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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길을 마다한 예춘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8. 17. 20:23
예씨는 흔한 성이 아니다. 그래서 한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다. 근자에 들은 예씨 성은 피트니스 모델 예정화와 드라마 '주몽'에서의 동명성왕의 와이프 예씨부인 예소야인데, 예소야는 아무래도 작가가 만들어낸 이름일 듯싶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명성왕 와이프의 이름은 예씨부인에 머무는 까닭이다. 예씨는 의흥 예씨 단일본이므로 모델 예정화는 예씨부인의 후예라고도 생각될 수 있겠으나 그럴 리는 없다. 예씨 부인의 예(禮)씨는 성씨가 아니라 이름이며 성씨 예(芮)씨는 고려 때 생겨났기 때문이다.
예전에 들은 예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는 예춘호(芮春浩)가 있다.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정치인으로 입신하였던 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 영도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지역구에서 7대 의원이 되었던 바, 아성을 굳히며 거물 정치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했다. 게다가 그는 대통령 박정희가 영수로 있는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사건이 있었다. 1967년 3월, 제6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초심을 잃고 3선을 위한 개헌 작업에 돌입하였고, 1969년 9월 14일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제3 별관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본회의장을 지키던 야당 의원 몰래 이루어진 날치기 통과였는데, 까닭에 미처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했던 육효상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세 번 두드려 가결을 선포했고, 임무를 완수한 공화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을 피해 급히 제3별관 뒷문을 빠져나갔다.
야당 의원 중에서도 3선 개헌에 찬성한 사람이 있었으니 조흥만, 연주흠, 성낙현이다. 청사에 새겨야 할 이름이다. 반면 여당에서도 반대가 있었으니 정구영 전 총재를 비롯해 예춘호, 김용태, 양순직, 박종태, 이만섭 의원은 반대했는데, 이 중 예춘호는 가장 먼저 불가(不可)의 목소리를 냈다.(그는 이로 인해 공화당에서 제명되었으며 정구영, 양순직, 감달수와 함께 끝까지 개헌 반대의 소신을 지켰다)
야당은 해당 개헌안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학생들의 극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에 즈음해 조성된 남북한 화해 무드로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났고, 경제발전을 바라는 국민 염원에 힘입어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개헌안은 총 유권자 77.1%의 참여에 65.1%의 찬성을 얻어 통과됐다. 민주공화당 창당 멤버이자 당 사무총장으로서 박정희, 김종필에 이어 제3인자 자리에 있던 예춘호는 이때 한국 정치에 절망하고 야인이 된다.
예춘호는 1971년 제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에 복당하나 1972년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정구영과 함께 다시 공화당을 탈당, 유신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다. 윤보선, 장준하, 한완상, 김대중, 이문영, 문동환, 함세웅 등이 동지였다. 그러면서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시 중구-영도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79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신민당에 입당해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그해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사망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섰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예춘호는 부산역 앞에서 붙잡혀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55일간 내란음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그는, 김대중이 집권하면 과도 내각의 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각본에 맞춰 고문을 당했다. 그때 그는 "경상도 놈이 왜 전라도 놈을 돕느냐"는 소리를 들으며 심한 구타를 당했고 이때 고막을 다치고 눈주위가 함몰되었다. 그는 결국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법정에 세워졌고,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으며 국회의원직도 박탈당하는데, 그는 최후진술에서도 꿋꿋이 DJ 구명을 호소했다.(이때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구형됐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1984년 재야 세력을 규합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를 결성한 후 직선재 개헌 및 DJ 동교동계와 YS 상도동계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다. 1987년 마침내 국민 염원이었던 직선제 개헌은 이루어지나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불출마 약속을 뒤엎고 독자 출마를 결행하자 이에 실망하여 결국 제3의 길을 걷게 된다.(동상이몽의 양김은 끝내 화합하지 못했고, 결국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출마한 이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은 역사에 또 한번의 오점을 남긴다)
1987년 예춘호는 조순형, 제정구, 유인태 의원 등과 함께 제 3정당인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상임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이 3선을 쌓았던 부산 영도에 출마하였으나 YS계의 대표주자 김정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선거판은 노태우의 민정당과 DJ, YS, JP의 3김 야당이 나와바리 따먹기를 하던 구조였던 바, 예춘호는 YS에게 해를 입히는 후보라는 마타도어 속에 불과 11.9% 득표라는 초라한 성적(4위)을 거두었다. 이후 예춘호는 정계를 은퇴했고, 1992년 YS는 이 땅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달 22일에 예춘호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뉘 늦게 들었다. 문득, 편함을 마다하는 이와 같은 아웃사이더로 인해 세상이 바로 굴러가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예전에 백기완 선생이 고(故) 장준하 선생에 대해 한 말이 있다. "부산 피난 시절, 책을 한 리어카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 길을 올라가는 사람을 보았다. 매우 힘든 듯해 뒤에서 밀어주며 보니 리어카에 실린 책은 <사상(계)>이라는 잡지였다. 물어보니 자신이 만든 잡지라고 했다. 잠시 쉬는 틈에 그것을 집어 읽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난리 통에 누가 이런 책을 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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