨기에에서의 바람은 레오폴 2세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청원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콩고 출신 부모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14살 소년 노아가 지난달 국제 온라인 청원 누리집 ‘체인지’에 레오폴 2세의 동상을 없애자는 글을 올린 것인데, 그는 레오폴 2세가 자신의 선조들을 수없이 죽였다며 '레오폴 2세 동상이 브뤼셀에 있는 것은 히틀러 동상이 베를린에 있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30일 마감된 청원에는 총 8만2679명이 참여했다. 이는 목표치인 15만 명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벨기에 필리프 국왕이 콩고민주공화국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에게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과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다.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가 편지를 보낸 30일은 콩고 민주 공화국이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지 꼭 60년째 되는 날로, 1885년부터 1960년까지 콩고를 식민지배한 데 대해 완곡한 사과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여론에 떠밀린 벨기에 의회는 콩고 식민지배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꾸리기로 했고, 교육 당국은 벨기에 학생들에게 식민역사 교육을 하기로 했다. 벨기에는 그간 콩고에의 잔인한 식민 통치에 대한 평가는 외면하고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식의, 일본이 한국에 대해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만 되풀이해 왔었다.
치세케디 민주콩고 대통령은 벨기에 국왕의 편지에 대해 "민주콩고 역사상 벨기에로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서한이었다"고 화답했으나, 이 사과는 과거 일본이 한국에 한 '통석의 념(念)'과 같이 떫떠름하고 미지근한 느낌이다. 다만 악마에 대한 응징은 철저히 이루어졌으니 벨기에 곳곳을 장식하던 레오폴 2세의 동상은 모두 아래와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초코릿은 끄떡없다.
벨기에의 초코릿 가게
벨기에의 초콜릿 1년 생산량은 60만t에 달한다. 1인당 연간 소비량은 무려 6㎏으로 세계 1위다. 당연히 초콜릿 수출량도 엄청나다. 2016년 기준으로 초콜릿 해외수출은 25만t으로 인구 비례 수출량으로 따진다면 단연 세계 최고다. 악마에 대해서도 인간들은 선택적 기억을 한다.
벨기에 핸드 초코릿
놀랍게도 이 핸드 초코릿은 파는 물건이다 (미친 거 아냐?)
실상은 콩고인들의 잘린 손과는 무관하고 벨기에 엔트워프를 지키며 통행료를 받던 거인의 손이라고 하는데 어찌됐든 식민시절의 잔학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1998년 미국 작가 애덤 호크쉴드의 책 <레오폴드 왕의 유령>이 출판되면서 벨기에의 식민 지배의 충격적 실상이 드러났다. 또 2001년 콩고 초대 총리이자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패트리스 루뭄바의 1961년 암살에 대한 책 <루뭄바의 암살>이 출판되면서, 벨기에는 2002년 루뭄바 암살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루뭄바 집권으로 인해 콩고의 막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벨기에의 지배력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벨기에 정부는 지난해 민주콩고 식민통치 시기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수천 명을 부모로부터 납치해 분리·격리하고, 강제 입양시킨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벨기에 식민통치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인 인종 분리 차별정책에 따른 조처였다.
이 혼혈 여성들은 자신들을 가족들로부터 강제 분리조치시킨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지난 달 29일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민주 콩고, 르완다, 부룬디의 위치
2017년 2차 콩고 내전 사진
이 싸움의 원인 제공자는 벨기에라는 유럽의 작은 나라였다.
내전의 또 다른 원인 콜탄
콜탄(coltan)은 탄탈륨(tantakum)이라는 금속화합물을 얻기 위해 채취하는 광석으로 탄탈륨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첨단 전자기기에 필수불가결한 물질이다. 민주 콩고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자원의 저주'라는 말을 정도로 각 부족의 자원 쟁탈전이 치열한데 근자에는 특히 수요가 많고 고가인 콜탄 쟁탈전이 치열하다. 까닭에 콜탄은 '푸른 금'(Blue Gold)으로도 불리며, 내전의 원인이 되는 탓에 '블러드 콜탄'(Blood Coltan)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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