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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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모던보이 정세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 14. 23:57
몇 해 전 북촌 열풍이 불었을 때 나는 오히려 관심 밖이었다. 북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우연찮게 들어 알고 있던 까닭이니, 그래서 북촌에 몰려드는 내외국인들을 볼 때면 '저 사람들, 혹시 저기를 조선시대 유적 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는가'하는 생각에 좇아가 내막을 가르쳐주고 싶은 괜한 노파심이 들기도 했다. 아울러 이 북촌을 만든 한 남자의 아름다운 일생을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북촌이 여느 관광지보다도 더욱 붐빌 무렵,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무척이나 괴로웠을 터, 지금도 '조용히 해달라'거나 '집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거나 '계단 위에 오르지 말아달라'는 한글 혹은 일본어 글귀를 써 붙인 집이 눈에 띈다. 북촌이 비명을 지르던 때(뉴스핌 사진) 북촌은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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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의에 관한 진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 4. 23:23
앞서 2020년 11월에 공개된 새로운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말하며 그 해시계의 시반(時盤)에 새겨진 중국인 하일지의 북극고도(위도)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미 세종 때 수도 한양의 위도를 산출해냈음에도 이후로는 사대(事大)만을 일삼으며 천문과학을 등한시한 까닭에 결국 숙종 때 이르러서는 중국인이 산출한 위도에 의거한 시계를 만들어 써야 하는 신세가 됐던 것이다(☞ '퇴보하는 우리의 천문과학 - 앙부일구에 얽힌 일화') 말했다시피 독자적인 하늘을 가지려 했던 세종대왕의 의지는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는 없었으니 그때의 흔적만이 만원권 지폐에 아련할 뿐이다. 이번에 공개된 해시계작년 11월 18일, 미국으로 반출됐던 보물급 앙부일구 1점이 국내로 들어와 공개됐다. '북극고 37도 39분 15초'의 명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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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던진 남산 조선총독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2. 18. 23:38
1995년 조선총독부로 쓰이던 중앙청 건물의 철거가 결정 났을 때 보존이냐, 철거냐를 두고 다시 설왕설래, 갑론을박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가차 없이 집행했고, 결국 폭파 해체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잘한 일로서 건물 뒤에 가려졌던 경복궁 근정전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아마도 해체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조선의 법궁(法宮)을 부수고 그 자리에 식민통치기구를 세웠던 것이니 그와 같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당시를 돌아보면 그저 참담할 뿐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사실 총독부 설치 당시의 것이 아니고 1926년에 새로 지은 청사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며 총독부를 설치했으나 청사를 신설하지는 않고 1906년 남산 왜성대에 건립했던 통감부 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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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사(조선신궁) 자리를 돌아보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1. 15. 00:56
일제는 1919년 7월 18일,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朝鮮神社) 건립을 확정·공표하였다. 3.1만세운동이라는 민족적 거사에 놀란 일제는 조선인의 사상을 바닥부터 개조할 필요를 느꼈던 바, 일본의 신도(神道) 사상과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를 조선에 입식(入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수도 한양에 일본 귀신들의 대빵이자 일왕가(王家)의 직계 조상신으로 모시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 텐노'(明治天皇)을 합사한 신사를 만들어 참배토록 하자는 관폐대사 조선신사안(官幣大社 朝鮮神社案)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 장소로는 서울 남산 중턱이 낙점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인 왜성대 경성신사(京城神社) 인근(지금의 리라초등학교 자리)과 경복궁 신무문 뒤쪽 백악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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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I)-동소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0. 25. 00:12
혜화동은 한양도성 4소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에서 유래되었다. 1397년(태조 5년) 이성계가 한양 성곽을 축조할 때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는데 혜화문은 4소문 중의 동소문(東小門)에 해당한다.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창경궁의 정문 이름과 같아 혼란을 주었으므로 1511년(중종 6년) 혜화문으로 바꾸었다. 뜻은 거의 같아 '널리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문'이라는 의미였다. '수선전도'에서 본 혜화문의 위치 꼭 뜻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 문은 정말로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니 북대문인 숙정문을 대신해 실질적인 북문 역할을 담당한 까닭이었다. 왜냐하면 숙정문은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건립 초를 제외하고는 문이 내리 닫혀 있었고, 또 그곳으로 나가봐야 길이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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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5.16 혁명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0. 21. 21:43
혜화동은 서울에 살던 청춘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쯤의 추억은 담겨졌을 공간이다. 기쁘면 기쁜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최유나는 '밀회'라는 노래에 과거의 슬픔을 담았다. 물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터, 아마도 그래서 제목이 '밀회'인지도 모르겠다. 그 노래의 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번만 우연처럼 다시 한번만혜화동 그 거리에서잠시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당신과 거닐고 싶어....... '밀회' 노래 듣기 혜회동 마로니에 공원구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조성된 마로니에 공원은 지금도 청춘의 메카다. 하지만 오늘 쓰려고 하는 내용은 추억이나 낭만이 아니고 혜화동의 얽힌 어두운 현대사이다.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썼어도 벌써 썼을 것 같아 그간 펜을 잡지 않았는데, 최근 찾아보니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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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신 여호와와 단군왕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10. 18. 14:43
언제나 그렇듯 올해 개천절도 있는 듯 없는 듯 부지불식간에 지나갔다. 그날이 국경일이라 쉴 수 있었음에도 별다른 인식이 없었던 것인데, 혹 천도교나 대종교와 같은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그저 그렇게 그날을 대했을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추석연휴에 묻혀 더더욱 인식을 못한 듯 여겨지니, 만일 알았다면 인왕산 단군성전에 걸음해 누가 무슨 행사를 하는지 기웃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직공원 안의 사직단 사진이 필요해 그 동네에 가야 했던 마련이었기에.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거니와 본래 국조(國祖) 단군왕검을 모시는 단군성전은 1985년 서울시가 민족정기 정립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사직공원 내에 건립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가 워낙에 극심해 결국 철회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