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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유관순 열사의 흔적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2. 28. 00:28
과거(편의상 20세기라 하자)와 달리 지금 21세기 학생들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니, 대부분의 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의 항일운동이 기재되지 않은 탓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대략 구시대의 아이콘쯤으로 치부된 듯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은 대략 7천500명인데(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 그중에서 유관순만 특별대접(?)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다, 20세기에 유행한 영웅 만들기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것 같다.
작금의 조국(曺國) 전 청와대수석 사태가 말해주듯 요즘 젊은이들은 '특혜'에 민감하다. 그들은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극혐과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랄까..... 그것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유관순 열사에 관해서는 독립운동 영웅 중의 한 명을 잃는 듯해 매우 안타깝다.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으면 그에 대해서 알 길은 특별히 없기에.... 그 안타까운 마음으로 잊혀져 가는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그의 일생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의 기록을 기본으로 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쩌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을 법했으나 1915년경 공주 지역 감리교 선교사로 왔던 앨리스 햄몬드 샤프 부인(한국이름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을 받아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학하였다. 그리고 1918년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들은 덕수궁까지 몰려왔다. 이에 정동에 있는 이화고보(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요하기 시작했으나 프라이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음으로써 만세운동 참여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관순은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는 3월 1일에 이어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가 결국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다행히도 그는 학교당국의 교섭으로써 풀려났으나 3.1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휴교하는 바람에 3월 13일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골인 관계로 고향 천안에서는 아직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없었다.
이에 17세의 유관순은 고향 사람들에게 서울의 상황과 취지를 설명하며 만세운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이끄는데 이것이 바로 천안 사람 약 3000명이 참가했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다. 그러자 이를 진압하러 온 천안철도엄호대의 군병력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그와 같은 총칼에 의한 무차별 진압 속에 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는데, 관순은 이때 현장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다.
유관순 생가의 단 한 채뿐인 살립집
이때 관순은 일단 피하라는 이웃의 강력한 권고에 몸을 숨기지만 다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붙잡혀 (붙잡히게 된 자세한 경위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이후 공주경찰서 감옥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1919년 6월 30일) 그는 공주재판소 1심 재판에서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며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항거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어린 학생으로는 드물게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그의 정연한 논리가 재판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있겠지만, 판결은 그가 3.1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서울에서 행해진 경성재판부의 복심에서는 3년으로 감형되었다. 경성복심법원 재판관 쓰카하라 도모타로(塚原友太郞) 판사는 1심 판결이 지나치게 과중하다며 형량을 낮추어 언도한 것이다. 그는 유관순에 동정적인 편이었으나 1심의 판결이 5년인 까닭에 감형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관순은 최종심인 고등법원에의 상고를 포기했다. "삼천리강산이 일제의 차하인데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하는 것이 상고 포기의 이유였다. 그는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1881~1961)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어윤희는 3월 1일 개성만세운동을 주도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선배로서 관순을 잘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어윤희와 함께 옥중 기념 만세운동까지 주도했다. 이에 그는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고 연이은 구둣발 구타로 방광이 파열되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방계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에 즈음해 일본정부는 한국 정치범 5천 명에 대해 사면령을 발표하였고, 이때 관순은 1년 6개월로 감형된다. 미결기간을 감안하면 빠르면 1920년 10월에 출소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파열된 방광의 치료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바,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결국 서대문 감옥 내에서 순국하였다.
문화재 방송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유관순의 유해는 여섯 토막이 나 석유통에 담겼고 그 상태로 10월 12일 이화학당 관계자들에게 넘겨졌다. 학교에서는 14일 그의 시신을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었던 바, 지금 이태원 민속 신당(神堂)인 부군당(府君堂) 옆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서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부군당이 있는 이태원 가파른 언덕은 당시 공동묘지였으므로 2015년 9월 용산구청에서 유관순 열사가 안장됐던 그곳에 추모비를 세웠고, 그 앞 도로를 '유관순 길'로 명명했다.
그런데 이태원 공동묘지는 1935년 일제가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내며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부터 이장이 추진되었던 바, 유연고 묘 4778기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됐고, 무연고 2만8000여 기는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경성부 위생과 주관으로 화장된 후 한 곳에 합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묘지는 망실(亡失)되었다. 이태원 묘지에 있을 때도 묘비조차 없었기에 아무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무연고자의 시신이 합동으로 화장돼 묻힌 까닭에 유관순 열사 역시 망우리 묘지 무연고자 묘에 잠들어 있으리라 추정하여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현재로서는 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 마련된 무연분묘가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 된 셈이다. 그래서 이곳에 기념표석이 세워지고, 지난 2020년 3.1운동 100주년 때는 이화여고동창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참배객이 몰려 분묘의 토석이 무너질 지경이었다고 하는데, 그러함에도 그곳에 서면 쓸쓸함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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