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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의 의문의 팔찌 하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8. 14. 07:31
최근 재개장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감옥(嵌玉) 팔찌 하나에 꽂혔다. 금으로 만든 둥근 원판에 각종 보석을 박아 넣은,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단 한 점밖에 없는 특이한 형식의 고혹적인 팔찌였다. 이후 그 물건은 나에게 많은 숙제를 안겨 주었던 바, 요즘은 온통 거기 매달려 있지만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선은 그 팔찌가 내게 던진 질문이 너무 과하기 때문이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팔찌의 주인은 여왕인가?
1973~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발굴된 황남대총은 그에 앞서 연습삼아 발굴한 옆의 작은 무덤 천마총에서조차 금관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당황시키고 놀라게 했다. 당연히 황남대총에서는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약 5만 점) 금관이 나온 것은 물론이니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 반면 남분에서는 금동관과 은관이 나왔는데, 북분의 금관에 비해 너무 초라할뿐더러 디자인도 조악해 이것도 관모(官帽)인가 싶을 정도이다.
알려진 대로 황남대총은 북분과 남분으로 이루어진 부부 합장묘로서, 북분의 주인은 여자이고 남분의 주인은 남자이다. 이는 여러 유물로써 이미 증명된 것이므로 그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논할 필요가 없겠으나 다만 '왜 부인의 무덤이 더 크고 높으며 어찌하며 부장품 또한 격이 높고 화려한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이 원초적이고도 기본적인 문제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쉽고 명료한 답은 '북분은 여왕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편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되지만 모범답안은 아니다. 선덕여왕 이전에 또 다른 여왕이 존재했다는, 어딘가에서는 당연히 보여야 할 기록이 없는 까닭이다. 중론은 이 무덤의 주인이 내물왕(재위 356~402)이라는 것이지만 내물왕은 보반부인(保反夫人)이라는 와이프가 있었던 바, 내물왕을 여왕이라 우기기도 어렵다. 다음 왕인 실성왕이나 눌지왕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
2. 팔찌는 어디서 만들었나?
이 팔찌를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가를 말하려면 아래의 물건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973년 6월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칼 한 자루로,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빌려 흔히 '계림로 보검'이라 불려지는 것이다. 칼은 평지나 다름없던 땅 속 무덤에서 나왔는데,('계림로 14호분'으로 명명됨) 그것이 왕릉급 무덤이 아니라는 데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 칼은 완형으로는 현재 세계에서 단 1점밖에 없는 트리키아(고대 루마니아 불가리아 지역) 제작 기법의 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가치는 1조 달러에 이른다. 무한대라는 뜻이다.
2019년 1월 11일 카자흐스탄 국영 일간지 <에게멘 카자흐스탄(Egemen Qazaqstan)>은 1973년 경주에서 발견된 '계림로 보검'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와 비슷한 칼이 카자흐스탄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는 것으로 이 보도 내용은 국영방송 <하바르(Khabar)> 등과 기타 방송을 통해서도 상세히 보도됐다. 비록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된 칼은 완형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형태는 '계림로 보검'의 것과 거의 유사했던 바, 그 연관성을 집중적으로 탐색한 것이었다.
~ 결론은 ‘Кореяда табылған алтын сапты семсер ежелгі қазақ жерінде жасалған’, 즉 ‘한국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고대 카자흐에서 제작된 칼’이라는 것. 카자흐스탄 것은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다시 팔찌에 대해 얘기하자면 위의 팔찌는 황남대총 북분 주인공의 왼팔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같이 발견된 다수의 팔찌 중에서 이것이 유독 눈길을 끈 이유는 기존의 것과 다른 특징 때문이었다. 즉 기존 신라의 팔찌들은 고리가 가늘고 단면이 둥글거나 네모난 것이 대다수였으나 이 팔찌는 금판이 넓고 길쭉하며 조밀한 펀칭 작업으로 세선(細線)을 만들고 그 안에 터키석 등의 보석을 상감세공(象嵌細工)으로 부착시킨 특별한 형식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견 계림로 보검과 같은 세공법으로 보였으나 계림로 보검은 비슷한 유물이 존재하는 반면 이와 같은 팔찌는 세계에서 단 1점뿐이었던 바, 그 출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우선 일본에서 발간된 실크로드 도록(圖錄)을 찾았지만 거기서도 이와 같은 유물은 없었고 다만 북위(北魏)의 공예품인 내몽고 서하자향(西河子鄕) 감옥환(嵌玉環)이 어느 정도 유사했다. 하지만 모양은 확연이 달랐다.(오히려 그것이 좀 더 세련됐다)
이에 나는 다른 루트로써 이 팔찌의 근원을 찾아보았는데, 그러면서 그것이 수입품이라는 데 고정되지 않고 신라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폭넓게 살펴보았다. 물론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외의 것들을 알아내었던 바, 그것부터 차례로 풀어보려 한다. 이렇게 찾다 보면 언젠가는 황남대총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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