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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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유관순 열사의 흔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28. 00:28
과거(편의상 20세기라 하자)와 달리 지금 21세기 학생들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니, 대부분의 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의 항일운동이 기재되지 않은 탓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대략 구시대의 아이콘쯤으로 치부된 듯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은 대략 7천500명인데(박은식의 ) 그중에서 유관순만 특별대접(?)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다, 20세기에 유행한 영웅 만들기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것 같다. 작금의 조국(曺國) 전 청와대수석 사태가 말해주듯 요즘 젊은이들은 '특혜'에 민감하다. 그들은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극혐과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랄까..... 그것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유관순 열사에 관해서는 독립운동 영웅 중의 한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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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 이야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7. 01:33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쓴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백악주산론과 남대문'에서 설명했다. 숭례문의 이름을 지은 자는 백악주산론의 주창자 삼봉 정도전인데, 그는 자신이 백악주산론을 주장함으로써 경복궁과 숭례문이 화산(火山)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던 바, 방화(防火)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듯하다. 그래서 현판을 종서(縱書)하는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된 것이다. ~ 하지만 그 가상한 노력이 무상하게 숭례문은 2008년 2월 11일 새벽, 70살 먹은 어떤 또라이의 방화에 의해 전소됐다. 그놈은 징역 10년을 먹었는데 복역 중 죽지도 않고 2018년 만기 출소했다. 그렇다면 1396년(태조 5) 창건된 숭례문 현판 글씨를 최초로 쓴 사람은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종의 기원(II)ㅡ신촌 봉원사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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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주산론과 숭례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6. 06:04
조선이 한양에 정도(定都)할 때 주산(主山)을 어느 산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격론이 있었던 듯싶다. 살펴보자면 크게 3가지 안(案)이 부딪혔다. 1.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 ㅡ 안산(신촌 봉원사, 연세대, 이화여대 등을 품고 있는 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것으로 하륜이 주장함. 2.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 ㅡ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무학대사가 주장함. 3.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 ㅡ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과 타락산(낙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정도전이 주장함. 하륜은 계룡산 신도안(新都案)이 도성의 입지로는 좁고 궁벽한 위치라 하여 반대하고 한양 정도를 이룬 사람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주장한 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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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뜨거운 밀회가 이루어지던 숙정문밖과 선잠단(先蠶壇)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3. 23:52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성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본래 한양의 방위는 유교의 이념을 좇아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신(信)에 충실하였으니 각각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의 이름이 되었고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었다. 하지만 북대문에 의당 들어가야 할 지(智)자는 생략되었는데, 앞서 숙정문 개요에서 말했듯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설명을 찾을 길 없다. 혹자는 이르기를, 원래는 지(智)자를 삽입해 홍지문(弘智門)이었다가 이름이 변했다고도 하는데, 왜 숙청문이 됐고, 그것이 왜 다시 숙정문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에는 궁색하다. 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다만 에 일대의 소나무의 채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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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혹은 숙청문에는 문루가 존재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2. 23:59
가끔 백악산(북악산)을 올라 숙정문(肅靖門) 앞을 지날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하다. 이 일대는 그 전에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앞서 말한 1968년의 1.21사태 이후 청와대 뒤쪽 북악산 도성 구간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접근조차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무려 38년 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삼청터널 인근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약 1.1㎞ 구간이 개방되었다.(2006년 4월) 이후 점진적으로 개방 구간이 확장되었는데, 올해 2022년에는 50여년간 폐쇄됐던 성곽 남측면도 개방돼 전체 구간이 뚫린다하니 기대가 된다. * 백악일까, 북악일까? 문화재청은 2007년 북악산 일대를 사적 및 명승지 제10호로 지정하였다가 2009년 명승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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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I)-윤택영의 재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 31. 05:49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되는 순종은 왕세자 시절인 1882년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의 딸 민씨(순명효황후)와 혼인하였으나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아내와 사별했다. 이에 1907년 계비를 맞이하니 이 분이 윤택영의 딸 윤씨(순정효황후)이다. 이때 윤씨의 나이 12살이었고 순종은 33살이었으며 장인인 윤택영은 31살로, 사위보다 2살이 적었다. 하지만 황실과의 혼인인데 이것이 무슨 대수랴? 윤택영은 제 딸이 계후가 될 수 있도록 엄청난 재물을 뿌리며 로비를 했고, 당시 궁궐 내명부의 최고 어른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1854-1911)는 윤택영의 청을 까탈 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잖아도 윤씨 집안에 신세 진 것이 많았던 엄씨였던 바, 이 기회에 그것을 다 갚고자 한 듯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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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 30. 13:49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은 구한말의 관료로서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되는 19010년 경술국치 때 이에 앞장선 이른바 경술8적의 한 사람이다. 그의 혁혁한(?) 공로를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III) - 마지막 어전회의와 통감부 합병 비화'에서 언급한 바 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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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ㅡ민영휘 저택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 29. 23:59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대표적 친일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친일파 중에서도 그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로 인해 거부(巨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재에 밝았던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물과 친일의 대가로 획득한 재물들을 잘 불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친일파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권력형 부정축재자 + 재테크의 달인'이지만, 근자에 주목을 받고 있는 미얀마 군부 기업에 가까운 형태로서 재산을 불렸다. 즉 권력을 기업 운용에 이용한 것인데, 나아가 그는 은행을 소유한(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 부동산 재벌이기도 했으며,(농지만 5만석) 한편으로는 사학재단 이사장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